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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페인트로 단장하기로 했다. 벽지를 가는 것보다는 돈과 수고가 더 들지만 페인트로 하는 이유는 훨씬 매력적인 분위기가 되리란 판단에서였다. 회사 근처 페인트 전문점을 찾아 5L짜리 페인트를 구입해 벽지에 칠했다. 광고에서 본 것과는 조금 다른 색이었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방 하나가 남은 상태에서 페인트가 모두 동이 났다. 적어놓은 품번를 들고 집 근처 페인트 가게를 찾아 1L를 구입해 다시 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색이 달랐다. 같은 벽면에 칠해 비교해보니 차이가 두드러졌다.
 
이름 있는 브랜드 제품이었기에 본사에 전화했다. 그러나 본사 관계자는 '판매처마다 페인트를 직접 조색해 팔고 있기에 다를 수 있다'고 답했다. 본사는 레시피만 제공할 뿐 개별 업체가 어떻게 만드는지 일일이 알 수 없다고도 했다.
 
페인트를 사기 전 인터넷을 통해 알아봤지만 홈페이지 어디서도 이와 관련된 주의사항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처리가 되느냐고 문의하자 '직접 산 곳에 찾아가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5L를 구입한 업체를 찾아가 사진을 보여주며 물었다. 본사와 마찬가지로 '조색기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핸드폰 사진은 색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니 우리 잘못인지 알 수 없다고도 했다. 업체 관계자는 "이런 항의가 처음이라며 보통은 한 곳에서 다 사지 다른 곳에서 사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업체에서 같은 품번의 제품을 사면 비슷한 색이 나올 거로 생각한 내가 잘못한 것일까? 나와 같은 피해자는 정말 없을까? 궁금했다.
 
'페인트는 한 업체에서' 상식일까?
  
팬톤페인트 색 일람표 N페인트 홈페이지에선 팬톤페인트의 다양한 색상을 강조하는 홍보물을 접할 수 있다. 다만 홈페이지 어디서도 대리점마다 색상이 상이하다는 주의 문구는 찾아볼 수 없다.
▲ 팬톤페인트 색 일람표 N페인트 홈페이지에선 팬톤페인트의 다양한 색상을 강조하는 홍보물을 접할 수 있다. 다만 홈페이지 어디서도 대리점마다 색상이 상이하다는 주의 문구는 찾아볼 수 없다.
ⓒ N페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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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독성 친환경 페인트가 일반화되며 실내공간을 페인트로 꾸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접하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손쉽게 매력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페인트 업체들이 '셀프 인테리어'에 적합한 제품을 내고 홍보하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N페인트는 지난 2011년 미국 색채전문기업 '팬톤'과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한국에 '팬톤 프리미엄 페인트' 제품을 독점 공급하고 있다. 고급스러운 색감과 친환경 이미지로 셀프 인테리어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다.
 
팬톤은 매년 '올해의 색'을 선정해 발표하는데, N페인트 역시 팬톤 올해의 색을 활용해 제품을 홍보한다. 2020년 올해의 색인 '클래식블루'은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팬톤페인트 색깔로 벌써 자리 잡았다.
 
기자는 지난 1월 클래식블루를 활용해 직접 집을 단장했다. 벽지를 가는 것보다 돈과 수고가 더 들지만 새해를 맞이해 매력적인 작업이 되리라 생각했다. 한 달이 꼬박 걸린 작업이 끝나자 집은 전과 다르게 화사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거슬리는 부분 하나가 남았다. 처음 한 대리점에서 구입한 클래식블루 제품이 모두 떨어져 집과 가까운 다른 대리점에서 같은 브랜드, 같은 품번인 제품을 구입해 사용했는데 색이 생각보다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벽지 한쪽에 나란히 바르자 맨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N페인트 "레시피를 준 것뿐"
 
팬톤페인트 팬톤페인트 우수매장인 논현동 칼라메이트 매장에서 구입한 페인트. 캔 위에 19-4052라는 제품 품번이 적혀 있다.
▲ 팬톤페인트 팬톤페인트 우수매장인 논현동 칼라메이트 매장에서 구입한 페인트. 캔 위에 19-4052라는 제품 품번이 적혀 있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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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인 N페인트에 전화해 문의하자 예상치 못한 설명이 돌아왔다. 페인트는 대리점별로 조색하는데 기계가 모두 달라 다른 색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사가 각 대리점이 어떻게 조색하고 있는지 상황을 알지 못해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사실상 '팬톤 올해의 색'이라며 광고하는 제품이 육안으로 볼 때도 차이가 나는데도 본사는 점검하지 않고 있었다.
 
일반 소비자가 문제를 제기하기도 쉽지 않다.

기자가 문제가 발생한 경우 처리하는 절차나 항의 창구가 있느냐고 묻자, N페인트 관계자는 "직접 대리점을 찾아 문의하라"고 했다. "일단 (페인트를 산 업체 중) 어느 하나가 많이 다르니 확인해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게 순서"라며 "저희는 (조색) 작업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맨눈으로 볼 때 광고된 색과 더 다르게 보인 페인트를 판매한 대리점을 찾아 문의하니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대리점 관계자는 "조색하는 기계가 다르니 색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며 "원래 페인트를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한 곳에서 사는 게 일반적이고 이런 경우도 처음 겪는다"라고 답했다.

물론 이 설명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셀프 페인팅을 적극 홍보하는 유명 브랜드에서 같은 품번의 제품이 크게 다른 색상이 나온다는 건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창구조차 마땅치 않다는 것 또한 문제로 여겨졌다. 본사와 대리점의 대응을 겪으며 스스로 이런 일로 문의하는 것 자체가 유난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대리점 "우리 색이 잘못된 건지 사진으론 확인 못 해"
 
팬톤페인트 N페인트 사이트에 등록된 팬톤페인트 취급 매장 두 곳에서 각각 구입한 같은 품번 클래식블루 제품을 함께 바른 모습. 같은 브랜드 같은 색상을 같은 방식으로 발랐지만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 팬톤페인트 N페인트 사이트에 등록된 팬톤페인트 취급 매장 두 곳에서 각각 구입한 같은 품번 클래식블루 제품을 함께 바른 모습. 같은 브랜드 같은 색상을 같은 방식으로 발랐지만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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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점 관계자에게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유명 브랜드 제품에다 같은 품번에 세부 설정까지 같은 제품인데, 너무 색상이 다르지 않냐'고 묻자 "사진상으론 색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으니 "컬러북(매장에 비치된 색상 안내자료)과 직접 대봐야 어느 제품이 많이 다르게 나온 건지 알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컬러북이 20만 원이 넘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사실상 개별 소비자가 이런 문제를 겪었을 때 항의하거나 조치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유명한 브랜드 같은 품번 제품이라도 원래 색이 다른 건 당연한 것이고 당연히 한 매장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이를 모른 소비자가 잘못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을 겪으며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유력 색채업체가 발표한 올해의 색을 표방한 페인트 색은 판매하는 대리점마다 다르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더라도 본사엔 책임이 없다. 본사는 레시피만 팔고 제조는 각 대리점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리점에 가도 방법은 없을 것이다. 각 대리점은 주어진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제품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실제 색을 왜곡하므로 직접 벽지를 떼어가거나 남은 페인트를 가져가지 않는 한 제대로 문제를 지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업자가 아닌 셀프 인테리어를 한 개별 소비자가 이 이상 문제제기를 하긴 쉽지 않을 게 분명하다.

남은 건 벽지에 발린 서로 다른 두 개의 올해의 색이다. 눈앞에 서로 다른 두 색이 발라진 벽을 보며 이 글을 쓴다. 정말 궁금하다. 이중 무엇이 진짜 팬톤페인트 클래식블루일까? 어쩌면 어느 쪽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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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 진행 / 인스타 @blly_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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