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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임정로드의 종착지인 충칭(중경·重慶)으로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혹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방법도 있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돌아서 가는 길'을 택했다. 구절양장(九折羊腸: 아홉 번 꺾어진 양의 창자라는 뜻으로, 그만큼 꼬불꼬불 험한 길을 의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72굽이산길'을 넘기로 한 것이다.

왜 편한 길을 두고 굳이 이 길을 택했을까? 바로 80여 년 전, 임시정부 가족들이 이 고개를 넘어 충칭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구절양장의 '72굽이산길'
 구절양장의 "72굽이산길"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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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이 보내준 버스를 타고 넘었던 '72굽이산길'

1939년 4월 22일, 120여 명에 이르는 임시정부 대가족도 6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이 길을 넘었다. 당시 충칭에 먼저 도착했던 김구 선생은 중국 정부에 요청해 임시정부 가족들을 충칭 가까운 곳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했다. 교섭에 성공한 결과, 중국 정부는 가족들이 타고 올 수 있도록 버스 6대를 제공했다.

더 빠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 당시 임시정부 가족들이 넘어야만 했던 길을 직접 체험해 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 위함이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답사단을 인솔하던 마완근 교사(구리 갈매고 역사교사)는 "우리는 지금 김구 선생님이 보내주신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이라며 이 길을 넘는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그 말이 어찌나 뭉클하게 느껴지던지. 시간을 관통하여 80년 전 이 길을 넘었던 임시정부 가족들과 오늘 이 길을 걷는 우리가 함께 이 고개를 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72굽이산길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72굽이산길 고개 위에서 내려다 본 풍경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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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길이 어찌나 험했던지, 임시정부 가족들은 중간에 버스가 퍼지는 등 온갖 난리를 겪은 끝에 간산히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한다. 직접 넘어 보니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됐다.

총 72개의 굽이로 이루어진 길은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혹시라도 마주 오는 차가 있을까봐 운전기사는 코너를 돌 때마다 클락션을 빵빵 울려댔다. 우리는 굽이를 돌 때마다 다함께 '하나, 둘, 셋'하고 숫자를 셌다.

기강박물관에 걸려 있던 한 장의 사진

72굽이산길을 넘고서도 한참을 달린 끝에 마침내 '치장(기강·綦江)'에 도착했다. 벌써 해질녘이 다 된 탓에, 우리는 서둘러 목적지인 '기강박물관'으로 향했다. 폐관 시간이 다 되어 도착했기 때문에 박물관은 불을 끄고 퇴근을 준비하고 있던 차였다. 박물관 직원들은 뒤늦게 도착한 우리를 위해 다시 불을 켜고 관람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기강박물관
 기강박물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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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2층으로 올라가니 대한민국 임시정부 코너가 별도로 조성되어 있었다. 한적한 마을에 자리잡은 작은 박물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니 감격스러웠다. 치장과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유적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철거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기강박물관 2층에 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코너
 기강박물관 2층에 조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코너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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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사진들 중 유독 반가웠던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201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에서 임정로드 답사 당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지금 우리와 여정을 함께 하고 있는 청년백범 답사단원들 중 일부도 사진 속에 있었다.
 
 기강박물관에 전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 사진
 기강박물관에 전시된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 사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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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임정로드 4000km>라는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지난해 임정로드 걷기 열풍이 불었던 것도, 이렇게 앞서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 떠난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때, 묵묵히 임정로드를 개척하고 세상에 알린 이들의 노력을 우리는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이제 우리가 임정로드를 계속 걷고 또 알리는 일이 중요하겠다.

'쟁족' 실천한 이동녕 선생의 삶

기강박물관에서 나와 길 아래로 조금 걷다 보면 인적 없는 골목길이 나온다. 그 끝에 집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대문을 잠가놓아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바로 그곳이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치장에서 머물렀던 '관음암' 터라고 한다.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없어서 그저 문틈 사이로 들여다보며 이곳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녔을 청년들의 모습을 상상해볼 따름이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들이 활동했던 '관음암' 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들이 활동했던 "관음암" 터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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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암 옆으로 내려다보면, 발밑 아래로 도심을 유유히 흐르는 기강이 보인다. 바로 저 기강변을 따라 임시정부 가족들이 줄지어 살았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텅 빈 폐허와도 같은 공터에 낡은 집 한 채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이는 이 건물이 바로 '이동녕 선생 거주지'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이 초라한 건물 외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구거유지(大韓民国 臨时政府 主席 李東寧 舊居遺址)'라는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혹시 내부를 볼 수 있을까 싶어 노크를 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동녕 선생 거주지
 이동녕 선생 거주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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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녕 선생 거주지에 붙어있는 현판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李東寧 舊居遺址)
 이동녕 선생 거주지에 붙어있는 현판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李東寧 舊居遺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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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동녕 선생을 생각하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당신의 생애를 통해 오롯이 보여준 '쟁족(爭足: 누구나 다리가 되어 궂은 일, 힘든 일 마다하지 말자는 뜻)' 정신 때문이다.

이동녕 선생은 독립운동 경력으로 치면 김구 선생보다도 훨씬 선배였다. 선생은 일찍이 만주와 러시아를 넘나들며 무관학교 설립, 군정부 수립,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운동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로도 선생은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았다. 이승만 탄핵 사태, 국민대표회의 등으로 임시정부가 분열할 때마다, 공석이 된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를 대리하면서 혼란을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국무총리, 내무총장, 군무총장, 법무총장, 국무령 등 웬만한 정부 직위는 다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3년, 자싱(가흥) 피난처에서 김구, 이동녕(가운데), 엄항섭
 1933년, 자싱(가흥) 피난처에서 김구, 이동녕(가운데), 엄항섭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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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선생은 늘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김구와 같은 능력 있는 후배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 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했으며, 주석을 무려 네 번이나 역임했음에도 김구 선생보다 이름이 덜 알려진 까닭이기도 하다. 그것이 선생이 바랐던 바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40년 3월 13일, 선생은 72세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치장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선생은 마지막까지도 '단결'을 당부했다고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묵묵히 밀어주고, 때론 조언과 충고도 아끼지 않은 대선배의 죽음에 김구 역시 크게 낙담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선배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분열된 독립운동계의 통일에 더욱 매진한다.
 
 이동녕 선생 거주지 앞에 선 청년백범 답사단
 이동녕 선생 거주지 앞에 선 청년백범 답사단
ⓒ 변량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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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둔 정치인들이 사표로 삼아야 할 위인

선생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정치인들이 사표로 삼아야 할 위인 1순위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마다 치열한 경선을 치르고 있는 요즘 들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서려고만 하는 이들, 젊고 능력 있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기보다는 '4선', '5선' 타이틀을 갱신하기에만 급급한 이들이 국회에 가득하다.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불살라 보겠다는 의지와 열정도 좋지만, 자신보다 능력 있는 후배가 있다면 양보할 줄 아는 미덕도 필요하지 않을까.

선생의 거주지가 오래오래 보전되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는 도도히 흐르는 기강의 물결을 따라 임시정부 요인들이 줄지어 살았다는 기강변을 걸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물결을 보니 임시정부 요인들이 불렀다는 <애국지사의 노래>의 한 소절이 떠올랐다.

양자강 깊은 물에 낚시 드리고 
독립의 시절 낚던 애국지사들 
한숨과 피눈물로 물들인 타향 
아침꽃 저녁달이 몇번이드냐
<애국지사의 노래> 中
 
 임시정부 가족들이 줄지어 살았던 기강변
 임시정부 가족들이 줄지어 살았던 기강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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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은 때때로 기강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국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름을 달래지 않았을까? 그 모든 역사를 지켜보았을 기강을 뒤로 하고, 우리는 마침내 임정로드의 종착지인 충칭으로 향했다.

(*7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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