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5 18:13최종 업데이트 20.03.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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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년 전 사건을 지금 되돌아본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2000년 6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 경향신문


2000년 6월 한 언론에 자신을 '토종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던 한 여성 연예인은 3년 후 '커밍아웃'을 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그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왔던 사실을 공개 사과했다. 바로 방송인 이유진이다. '커밍아웃'이라고 하니 아마도 몇몇 사람들은 성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혼혈'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2020년 현재, 그 게 왜 사과할 일이고 기자회견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만큼 한국 사회는 그때로부터 커다란 변화의 과정을 겪어 왔다. 학교 교과서에서 '단일민족'이라는 순혈주의가 삭제되고, 다문화 사회를 살아가는 세계시민으로의 사고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유진에서 한현민으로 오기까지

돌아보면 국제결혼을 부정적으로 사고했던 과거에 '혼혈'은 사회적 낙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외모가 한국인으로 패싱(passing, 외관과 언어 등의 요소를 통해 특정 범주로 받아들여지는 것) 될 수만 있다면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가 국가적 사업이 됐을 때, 결혼이민자 여성들은 주로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중국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동포라는 범주에 든다면 민족적 혈통을 이어갈 수 있다고 여겼다.

아직 다양한 출신국가의 사람들이 많지 않던 2000년 이전, 한국 여성들의 국제결혼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은 혼혈을 순혈주의를 흐리는 오염된 존재로 여겼다. 심지어 이유진보다 앞서 이승만 정권 시대를 살았던 혼혈 아동들은 정책적으로 해외입양을 통해 추방돼 아메리카와 유럽으로 흩어졌다. 2000년대는 그러한 역사 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시대였고, 그래서 이유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유로 시청자들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2004년 8월 7일자 MBC <뉴스데스크> 방송 내용 ⓒ MBC

  

'나의 영어사춘기' 한현민, 세계가 주목하는 모델 모델 한현민이 4일 오후 서울 영등포의 한 웨딩홀에서 열린 tvN 영어 에듀 예능 <나의 영어사춘기> 제작발표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정민

 
20년이 지난 오늘 미디어는 전소미라는 아이돌이나 한현민이라는 모델의 출연이 상징하듯 그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있고, 가나 출신의 오취리나 이탈리아 출신의 알베르토, 미국 출신의 타일러, 독일 출신의 다니엘 등 다양한 출신국의 사람들이 출연하는 여러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물들이 늘 긍정적일 수만은 없고, 부정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다문화 가정? 글로벌 패밀리? 그 간격

이제 '다문화'라는 용어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2007년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되자 법적 근거에 따라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전국적으로 생겼고, 200개가 넘는 센터들이 결혼이민자여성에 초점을 두고 한국어 공부를 지원했다. 이들이 아이들을 낳기 시작하자 자녀를 위한 방문교육도 진행되고 있다. 결혼이주여성의 서툰 한국어가 아이들의 언어발달과 학습능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문가들의 발표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결혼이민자여성들은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다문화'라는 용어는 특정 이주민 그룹을 호명하는 인종차별적 용어로 고착됐다.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는 특히 아시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과 이들의 자녀를 중심으로 그러한 호칭을 사용했다. 이를테면 '다문화 아동', '다문화 청소년', '다문화 여성', '다문화 군인' 등으로 부르며 한국인과 다름을 범주화해 구별하는 식이었다.

'다문화'라는 호명은 가난한 아시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 왕따당하는 아이들, 학습 부진으로 진학률이 낮은 학생들을 의미했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으며, 서구 유럽 출신의 결혼이민자들과 구분해 위계화하고 서열화했다.

그렇게 '다문화 가정'은 '글로벌 패밀리'와 구분됐고, 미디어는 정확히 그 다름을 보여주는 콘텐츠들을 생산했다. KBS에서 시작된 <러브 인 아시아>부터 EBS의 <다문화 고부열전>까지 가난한 아시아 출신의 결혼이주여성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시어머니와 지지고 볶고 화해하는 갈등의 원인이자 문제로 그려졌다. 반면에 TV조선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는 한국 여성이 해외에 거주하며 고학력, 중상층 이상의 부유한 외국인 남성과 평등한 부부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자녀를 양육하는 모습을 그렸다.
 

KBS <러브 인 아시아>. 2005년 11월 시작해 2015년 2월 종영했다. ⓒ KBS

  

2013년 10월부터 시작한 EBS <다문화 고부 열전>은 외국인 며느리와 한국인 시어머니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 EBS

 
이러한 출연진과 포맷의 차이는 국제결혼을 한 가정들을 '다문화 가정'과 '글로벌 패밀리'로 나누며 출신국별 또는 계층별로 위계화했고, 편견과 고정관념이 더 고착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문화 가정 자녀라고 분류된 아이들과 달리, 글로벌 패밀리의 자녀들은 <슈퍼맨이 돌아왔다>(KBS)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똑똑하고 예쁜 아이들로 표상되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다국어를 구사하는 아이들의 언어 방식을 문제 삼는 일은 없었다. 자막은 아이의 알 수 없는 말을 시청자가 이해하도록 바꾸어 놓았고, 언어발달에 대한 어떠한 조급함도 보이지 않았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엄마의 모국어 사용으로 정체성 혼란과 언어발달 상담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포맷이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가진 언어적 위계화가 인종주의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미디어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속 인종주의 프레임
 

과거와 달리 미디어는 빠른 속도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일단 양적으로 외국인 또는 이주민의 출연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의 수도 늘어났다. <비정상회담>(JTBC),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MBC에브리원), <서울메이트>(Olive), <대한외국인>(MBC에브리원), <외계 통신>(tvN), 최근 새롭게 시작한 <77억의 사랑>(JTBC) 등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과 여행자인 외국인을 출연시키는 프로그램들이 늘어났다.

이주노동자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EBS) 같은 프로그램 하나인데, 똑같이 한국을 방문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인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와 대비됐다.
 

EBS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 방송 내용 ⓒ EBS

  

MBC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방송 내용 ⓒ MBC에브리원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는 '글로벌'이라는 용어가 무색하게 한국에서 힘겹게 노동을 하는 모범 이주노동자인 아버지를 찾아 빈곤한 아시아 국가의 고향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온다는 포맷이다. 화면은 고향의 가족 상황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보여주면서, 그들을 위해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아빠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한 그들은 아버지의 고된 노동의 현장인 공장을 방문하고, 기숙사에서 잠을 자고,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눈물을 흘리며 공항에서 헤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에 반해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여행을 위한 방문이고, 고급스러운 호텔을 이용하며, 출연자는 철저히 관광객으로 출연한다. 한국을 체험하고, 전통을 존중하고, 놀라운 IT 기술에 감탄하고, 한글을 사랑하고, 김치를 만들고, 멋진 명소들을 방문하며, 스포츠를 즐기고, 맛집을 찾는다. 그동안 출연자는 백인과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앞의 프로그램이 가족결합을 허용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의 체류자격은 문제 삼지 않은 채 모범적인 성실 근로자에게만 보상처럼 주어지는 드문 기회라면, 뒤의 프로그램은 한국문화를 서구 유럽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드러난 콘텐츠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포맷의 차이는 혹시 박노자가 말했던 'GDP' 인종차별인 것은 아닐까? 한쪽은 돈을 벌러 온 노동자라는 계급적 위치에 놓여 있고, 미디어는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이주노동자들을 그려냄으로써 한국인의 우월적 위치를 확인하는 거라면, 다른 한쪽은 서구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한국인의 열등한 위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1인 미디어의 출현...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다
  

'아시아의친구들', AMMORE', 오산이주노동자센터 등 시민사회단체가 2009년 7월 15일 국내에서 열릴 예정인 '아시아 결혼 이주자의 법적지위와 현실' 국제회의에 초청한 필리핀 국적의 가사 노동자에 대한 비자를 발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이경태

 
이렇게 이주민을 위계화하고 서열화하는 인종주의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한 1인 미디어들의 증가로 더 확대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직접적인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이주노동자와 난민들을 지목했고, 특히 이들을 사회의 불안한 요소로서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더구나 체류자격이 미등록 상태인 이들을 '불법체류자'라고 호명하며 범죄화했다. 일부 1인미디어뿐만 아니라 언론, 심지어 법무부도 불법체류자라는 표현을 썼다. 이런 용어 사용은 201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있었던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 정부보고 이후 중지할 것을 권고받은 바 있다. 사실 유엔 권고 이전에 이미 국가인권위원회가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신문과 방송은 법무부와 함께 불법체류자라는 용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20년 코로나19로 온 세계가 전염에 대한 불안에 떠는 오늘, 중국 출신 이주민을 혐오하는 현상이 언론 보도에서 '우한'이라는 지역명을 사용하며 더 증폭됐다고 유엔은 판단하기도 했다.

이는 2018년 제주도에서 출도 제한으로 내륙 이동이 금지 당한 예멘 난민 사태와 비슷하다. 당시 법무부의 잘못된 난민 정책을 주류 미디어들이 편향된 시각으로 보도했고, 보수 정치인들이 이를 인용해 발언했으며, 플랫폼을 이용한 1인 미디어들이 가짜뉴스를 덧칠해 무한 반복 재생했다. 그런 식으로 차별과 혐오가 극에 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2018년 9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맞은편에서 난민대책국민행동 회원들이 난민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부가 예멘 난민 23명에게 내어준 인도적 체류 허가를 규탄하고 같은 시간 열린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에 대응해 집회를 열었다. ⓒ 이희훈

  
이주민 5% 시대, 미디어의 과제

지난 17일 법무부는 통계자료를 통해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 중 이주민의 비율이 5%대에 근접해 가고 있음을 알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4%(200만 명)였는데 4.9%(250만 명)로 늘어난 것이다.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은 이제 바꿀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디어가 그러한 변화의 가운데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물론 표현의 자유에 따라 이주민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적인 혐오표현이나 제도적 차별을 옹호하는 편향된 보도는 다양성의 공존은 물론이고 사회 통합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역시 미디어에서의 차별을 선동하는 혐오표현에 대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라고 지난 2018년 12월 권고했다.

그리고 2019년 5월부터 진행된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이주민방송(MWTV)이 함께한 미디어 모니터링에서 드러났듯이, 주류언론의 문제와 더불어 1인 미디어들의 이주민들을 향한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내용의 콘텐츠들이 문제로 지적됐다. 그 과정에서 방송법과 같은 미디어 관련법 개정의 필요성이 드러났다. 자율적인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는 언론 보도 준칙도 방송사별, 신문사별 그리고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별로 보강하고 준수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증대된 상황이다.

이주민방송은 2018년 '인종차별을 예방하고 문화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한 방송제작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다문화' '혼혈' '불법체류자'라는 용어를 왜 사용하면 안 되는지 제시하며, 제작과정에서 이주민을 묘사하는 부분을 가이드하고 있다. 이를 많은 미디어 제작자들이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미디어는 주류의 관념을 수동적으로 답습하는 주체가 아니라, 담론을 형성해 내는 영향력 있는 매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주민에 대해 어떻게 용어를 쓰고 내용을 채울 것인지 고민하는 동시에, 의도하지 않은 차별 또는 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고 자체 모니터링을 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다문화 사회로 가기 위한 공존과 사회통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시민사회와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야 할 것이다.
 

정혜실 이주민방송 대표(오른쪽)가 일하는 모습 ⓒ 이희훈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이주민방송(MWTV)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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