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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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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비롯 4쪽짜리 초라한 지면이었으나 그 의미와 반향은 적지않았다. 여기에 실린 '창간사'는 일개 신문의 고고지성을 뛰어넘어 조선사회에 큰 울림으로 메아리쳤다.
 
창간 자금이 전액 정부에서 나오고 사옥이 정부건물이며 사장 겸 주필이 정부의 급여를 받은 처지이기에 순수민간신문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정부가 논조나 편집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한국언론사에서는 첫 민간신문으로 자리매김되고, 지금까지 이 날(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한다.
 
서재필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신문을 창간하면서 제호를 『독닙신문』으로 썼다가 제12호부터 『독립신문』으로 바꾸었다. '독닙'은 한글 발음대로 표기했다가 보다 의미가 적확한 '독립'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제호에는 서재필의 '독립정신'이 배어 있다.
 
독립신문
▲ 서재필 독립신문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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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이 그의 신문의 제호를 『독립신문』이라고 정한 것은 갑신정변의 고배를 마시고 10년 여 망명생활에서 돌아온 그의 절규였다고 할 수 있다.

서재필이 '독립'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대원군을 나포해 간 이홍장(李鴻章)과 원세개(袁世凱)에 대한 김옥균의 분노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독립에 대한 논설들은 젊은 서재필로 하여금 사대주의와 사대사상에 반발하게끔 하였었거니와 위에서 본 대로 10년이 넘는 미국에서의 생활은 더욱 독립을 지향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박영효로부터 조선의 상황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귀국했던 서재필은 서울에 도착한 후에 각종의 경험을 거듭하면서 더욱더 독립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주석 8)


서재필과 개화파 인물들은 "당면한 조선의 사정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하여서는 완고한 관리나 왕에게 진언하는 것보다 일반 서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주지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며 민지계발과 자력자강을 위한 첩경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석 9)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순한글과 영어로 찍어낸 독립신문, 중국으로 벗어나려는 의식이 보인다. 그러나 서구에 대한 독립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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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창간호는 1면은 논설, 관보와 외국통신 및 잡보, 3면은 잡보와 선박 출발표, 광고 등을 싣고 4면은 〈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라는 제목 아래 영문판으로 편집했다. 1면에 실린 '논설'은 사실상 창간사이다. 이 신문은 창간목적을 민주사상의 배양, 관민계발, 자주독립에 두었다.
 
서재필은 이 글에서 "조선만을 위하여 불편부당하고 차별없는 공정한 보도"를 다짐하였다. 창간호 논설을 싣는다.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 아니하고, 모두 조선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며, 공평하게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백성만이 위할 게 아니라 조선 전국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오,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터이며,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임.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것이 아닌 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귀절을 떼어 쓴 것은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 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 고로 정부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한 일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임.

  
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 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1898년 3월 22일자 <독립신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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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창간호는 『독립신문』을 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떼어 쓴즉 아무라도 이 신문을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보게 함이다.
 
각국에서는 사람들이 남녀 물론하고 본국 국문을 먼저 배워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배우는 법인데, 조선에서는 조선 국문은 아니 배우더라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무니라. 조선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조선국문이 한문보다 얼마가 나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첫째는 배우기가 쉬운 글이요, 둘째는 이 글이 조선글이니 조선인민들이 알아서 백사를 한문 대신 국문으로 써야 상하귀천이 모두 보고 알아보기가 쉬울 터이라.
 
한문만 늘 써 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 쓴 글은 조선인민이 도리어 잘 알아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치 아니리요. 또 국문을 알아보기가 어려운 건, 다름이 아니라,
 
첫째는 말마디를 떼지 아니하고 그저 줄줄 내려쓰는 까닭에 글자가 위에 붙었는지 아래에 붙었는지 몰라서 몇 번 읽어 본 후에야 글자가 어디에 붙었는지 비로소 알고 읽으니 국문으로 쓴 편지 한 장을 보자면 한문으로 쓴 것보다 더디 보고 또 그나마 국문을 자주 아니 쓰는 고로 서툴러서 잘못 봄이라.
 
그런 고로 정부에서 내리는 명령과 국가 문적을 한문으로만 쓴즉 한문 못하는 인민은 남의 말만 듣고 무슨 명령인 줄 알고, 이편이 친히 그 글을 못 보니 그 사람은 무단히 병신이 됨이라. 한문 못한다고 그 사람이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국문만 잘하고 다른 물정과 학문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한문만 하고 다른 물정과 학문이 없는 사람보다 유식하고 높은 사람이 되는 법이라.
 
조선부인네도 국문을 잘하고 각색 물정과 학문을 배워 소견이 높고 행실이 정직하면 물론 빈부귀천 간에 그 부인이 한문을 잘하고도 다른 것 모르는 귀족남자보다 높은 사람이 되는 법이라. 우리 신문은 빈부귀천을 다름없이 이 신문을 보고 외국물정과 내지 사정을 알게 하려는 뜻이니, 남녀노소 상하귀천 간에 우리 신문을 하루 걸러 몇 달간 보면 새 지각과 새 학문이 생길 걸 미리 아노라.



주석
8> 이정식,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 184쪽.
9> 이해창, 『개정증보판 한국신문사 연구』, 31쪽, 성문각, 198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 # 한글, #독립신문, #한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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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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