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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한글회관 앞의 주시경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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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자라던 한말은 국가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태어나던 해에는 흉작으로 정부에서 비축해 두었던 쌀을 풀고 전국에 방곡령을 내렸다. 적지않은 양곡이 공공연히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었다. 국내에서 식량이 부족하자 곳곳에서 명화적(明火賊)이라는 도적떼가 나타났다. 횃불을 들고 민가를 습격하기 때문에 화적(火賊)이라고도 불리는 이 불한당 무리는 30~40명씩 떼를 지어 횡행했다.

세 살 때인 1879년에는 일본에서 전파된 콜레라가 전국으로 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하고, 지석영(池錫永)이 처음으로 종두법을 실시하였다. 조정에서는 1881년 4월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한 변화를 하고 있는 일본을 시찰케 하였다. 이때의 신사유람단은 뒷날 대부분 친일파가 되었다.

주시경이 아직 어렸을 때이지만, 국가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1882년 6월의 임오병란과 7월의 제물포 조약이다. 임오병란은 도시 하층민 출신의 고용군인으로 구성된 병사들의 급료는 한 달에 쌀 4말 정도로 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분량이었다. 군인들은 재정 악화로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다. 또 개항 이후 물가가 크게 올라 하층민의 생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4년간 중국 톈진과 바오딩 등지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 흥선대원군과 위안스카이 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4년간 중국 톈진과 바오딩 등지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 인터넷 百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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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제개혁으로 많은 군인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일본인 교관이 지휘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만 우대하여 군인들의 불만이 쌓였다. 불만을 달래기 위해 정부는 밀린 급료 중 한 달 치를 지급했는데, 그 양이 모자랐을 뿐 아니라 쌀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있었다. 마침내 군인들이 봉기하였다. 군인들은 민씨 일파와 개화파 관료들을 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호리모트 레이조 등을 처단했다.

군인들은 창덕궁으로 몰려가 이최응ㆍ민겸호 등 대신들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찾았으나, 궁녀로 변장하고 도망쳤다. 사태를 수습하던 대원군은 별기군의 폐지와 군인들의 급료지급을 약속했다.

한편 민씨 일파는 청국에 군대파견을 요청했고 4천여 명의 청군이 들어와 대원군을 반란 배후로 몰아 청국으로 납치하고, 대원군 세력을 제거하였다. 청군을 빌려 봉기를 진압한 민씨 정권은 이후 더욱 자주성을 잃게 되었다. 임오병란 때 본국으로 도망쳤던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소모토는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배상금과 군대주둔권을 요구하고, 결국 강압적인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란상황이 적힌 임오유월일기
▲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란상황이 적힌 임오유월일기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란상황이 적힌 임오유월일기
ⓒ 대전광역시 향토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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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정부는 손해배상금으로 50만 원을 지급하고, 부산ㆍ원산ㆍ인천을 비롯한 개항장의 일본인 상업활동 범위를 사방 50리로 확대한데 이어 일본외교관의 조선 내륙 여행을 허락했다. 이후 일본공사관 보호를 이유로 일본군이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으며, 일본인의 국내 여행과 일본의 경제침투가 가속화되었다.

주시경의 어린 시절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이 처하고 있던 시대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시경이 일곱 살이던 1883년이다.

고종 20년 3월 15일, 한문 서당에서 글공부를 마치고 동무들과 함께 밖에서 놀다가 남쪽에 솟은 덜렁봉(蜂)이란 산에 하늘이 맞닿아 내려져 있음을 보고 하늘은 어떠한 것일까 하고 만져 보려 마을 아이들과 함께 산봉우리를 오르다. 산 중턱에서 다른 아이들은 꽃을 따기에 정신이 팔려 하늘 만져 볼 생각을 잊어버렸으나, 다만 주 소년은 산의 험하고 가파로움을 무릅쓰고 산꼭대기에 올라 하늘이 더없이 넓고 높은 것임을 보고 우주의 광활함을 비로소 깨닫다.

의심나는 사물에 대한 연구의 열성과 과학스런 지식에의 욕망, 그리고 중도에서 그치지 않는 꾸준함이 주 소년의 어린 시절에 이미 확고하게 틀잡혀 있음이 나타나다.(주석 4)

주시경의 약전(約傳)인 「주시경 선생 전기」는 한글학자인 김윤경이 1959년에 집필한 것으로 최초의 전기에 속한다. 이에 따르면 주시경이 13살(고종 23, 서기 1883) 되던 봄에 서울에서 처가(안동 권씨 댁) 살이하던 큰아버지 되는 학만(鶴萬)씨가 시골 댁에 와서 형제분이 의논한 결과 선생(주시경 - 필자)을 양자로 정하여 서울로 데리고 올라오게 되었다." (주석 5)고 한다.

  
부산에 이어 1883년 외세에 의해 개항한 제물포항(현 인천항).
 부산에 이어 1883년 외세에 의해 개항한 제물포항(현 인천항).
ⓒ 인천개항누리길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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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에서 해륙물산 위탁 판매업을 하던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13살 짜리 시골소년이 생소한 서울에서 살게되었다. 큰아버지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으나 유행하던 괴질로 다 잃고 주시경을 양자로 삼은 것이다.

선생의 큰아버지, 곧 양부는 처가에서 한 해 반이나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고만 지내다가 남문 시장에서 해륙물산 객주(海陸物産客主) 업을 시작하여 셈평이 펴게 되던 중에 자녀를 다 잃고 실망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선생을 양자로 데리러 온 것이므로, 그리 화평한 가정은 되지 못하였다.

선생이 다니는 글방(書堂)도 장사하는 사람들과 중인(중인=平民) 자제들 뿐이었으므로, 선생은 더 훌륭한 선생에게 배우기를 원하였다.그런데 선생이 다니던 글방에 가는 도중에는 이회종(李會鐘)이란 진사(進士)가 자질(子姪) 몇 명을 데리고 가르치는 글방이 있었다. (주석 6)


주석
4> 『나라사랑』, 16~17쪽.
5> 김윤경, 앞의 책, 202쪽.
6> 앞의 책, 20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제물포조약, #임오병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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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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