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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선생
▲ 주시경 선생 주시경 선생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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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국문의 과학적 개척자요 획기적 선구자로 우리 국민 모두가 추앙해 받드는 주시경 선생은, 오로지 위대한 국어학자이기 앞서 그는 실로 민족 국가의 현실과 장래를 깊이 걱정하는 일념으로 온갖 정성과 힘을 몸이 마르도록 겨레 위하는 길에 바친 참다운 애국자이었던 사실을, 우리 후진들에게 좀 더 깊이 인식하게 하고, 좀 더 성실히 그 유지를 받아 조국 부흥에 정진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주석 1)

주시경은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아버지 주학원(周鶴苑)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빈한 시골 선비였다고 한다.

부모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 인산면 차돌개였는데, 아버지는 청빈한 문필가로서 『구암집(龜岩集)』을 짓고 82살까지 장수하였다. 나중에 봉산군 무릉골로 이사하여 주시경을 비롯 6남매를 낳았다. 아버지는 32살, 어머니는 29살에 주시경을 낳고, 둘째 아들이었다.

"형제들이 연년생임과 집이 가난함과 젖이 넉넉하지 못함과 낳던 다음해에 큰 흉년이었던 때문에, 그 작은 양도 채우지 못하여 몇 번인가 기절한 일도 있었으며, 그 어머니와 누님이 도라지를 뜯어다가 죽을 쑤어서 어린 형제들의 나이 차례로 분배하였다고 한다." (주석 2)

주시경의 어릴적 이름은 주상호(周相鎬)였는데 나중에 시경(時經)이라 고치고 아호를 한힌샘(白泉)이라 지었다. 시경이란 때때로 경전을 읽는다는, 즉, 글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한힌샘은 결코 마르지 않는 깨끗한 샘물을 의미한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너무 어질어서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아 안순(安順)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황해도 봉산군은 동쪽으로 서흥군, 남동쪽으로 평산군, 남서쪽으로 재령군, 북쪽으로 황주군과 접해 있으며, 북서쪽으로는 재령강을 건너 안악군과 마주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만수가 봉산의 의병을 지휘하여 왜군의 임진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참전하고, 조선 후기의 인물로는 실학자로서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펴낸 김정호가 꼽힌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상하이 『독립신문』의 창간에 참여하고 대한의용단을 조직해 활약한 김석황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을 지냈으며 통의부와 정의부 등에서 항일전을 지휘한 강명규 등이 이 지역 인물이다.

주시경이 태어나고 자란 쌍산면은 군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멸악산맥의 주맥이 미쳐 남쪽에 국사봉, 북쪽에 장재산, 서쪽에 삼봉산이 솟아있고, 구릉 사이를 은파천이 흐르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경작지가 적고 밭농사가 중심이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강화도조약을 맺을 당시의 우리측 대표단과 일본측 대표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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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이 태어난 1876년은 우리 민족에는 재앙의 연대가 되었다.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2월 2일 조약이 체결되고 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으로도 불리면서,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동시에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1875년 강화도에서 의도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도발하고 조선의 수비병이 운요호에 포격을 했다는 트집을 잡고 조약을 강요했다. 구르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신으로 삼아 8척의 군함과 600여 명의 병력을 보내 조선에 무력으로 협상을 강요하고,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두 항구를 더 개항하고 우리나라 연해의 자유로운 측량을 허가해 주었다. 이로써 일본의 거점이 마련된 것이다.

한 사람의 생애는 그 시대상황을 넘어서기 어렵다. 아무리 필부초동이라도 그가 사는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주시경은 한말 국운이 기울고 내우외환이 겹치는 격동기에 황해도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강제 개항'의 불행한 시기에 산골마을에서 고고성을 울린 것이다.
  
광화문 <한글학회> 입구에 설치된 주시경 선생 흉상. 이곳부터 북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난 길이 '한글가온길'이다.
 광화문 <한글학회> 입구에 설치된 주시경 선생 흉상. 이곳부터 북쪽으로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까지 난 길이 "한글가온길"이다.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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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기에 인재가 많이 나타나듯이, 같은 해에 황해도 해주에서 백범 김구가 출생하였다. 김구와 주시경은 걷는 길이 달랐으나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김구는 동학에 들어가 소년접주가 되고 신민회 참가, 105인사건, 투옥, 해외망명, 임시정부 주석 등을 지내며 항일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에 참여한 이후 국내에서 한글과 국문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짧은 생애를 바쳤다. 독립협회 등에서 두 사람이 서로 만났을 지도 모른다.

주시경은 네 살 때부터 1년여 동안 마을 서당에 들어가 한학을 배웠다.

무릉골에 있는 동리 서당에 입학하여 한학을 배우다. 평소 주 소년이 놀며 혼자서 부르는 노래가 "어서 커라, 어서 커라, 할일이 있으니 어서 커라" 하고 중얼거리므로 마을사람들이 이것을 듣고 "도대체 네 할 일이 무엇이냐"하고 물었더니, "내 할 일이 많소이다" 하고 시침을 뚝 따고 대답하였다 한다.

어느 날, 집의 뜰에서 이웃 동무들과 어울려 수수깡집을 짓고 놀다가 싸움이 벌어져, 달려온 동리 어른들이 싸움을 말리고 야단을 치다가, 수수깡으로 절묘하게 지어놓은 집을 보고, 이 집을 지은 아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모두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릴 때, 주(周) 소년이 앞으로 나서서 자기가 지은 것을 밝히고 잘못을 빌었다.

어른들은 이 하찮은 일에서, 주(周) 소년의 뛰어나고 교묘한 손장난과 두려움없는 정직성을 깨닫고 나라의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예언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힘 자라는 대로 집안일을 돕고 살림을 정돈하고, 흉년이 들어 양식이 떨어지면 산나물, 풀뿌리를 캐는 일까지 했는데, 어떤 때는 배가 주리여 멀리 가지도 못하고 길가에 주저앉아 작은 풀마저 뜯어 그 허기짐을 채우기도 하다. (주석 3)


주석
1> 정인승, 「나라말ㆍ글ㆍ얼의 선구자」, 『나라사랑』제4권, 12쪽, 외솔회, 1971.
2> 김윤경, 「주시경 선생 전기」, 『나라사랑』앞의 책, 202쪽.
3> 「한힌샘 주시경선생 해적이」, 앞의 책,『나라 사랑』, 16쪽. 
 

덧붙이는 글 | 한글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 한힌샘_주시경, #한글, #주상호, #강화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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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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