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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 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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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독립신문』 발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돕는 직원이 주시경을 비롯하여 몇 사람 있었지만 모두 초보자들이었다. 그렇지만 주 3회에 걸쳐 꼬박꼬박 신문을 만들었다. 창간 당시에는 1부에 1전씩 하여 300부를 발행하다가 1898년 말경에는 3,000부까지 찍었다. 8개분국(지사)을 두었다. 인천ㆍ원산ㆍ부산ㆍ파주ㆍ개성ㆍ평양ㆍ수원ㆍ강화 등 주로 병자수호조약에서 개항지로 지정된 곳이었다. 서재필의 소회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인쇄술을 아는 이가 없었고 신문이란 '신'자도 모르는 터이라 경영이 여간 곤란치 않았다. 채자ㆍ조판부터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기자들에게도 재료 수집에 대한 모든 순서를 일일이 지도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신문 파는 사람에게는 "신문! 신문! 매장에 한 푼씩이요!" 이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외치라고 내 자신이 입으로 외치면서   가르쳐주기까지 하였다.(…)

신문에는 논설ㆍ광고ㆍ물가 시세ㆍ관보ㆍ외국통신ㆍ잡보 등이었는데, 물가 시세와 관보는 두 사람의 기자가 재료를 구해 왔고, 그 외에 논설이며 모든 것은 내가 혼자 원고를 썼으므로 잠시라도 쉴 틈이 없었다. (주석 10)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부터 1899년 12월 4일까지 3년 8개월간에 걸쳐 발행되었다. 서재필이 신문을 주관한 시기는 창간 때부터 1898년 5월에 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도미할 시기까지 2년여 동안이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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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이 구한말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을 한 연구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근대사회 형성에 필요한 지식과 사상을 소개하여 국민 대중이 자신의 권리의식을 깨우치게 하였다.

-. 열강의 침략간섭정책을 비판하고 폭로하여 자주독립과 국가이익의 수호를 위해 공헌하였다.

-.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권리를 되찾아 수호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행하여 민족의 언어와 문자,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 당시 지방에 성행하던 관리의 부정부패와 국민수탈을 비판ㆍ폭로하여 이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다.

-. 1896년 7월에 창립된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독립협회의 사상형성과 자주민권ㆍ자주자강운동에 큰 공헌을 하였다.

-. 민중에게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여 정치ㆍ사회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성립시켰으며, 광무 초기의 신문과 출판물의 발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세계의 정세를 알려주어 국제정세 변동 속의 우리 위치를 인식하게 했으며,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하여 한국인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 영문판인 『The Independent』를 통해,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의사와 주장을 세계 각국에 알렸다. (주석 11)


서재필은 당초 신문을 발행하면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정부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조정과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1896년 7월 2일 서재필을 고문으로 하여 독립협회가 창설되면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게되고, 정부의 실정과 대신들의 비위 등을 날카롭게 폭로비판하였다.

서재필의 일차적인 꿈은 조선의 자주독립에 있었다. 『독립신문』이 창간될 당시는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고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벌채권을 비롯하여 경원ㆍ종성의 채광권, 인천 월미도의 저탄소 설치권 등 갖가지 이권을 차지했다.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아관파천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모습으로, 2층 창가에 고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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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계기로 구미열강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ㆍ경의선 철도부설권을 비롯, 국가의 주요한 자원이 외국으로 속속 넘어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정부의 대신들과 유생들은 여전히 청국에 대한 사대속성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골수에 맺힌 숭고주의와 중화사상이었다. 다음은 청국과 관련, 그러나 사실은 조선의 식자들을 겨냥한 서재필의 논설이다.

청국 사람들이 몇 천 년을 생각하기를, 청국이 세계 중의 제일 개화한 나라요 제일 강하고 제일 부유하고 제일 큰 줄로 생각하야 몇 천 년 전의 모든 법률과 풍속과 정치를 오늘날까지 숭상하다가, 영국과 싸움하여 북경을 모두 불지르고 배상을 여러 천만 원을 물고 향항(香港)을 영국에 빼앗기고 그런 후에도 종시 구습을 고치지 않고 문명개화한 나라 사람들을 보면 오랑캐라 하고 귀족들은 외국에 가기도 싫어하고 새 학문 배우는 사람을 천히 여기고 그저 몇천 년 된 풍속으로 나라를 다스리는고로 나라가 점점 약하여져 백성이 도탄에 있고 국중(國中)에 완고당(頑固黨)이 점점 성하여 가더니,…또 작년에 일본과 다시 싸워…일본 정부에서 청국더러 배상 팔천팔백만 원을 바치고 대만을 일본으로 붙이면 싸움을 그치겠노라 한즉, 청국이 너무나 감지덕지하여 그렇게 약조하고 겨우 목숨을 도모하였으니……. (주석 12)

서재필은 이 논설에서 조선지식인들의 행태를 신랄히 비판한다.

조선 사람들이 이 본보기를 곁에다 놓고 보면서도 꿈을 아니 깨고 세계에서 제일 천대받고 세계에서 제일 약한 청국을 본받으려 하니, 이런 조선 사람들은 관민간에 다 원수요 나라를 망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륜선(河輪船)에 모두 실어 청국에다 갖다 버릴 것 같으면 친구들을 많이 만날 터이요 조선에서는 큰 경사다. (주석 13)


주석
10> 『서재필 자서전』, 245~246쪽.
11> 김승태, 앞의 책, 76~78쪽.
12> 『독립신문』, 논설, 1896년 8월 4일치.
13>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 #한글, #독립신문,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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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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