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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1876-1914)
 주시경(1876-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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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언제부터 한글에 그토록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졌을까.

그의 성장기는 앞서 소개한 대로 수구와 개화세력이 대립하고 충돌할 때이다. 수구 측은 여전히 중국과 한자를 숭상하고, 개화 측의 일부는 영어와 일어에 관심을 보였다. 고종이 칙령으로서 모든 법률을 한글로 쓰도록 했으나, 일반 민중이 이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청년 주시경은 얼마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는 다양한 기량과 재능을 갖고 있었다. 관립 인천 이운학교(利運學校)에 다닐 때 항해술, 수진동 흥화학교에서 측량기술을 배웠으며, 배재학당에서는 영국 사람으로부터 영어와 의학을 배웠다.

"당시 일반인은 새 교육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새 학문을 교육하는 학교를 좀 이해한다 하는 사람이라도 과거 준비의 새 방식이라 생각하고 졸업은 곧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학교에 다니다가도 벼슬자리만 얻으면 학교는 그만 퇴학하고 마는 것이었다." (주석 4)

 
이런 시기에 주시경은 왜 출세의 길과 시대조류와는 다른 길을 걸었을까, 그리고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열 일곱 살(고종 29, 서기 1892년) 되던 때였다. 서당에서 이 진사에게 한문을 배울 때 이 진사가 한문의 뜻을 해석하려면 반드시 우리말로 번역함을 보고 선생은 속으로 "글은 말을 적으면 그만이다."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한글 연구에 일생을 바치게 한 동기였다. 말을 적는 방법 곧 부호(符號)가 한문같이 거북하고 어려워서야 어느 겨를에 학문을 얻어 가질 수 있겠느냐?
 
만일 한글로 우리말을 적는다면(한문으로 적지 말고) 사반공배(事半功培)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말과 글을 더 닦고 갈지 않으면 안 될 상태다. 이리하여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선생이 새 교육에 뜻을 두고 배재학당에 들어감도 이 때문이었다. (주석 5)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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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한글운동에 관심을 갖고 직접 나서기로 한 데는 선학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화파 계열의 개혁가 박영효ㆍ유길준ㆍ윤치호ㆍ서재필이 그들이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는 망명지에서 고종에게 보낸 개혁에 대한 상소문에서, 8개조항의 개혁안과 14개 조항의 교육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종래 가르치던 청나라 역사ㆍ문장 대신에 우리나라의 국어ㆍ국문을 가르칠 것을 제안하였다.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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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1883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주한미국공사 LㆍH 푸트의 통역관으로 있을 때 겪었던 한글의 필요성을 이렇게 적었다.
 
공사관 통역으로 있었지만 나이어린 내가 무슨 정치야 알겠소만, (…) 그때 나는 조선국문, 즉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만은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또한 언문을 보급하여야 조선사람이 속히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하였다. 미국 공사도 내 말을 옳게 생각하였소. 실상 그때 내가 언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는 것은, 영문을 번역하는 데는 난잡한 한문을 쓰는 것 보다는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였으니까요. (주석 6)
 
1856년 10월 서울 북촌에서 태어난 유길준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신학문에 매진했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박영효와 함께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발간 작업을 주도했다. <서유견문> 통해 ‘서적고’라는 이름으로 도서관을 처음 소개해서 ‘도서관 인물’로도 조명받고 있다.
▲ 유길준 1856년 10월 서울 북촌에서 태어난 유길준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신학문에 매진했다.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박영효와 함께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 발간 작업을 주도했다. <서유견문> 통해 ‘서적고’라는 이름으로 도서관을 처음 소개해서 ‘도서관 인물’로도 조명받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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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한 유길준은 유학 중 유럽 여러 나라를 둘러보며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서유견문』을 1895년 서울에서 간행하였다. 책의 서문에서 언문일치를 주장하면서, 한글을 전용하지 못함이 애석하다는 뜻을 담았다. 유길준은 비록 '한글전용'을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언문일치'를 주창함으로써 이후 신문과 잡지가 비로소 국한문 혼용체를 많이 쓰게 되었다.
 
 조선후기 정치가 유길준(1856~1914)이 저술한 국한문 혼용체의 서양기행문이다. 1895년(고종 32년) 도쿄교순사에서 간행했다. 서양 각국의 지리, 역사, 정치, 교육, 법률, 행정, 경제, 사회, 군사, 풍속, 기술, 학문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들어 있다.
▲ 서유견문  조선후기 정치가 유길준(1856~1914)이 저술한 국한문 혼용체의 서양기행문이다. 1895년(고종 32년) 도쿄교순사에서 간행했다. 서양 각국의 지리, 역사, 정치, 교육, 법률, 행정, 경제, 사회, 군사, 풍속, 기술, 학문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는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들어 있다.
ⓒ 김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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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이전에 이미 한글의식이 확고해진 유길준과 박영효는 갑오경장에서 개혁의 주도자로 등장하여, 공문서에 한글과 한자를 섞어쓰기에 관한 규정, 한글쓰기에 관한 조치 등을 공포하였다. 실제로 두사람에 의해서 거의 모든 「관보」는 국한문으로 쓰여졌고 '독립서고문'이 순한글로도 쓰여지는 등 한글에 대한 커다란 개혁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졌다.
 
유길준과 박영효의 한글의식을 계승하여 갑오경장 직후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한글 전용 이라는 역사적인 개혁을 일으키고 국문보급에 빛나는 장을 마련했다. 이러한 결실을 맺게 한 실질적인 실천가는 서재필이었지만, 서재필의 주도적인 역할 뒤에는 유길준ㆍ박영효ㆍ윤치호 등의 공헌이 있었다. (주석 7)


이들 선각자들이 500년 묵은 한자의 '문전옥답'에 한글의 씨앗을 뿌렸다면,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주시경이 참여하면서 '순한글신문'이라는 묘목이 자라도록 키우고 잡초를 제거하는 텃밭을 일구는 역할을 하였다.


주석
4> 김윤경, 『인물한국사(Ⅴ)』, 333쪽.
5> 김윤경, 「주시경 선생 전기」, 『나라사랑』, 207쪽.
6> 김을한, 『좌옹 윤치호전』,  321~322쪽, 을유문고, 1978.
7> 김인선, 「갑오경장(1894~1896) 전후 개화파의  한글사용」, 『주시경학보』 제8집, 29쪽, 주시경연구소, 1991, 탑 출판사.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독립신문, #서유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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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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