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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편집자말]
육아는 분명 노동인데 아버지는 한빛과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한빛과 외할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육아는 분명 노동인데 아버지는 한빛과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한빛과 외할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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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한빛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는 걸까? 아마도 아버지가 한빛을 키우셨기 때문인 것 같다. 한빛이 태어날 때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하셨다. 70세의 나이에 뚱뚱하고 당뇨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기꺼이 한빛을 키워주셨다.

육아는 분명 노동인데 아버지는 한빛과 즐거운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한빛과 외할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어린아이가 함께 무언가를 하는 모습은 정감 가는 교과서 삽화 같았다.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울컥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셨던 것 같다.
      
아이를 사랑했던 나의 아버지
  
30대 초반,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우연히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보았다. 책이 발간된 지 한참 되었는데 모르고 있었기에 가슴이 뛰었다. 교육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교사들끼리 서로 위로하며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책이었다. '어느 노교장의 정년퇴직'이란 제목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포천초등학교 김종만 선생님께서 쓰신 글이었다.
'포천군 산호국민학교란 곳에 계시던 어느 노교장 선생님이 올 8월에 정년퇴직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이 허전하였다.

학교에 안 나오는 아이가 있으면 과자 봉지를 사 들고 험한 산골짜기를 찾아가 마루에 앉혀 놓고 가르치시는 분이란다. 교사들이 할 잡무를 도맡아 하고 심지어는 청부의 일까지도 하신다고 한다. (물품을 사 들고 힘겹게 출근하는 모습을 가끔 뵌 적도 있다). 절대 교사의 일에 참견하거나 무시하거나 의욕을 꺾는 짓 따위는 안 하시고, 교장실을 개방하고 학습 부진아에겐 사탕을 줘 가며 가르치시고 남 시키는 일이 별로 없는 분이란다.

장학지도가 있으면 교육청에 전화해서 장학사들이나 장학관들에게 도시락 지참을 부탁하고 청탁금 같은 부조리한 돈은 절대로 주지 않는 강직성을 지니셨다 한다. 때로는 교육청 관리과에 가서 직원들 앞에 화를 내기도 하는데 그것은 교육 재정을 비교육적인 일에 낭비하는 데 대한 힐문이라고.

교육행정 하는 사람들도 모두 싫어하고 심지어는 동료 교장들까지 손가락질하는 판에 유독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가난하고 헐벗은 시골 아이들이고 가난한 마을의 학부형들이고 또한 그 학교 교사들이라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학교 시설이 달라지고 교육 기풍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가끔 그분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페스탈로치를 책에서 찾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눈앞에 부족한 한 인간이 봉사의 일생을 살고 있음을 보는 것은 얼마나 희열을 갖게 하는가. 그러나 슬프다. 누가 그 고통스러운 수고를 참으로 기릴 것인가.

우리 시대에 영웅이 없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소박하고 구수한 흙내 나는 사람들에서 스러져가는 백발의 영광을 보는 것은 용솟음치는 샘물의 잔잔한 감격이 된다. - 1983. 7. 14 김종만
 
내가 국민학생 때 우리 집에는 항상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밥도 같이 먹고 이불 속에서 잠도 함께 잤다. 1960년대 후반에는 밥을 굶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조손가정을 찾아갔는데 할머니가 누워계시거나 엄마가 집을 나간 아이들이 있으면 아버지는 데리고 오셨다. 우리 집이 부자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는 매번 밥을 차렸고 어린 나는 매일 바뀌는 수저 개수를 세면서 상차림을 도왔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아버지가 축구부를 담당할 당시 선수들이 다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잤다고 한다. 퇴임 후 50대 아저씨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감동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교사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산호국민학교 교장이실 때 아버지는 사비로 아동용 자전거를 여섯 대나 사셨다. 지금 생각하니 학년별로 한 대씩 사셨나 보다. 그때 엄마와 싸움이 있었지만 항상 그랬듯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느 주말 산호국민학교에 가니 텅 빈 운동장에 대여섯 명의 어린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리 지르며 알록달록 작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 아이들 웃음소리 위로 긴 저녁 해가 따라다녔다. 아름다운 그림이었지만 씁쓸했다. 오빠의 대학등록금을 언니들이 대주는 집안 형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향한 엄마의 욕심, 아들에게 보인 엄마의 미안함 
 
 
고 이한빛 PD
 고 이한빛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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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3월이면 우리에게 청소 당번을 정할 때 화장실 청소는 다 꺼리니 스스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싫었지만 옳은 말이니 억지로 손을 들어 자청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한빛에게 시키고 있었다.

나는 한빛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한빛은 반문하지 않았다. '네가 싫어하는 일은 다른 애들도 다 싫어해. 싫은 일이라고 다 피하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되겠니' 하는 엄마의 강요나 구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싫었으면서 왜 어린 한빛에게 완벽하라고 재촉한 걸까? 아마도 나는 한빛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싫다고 했으면 나도 아차 했을 텐데 한빛은 착했다. 중학교 1학 년때 한빛은 화장실 청소를 자청했다. 중1 남자아이들의 화장실 청소는 뻔했다. 물장난하듯 화장실 바닥을 청소하다 보니 교복바지는 항상 화장실 물로 흠뻑 젖어있고 양말은 추적추적 물에 빠져 고린내가 났다. 그저 불평 없이 신나게 하길래 다행이다 하며 받아들였다.

1월이면 생각난다. 중학교는 방학인데 유치원 개학이 빨라 모처럼 엄마 노릇 하고 싶었다. 한빛을 유치원 버스에 태우는 일이었다. 매일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었다. 엄동설한에 버스 시간보다 훨씬 일찍 나가서 낚시 의자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는 우리 아파트 엄마들의 화젯거리였다. "할아버지, 제 아이 좀 부탁해요. 제가 일이 생겨서"하는 부탁도 많이 받으셨다. 아버지는 꼼짝도 안 하시고 뛰노는 아이들에게 집중하셨다. 2년 동안 한결같이 한빛을 지켜주셨다.

'그 정도야 나도 할 수 있지. 엄마인데' 하면서 버스를 기다렸다. 발이 시리더니 온몸이 얼어오기 시작했다. 버스가 늦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인내심도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난 역시 안 돼. 으이구, 너도 엄마니?' 하며 아파트로 뛰어 들어갔다.
진심으로 아버지께 죄송하고 한빛에게 미안했다. 다른 걸 잘해서 상쇄해야지 했다. 최소한 그때 아버지보다 15년은 더 젊은 지금, 나는 나의 행동을 수정할 의지가 있다. 하지만 아버지도 안 계시고 한빛도 없다.

나는 아들 한빛에게 외할아버지의 10분의 1도 따뜻하지 못했다. 한빛아,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하니?

[기획 / 나의 아버지, 나의 아들]
①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한 손자,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http://omn.kr/1luli
② 아버지, 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요? http://omn.kr/1mrqw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한빛미디어, #인권센터, #외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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