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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뒤숭숭한 대한민국에 최근 며칠새 메시지 여러 통이 날아왔다. 평양에서는 김여정의 담화 메시지가 오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위로 친서가 뒤이어 왔다. 거기다가 의왕 서울구치소에서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필 편지가 왔다.

지난 4일 유영하 변호사가 낭독한 친필 편지에서 박근혜는 "앞으로 더 많은 확진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해서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라며 "부디 잘 견디어 이겨내시길 바랍니다"라면서 국민들을 위로했다. 그런 다음,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위선과 독선'을 비판한 뒤,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보수 통합을 이룰 것을 주문하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했다.
 
"서로 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메우기 힘든 간격도 있겠지만, 더 나은 대국 위해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들었던 여러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 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서로 분열하지 말고 역사와 국민 앞에서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여야를 불문하고 뭉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뭉치라는 이야기다. 국민통합이 아니라 보수통합의 메시지인 것이다. 자신이 대통령을 지냈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만한 글이다.

그는 '기존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 세력이 뭉칠 것을 호소했다.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보수와 극우가 결집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간 박근혜 측으로부터 냉대를 받은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한테는 반가운 메시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정치적 메시지 외에 자신을 비호하는 내용도 편지에 담았다. "2016년 테러를 당한 이후 저의 삶은 이 나라에 바친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2016년에 자신이 테러를 당했다는 표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국민 대다수의 시선을 그가 냉정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의 편지는 코로나19로 상심에 빠진 대한민국을 한층 더 우울하게 할 만하다. 중죄를 지은 전직 대통령이 회개하고 참회하기는커녕 변명과 욕망을 드러내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위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편지는 죄 지은 전직 대통령의 편지답지 않은 것이었다.

양자·재산·묘지... 이승만의 편지들

국민들에게 버림 받고 하와이로 도피한 1960년 4·19 혁명 이후의 이승만 전 대통령도 그랬다. 그 역시 전직 대통령답지 않은 편지들을 많이 보냈다.

4·19로부터 40일 뒤인 5월 29일 아침 김포공항을 통해 하와이로 날아간 이승만은 이듬해인 1961년 늦가을에 편지를 보냈다. 양녕대군종친회에 보내는 이 편지는 자신의 제사를 책임져줄 양자를 들이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1961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승만씨, 양자 맞기로 승낙... 후보자로 추천했던 이인수군 결정'이란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승만 박사의 양자로 양녕대군종친회가 추천한 제1후보 이인수(31, 고대 대학원 경영학과) 군을 양자로서 맞겠다는 이 박사로부터의 회신이 지난 구일 소인(消印)으로 도착하였다. 전(前) 이 박사 비서 황규면 씨를 통하여 양자 수속서류와 편지 두 통이 종친회 전무이사 이유선 씨에게 전달됨으로써 십일일 상오 당사자에게 통고되었다."
 
이승만은 이유선 전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인수 군의 입양의 건은 황 비서와 상의하여 조속히 법적 절차를 진행하기 바란다"고 했고 종친회에 보낸 서신에서는 "인수 군의 입양 수속서류를 날인 반송하니 속히 여권 수속을 하여 이곳으로 보내라"고 했다.

이승만은 폐위된 양녕대군의 16대손이고, 이인수는 17대손이다. 이승만이 청년기를 보낸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양반 사대부들은 같은 문중에서 항렬이 낮은 사람을 양자로 들였다. 이렇게 하는 주 목적은 사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이 최측근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들인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고, 4·19 때 이기붕 일가의 극단적 선택으로 양자를 잃은 뒤에 후계자를 새로 물색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다. 망명객이 된 이승만은 자신에 대한 역사의 평가보다는 제사를 지낼 후계자의 선택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간지에 편지가 공개되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입양에 관한 편지를 띄웠던 것이다.
 
 이화장에 있는 이승만 집무실.
 이화장에 있는 이승만 집무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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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가을에도 이승만의 편지가 언론에 보도됐다. 부인인 프란체스카가 발송한 이 서한은, 지금의 서울 대학로 동쪽인 이화장에 있었던 이승만 자신의 물건들을 원상복구시키라는 편지였다. 4·19 뒤에 윤보선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승만 자택에서 반출한 물건들을 원래 위치에 갖다 놓으라는 내용이었다.

1963년 9월 10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재산은 이화장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편지'라는 기사는 "하와이에 망명 중인 이승만 씨는 현재 청와대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자기 재산에 대해 원상복구를 시켜줄 것을 정부 당국에 요구하는 서한을 이씨의 비서였으며 재산관리인인 황규면 씨에게 보내왔다"고 보도했다.

이승만의 편지는 1964년 가을에도 화제가 됐다.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 중인 그가 부인을 통해 '내가 죽거든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에 안장해달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지금의 서울현충원이 당시에는 국군묘지로 불렸다. 1964년 11월 2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이승만 박사가 별세하면 국군묘지에 안장해달라'라는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하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지난 18일에 접수된 이 편지에서 '프 여사는 이 박사는 고령이고 미묘한 건강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병원 당국과 자기가 최선의 방법을 다해 간호했으나, 그의 건강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있어 그의 생명이 멀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몇 년 전에 이 박사 자신이 직접 국군묘지 중 선택했던 장소에 그의 유해를 묻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고 밝히고 '본인은 그가 늘 사랑하는 조국의 그가 선택한 장소에 묻힐 수 있도록 하신다면 최선의 절차를 다하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서울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부부의 무덤.
 서울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부부의 무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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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양자·재산·묘지와 관련해서는 개인적 희망을 드러낸 반면, 정치 복귀와 관련해서는 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박근혜처럼 노골적으로 정치적 의지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이승만은 귀국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1997년 9월 9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박정희, 62년 이승만 귀국 요청, 김종필 총재 비화 공개'라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62년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의 특명을 받고 하와이에 가서 귀국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건강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화장 사람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사법처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망명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국민적 반발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었다. 박 정권이 비호한다 해도 국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신변보호를 철석같이 약속한 박 정권도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4·19 직후의 7·29 제5대 총선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이 민의원(하원) 233석 중 2석 밖에 얻지 못했다는 점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 복귀를 도울 만한 세력뿐 아니라 신변 안전을 보장할 세력도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도로 새누리당으로 복귀했다'는 평가까지 듣는 미래통합당이 있어 그나마 의지할 데가 있는 박근혜와는 처지가 달랐다.

거기다가 이승만은 망명 당시 85세였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박근혜를 훨씬 능가하는 권력의지를 가진 그가 박근혜처럼 대담한 정치적 메시지를 띄우지 못한 데는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언론의 관심을 끈 이승만의 편지는 박근혜 편지처럼 대담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줄 양자를 입적시키고 이화장에 있던 물건들을 원위치시키고 자기를 국군묘지에 묻어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승만의 편지들은 전직 대통령답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의 편지도 박근혜의 편지처럼 세상을 실망시킬 만한 것이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는 시를 쓴 저항시인 김수영은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 아침에 이런 시를 썼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중략)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중 일부.


이승만이 양자를 걱정하고 이화장 재산을 걱정하고 사후의 묘지를 걱정하는 편지들을 고국에 보냈을 때, 시인 김수영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김수영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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