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글을 쓴 김형수님은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으로 활동 중입니다.[편집자말]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동휠체어 장애인이 전동휠체어로 엘리베이터를 타려면 문이 닫히지 않도록 누군가 잡아줘야 한다.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 모습
ⓒ 이준수

관련사진보기


1995년 2월 생전 처음 홀로 집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해야 했을 때,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친척 하나 없이 고향 부산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생경했다. 수중에는 외할머니께서 들려주신 대학 입학금만 있었다. 개인 통장 하나 만든 경험이 없는 나였다. 20년 넘게 부모님께서 신발 끈을 묶어주는 삶을 살다가 기숙사에서 매일 혼자서 신발끈을 묶어야 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스산한 이슬비가 오는 새벽 서울역은 나를 잔뜩 주눅 들게 했는데, 대학교로 가기 위해 승차한 택시의 기사 아저씨가 큰 힘을 주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겁먹은 시골 청년으로 보였는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러시더니 대뜸, "젊은데 뭐가 걱정이냐? 여하튼 여기까지 왔으니 이미 용기가 많구만. 걱정일랑 접고 일단 저지르고 출발 해봐도 늦지 않아. 잘하겠구만." 이렇게 격려해 주셨다.

1995년은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분기점이었다. 혹독했던 재수 생활과 대학별 본고사를 치르고 서울로 유학 온 해이며, 내 인생 처음으로 물리적으로 독립생활을 시작하며 10년 넘게 꿈꿔온 공부를 마음껏 시작한 시기였다. 이렇게 1995년은 학교-집-병원으로 한정적이었던 내 삶의 궤적을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으로 바꾸어 놓았다. 동시에 불타는 청춘으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들을 하기 위해 내 육체적 고통과 장애의 차별과 타인의 시선에 직면하기를 결단했던 한 해였다. 그 시작에는 택시 운전사 스승이 계셨다.

20년 살면서 안쓰러워하고 쯧쯧 걱정하는 것은 많이 듣고 자랐지만, 그냥 보통 청년 대하듯 툭툭 등 떠밀려 격려해 준 이웃 사람은 그 아저씨가 생애 처음이었다. 내가 운전학원에 등록하던 첫 날에도 그때와 같은 막연한 두려움과 직면하고 일상의 차별로부터 도피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 택시기사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시동도 걸어보지 않고 운전을 포기하지 말라는 그 가르침. 장애를 핑계로 스스로 포기하고 회피함을 반성했다. 그 스승님도 내가 집을 떠났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다.

내 부모님은 다행히 장한 어버이상 또는 비장한 인간 승리를 요구하며 '장애'는 굴레이며 패배라고 외치는 교육에 사회화 되지 않았다. 나의 장애보다 내 이름을 먼저 불러준 사람들도 있었다. 넌 군대 가지 않아서 좋겠다고 펑펑 울면서 부러워 해준, 정말 용감하게 솔직했던 친구들도 종종 있었다.

내 애인이 가족과 친구들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를 스스럼없이 자신의 졸업식에, 가족 상견례에 초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법이나 금칙어가 아니다. 그 시선과 평가 자체를 없애거나 약화시키는 관계와 지지이다. 그 관계와 지지가 장애를 내 고통과 열등감이 아니라 내 자신의 여러 면의 신체적․물리적․정신적인 일부분으로, 자긍심이자 정체성으로 만들어 주었다.

장애는 중요한 정체성이 되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현실은 때때로 육체적 고통이었고 그 고통은 비장애인과 다르게 협소한 물리적 한계를 만든다. 목발로만 이동하는 것은 '철인삼종 경기'와 같은 것이었고 물리적인 움직임에 앞서 항상 나의 체력의 한계를 계산할 수밖에 없다. 대학 들어오기 전, 고향인 부산에서 20년 넘게 버스를 거의 타본 적이 없다. 버스 타는 것은 안전장치 없이 번지점프 하기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학 입학 이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현실을 만났고 완벽하게 혼자서 버스를 타는 데 2년이 걸렸다.

정거장에서 정확하게 버스의 착지점을 알아내거나,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욕먹지 않고 쫓아가 세우기까지 1년, 넘어지지 않고 버스카드를 긋고 내리기 쉬운 자리를 확보하는 데 6개월 그리고 안전하게 내리는 데 6개월, 합이 2년이다. 자립과 독립은 어쩔 수 없는 부모로부터의 물리적 분리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물리적 분리를 안전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인 반복 연습과 훈련을 통해 생활로 정착되어야 한다.

"내 앞에 길은 없다. 길은 내 뒤에 생긴다."

2003년 즈음,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중심으로 전동휠체어 보급 사업이 진행될 무렵 나에게도 바퀴가 3개 달린 빨간색 국산 전동 스쿠터가 생겼다. 보행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체력에 한계가 있는 지체 장애인이 주로 쓰는 모델이었다. 아슬아슬하고 부실하게나마 벋정거리는 몸을 목발로 지탱하고 걸음으로써 헤쳐 나가던 길과 소리없이 사람들 어깨사이를 비집고 추월하는 평균 10km의 스쿠터 운전 추월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 새로운 이동이 공간의 경험과 관계의 경험을 만든다.

전동 스쿠터를 처음 사용할 때, 인도(人道)로 다니려니 그 요철로 인한 요동 때문에 온 몸이 부서질 지경이요, 보행로의 폭이 너무 좁아 지나가던 사람을 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나은 차도로 가자니 도로의 무법자 버스들 사이에 끼여 보험료도 못 받고 도로에서 비명횡사할 것 같고, 택시기사 아저씨들에게는 뭘 그리 오래 살 운명을 타고 났는지 욕이란 욕은 다 얻어 먹으면서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도로를 역주행 하는 행각까지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전동 스쿠터를 참 열심히 탔다. 억척스레 탔다. 도로턱에서 떨어지면서도, 도로 갓길에서 택배 오토바이와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해도, 비록 스쿠터를 타던 첫날 지하철 리프트가 중간에 멈춰 대롱대롱 매달리는 아찔한 조난의 경험도 있었다. 그래도 난 스쿠터 타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의 전동 스쿠터는 나에게 늦가을 야심한 밤에 골목길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어린 후배를 집 앞까지 배웅도 하고 과일도 직접 한 아름씩 사다가 녀석들 품에 안겨 주는 기쁨도 누리게 해주었고 옆사람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걷는 속도를 맞추는 배려를 베풀게도 했다. 그리고 11월 말 서울 인사동 언저리 은행나무 낙엽비를 맞으며 혼자서 사색할 수 있는 기쁨도 깨닫게 했다. 부모님 대신 잽싸게 시장을 볼 수 있어 막내아들로서 효도도 할 수 있게 했고, 가까운 거리에 소식을 전하거나 무거운 쌀가마니를 옮기는 파발마 노릇도 톡톡히 했다.

사랑하는 조카도 목마대신 태워주는 능력 있는 삼촌이었고, 비록 친구들과 연인과 함께 굴러가면 수없이 날아오는 시선의 고통과 권력을 느껴야 했지만,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 그 자체였다.

두려운 건 독립이 아니라, 혼자서 '차별'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환희도, 불러도 대답 없는 장애인콜택시와 부실한 저상버스, 그나마 광역버스는 아예 접근도 못하는 현실 앞에 나의 독립은 장보기에 머물러야 했다. 또한 전동 스쿠터는 나를 산책하는 동네 주민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휴가를 즐기는 여행자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처음 운전학원에서 연습용 차량을 탔을 때의 강사님의 그 걱정스러움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의 눈빛을 난 기억한다. 강사님은 "기어 움직여 보라", "핸들 돌려보라", "페달 밟아 봐라"하며 운전연습 차량으로 의사선생님이 왕진 진찰을 나온 것마냥 질문을 하셨다. 그리고 그 질문과 의심은 기능시험을 합격하고도, 도로주행에 합격하고 운전면허증을 받아 다시 시내 연수를 받을 때까지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합격한 나를 서로 신기해 했다.

1980년대 미국과 한국에서 큰 인기를 모은 '전격Z작전(원제:나이트 라이더 Knight Rider)'이란 미국 외화가 있었다. 키트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스스로 운전하고 대화도 할 수 있는 유머러스한 인공지능 자동차이다. 우리 사회와 국가에서 중증장애인이 운전할 때 가지는 의심과 걱정, 두려움의 가장 큰 근거가 '운전하기에 충분한 운동 능력과 정보 감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라는데, 키트처럼 알아서 운전하는 자동차가 실제 등장하면, 장애인 운전의 논쟁과 편견은 사라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러한 편견과 공포를 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 제거하려고 도전해야 한다.

장애인 당사자들도 무턱대고 자신의 신체 능력에 대한 고민 없이 운전하려고 덤비지 않는다. 나도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하고 친구들을 수소문해서 차량을 빌렸다. 몇 시간이고 핸들도 돌려보고 브레이크 페달과 액셀 페달도 밟아보며, 혼자서 안전벨트는 맬 수 있는지, 기어와 열쇠는 오른손으로 조작 가능한지 공터에서 하루 종일 연습에 연습을 반복했었다.

심지어 운전면허를 발급받고 나서는 구매하려는 차가 내 몸에 잘 맞는지 전시 차량을 찾아 시승도 해보고, 같은 모델의 차량을 렌트해서 여러 가지 실험과 연습도 반복했다. 장애인 당사자가 경험과 도전을 통해 실패와 성공 모두의 인생 자료를 모아야 한다.

타인의 관심과 도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독립적인' 휴가를 위하여

나의 독립된 휴가는 공식적으로 차를 소유하고 스스로 운전하기 시작할 때 시작되었다. 2008년 운전면허를 얻고 2011년 48시간의 제주도 해변도로 일주 여행을 시작하여 2012년 국도로 경주가기로 여름휴가를 보냈다. 그리고 2013년은 한적하고 고즈넉한 백제의 사비, 충남 부여를 고속도로로 주파하였다.

이렇게 하루 반경 500km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얻어서 혼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니, 타인의 관심과 도움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독립적인 존재가 되니 혼자서 휴식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내 생애 첫차를 사야 할 때 게시판 글 하나에도 신경 잔뜩 쓰는 장애인으로서 다양성을 지닌 소비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구매한 차에는 장애인 운전을 위한 보조 기구는 하나도 달지 않았다. 내가 차량에 오를 때마다 신기하게 오랫동안 관찰하며 나중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이것저것 물어봤던 사무실 건물의 사람들, 주차 때문에 연락받고 뛰어나가면 한참 동안 불안함에 떨고 있는 상대방 운전자들에게 멋지게 운전해서 일종의 시위를 하기 위한 것이다. 스스로 편견에 도전했다. 나 같은 운전자를 사람들이 직접 보고 경험해 보길 기대하면서.

그렇게 나는 대학 과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어 피가 나도록 목발을 짚으며 넓은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그로부터 15년 뒤 2010년 6월 17일, 나는 하루 반경 400km 이동이 가능한 자가 운전자가 되었다.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이동권만을 제공 받던 인간에서 능동적이며 생산적인 이동권을 창출하는 인간이 되었다.

두려움과 망설임 없는 자립과 독립은 없다. 그 공포와 망설임보다 더 강한 자기 이유와 논리를 찾고 작은 경험들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홀로, 가치를 내가 정하는 조건과 경험이 필요하다. 자립과 독립하려는 나를 남들이 규정하고 정의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자립했고 독립했구나라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실천하는 것 자체가 자립이자 독립이다. 자립과 독립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의도하지 않은 관심과 시선을 즐기고 오롯이 자신의 경험에 집중하다 보면 날마다 독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해당 글은 인권연대 웹진 <목에가시>에도 실립니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