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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동학혁명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군.
ⓒ 홈페이지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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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전국 각처에 정보원과 밀정을 파견하여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일본은 밀정들을 약장수로 변장하거나 관광객으로 가장시켜 현지에 투입, 각종 정보를 입수하였다. 일본의 정보수집 실태를 이이화 씨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이때 일본의 정보수집망은 두 갈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의 참모본부에서 이지치 코오스케 소좌를 부산에 파견하여 조선주재 일본공사관 와타나베 테츠타로오 대위 등과 제휴하여 정보수집에 종사케 한 것이다. 이 두 정보원은 종래의 밀정들인 약장수 · 관광객을 지휘하여 전라도 일대만이 아니라 전국을 대상으로 살폈다.

또 하나는 해군의 지휘에 의해 측량선ㆍ상선을 가장하여 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아무데나 상륙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청군의 동정을 엿보기도 했다. 이와 달리 일본 민간단체로 낭인의 집합체인 현양사(玄洋社)의 천우협(天佑俠) 패들은 부산에 상륙하여 은밀히 정보를 수집하며 농민군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 다케다 노리시, 우치다 료헤이, 스즈키 다카미 등은 계속 경상도 일대를 거쳐 전라도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부산의 오사키 쇼키치의 법률사무소를 거점으로 정보를 수집해 오다가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농민군을 이용하여 친일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그리기도 했다. 이들은 끝내 집강소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봉준을 만나기에까지 이른다. (주석 4)

일본의 일부 자료들은 천우협(天佑俠)과 내전(內田) 등 대륙 낭인패들의 활동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천우협의 단원들이 전라도 순창에서 전봉준과 회견하고 동학군의 군사(軍師), 유격군의 대장, 또는 분대의 우두머리로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주석 5)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의 상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의 상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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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상 신뢰성이 모자란다. 당시 대부분의 다른 회원들은 현양사의 중견 회원이었거나 또는 조선ㆍ만주 등 해외에서 많이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그 반면, 내전(內田)은 현양사의 소장 회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활동에도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이 어리고 경험없는 내전이 천우협을 지휘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주장이며, 더욱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당의 지도자들이 동학군의 요직과 통수권을 천우협에게 위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처음부터 '척왜척양'을 주장하여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동학봉기를 빌미로 하여 조선에 군대를 보낸 이후부터는 동학 내부의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현양사나 흑룡회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일본 낭인패와 밀정, 군사들이 수집한 각종 정보는 주한 일본 영사관을 통해 즉각 일본정부에 보고되고 필요한 지침을 하달받아 이를 시행하였다.

다음에 인용한 '보고서'와 '지침'을 살펴보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에 따른 병력증파 등 조선침탈이 정확한 정보와 일본 정부의 치밀한 작전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덕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예산농학혁명기념공원에서 동학혁명기념비 주변을 돌며 행진을 하고 있다.
 덕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예산농학혁명기념공원에서 동학혁명기념비 주변을 돌며 행진을 하고 있다.
ⓒ 이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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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1894년 10월 21일 주한 임시대리공사 삼촌준(杉村濬)이 외무대신 육오종광(陸奧宗光)에게 보낸 보고서다.

기밀제205호 본124(機密第205號 本124)

동학당 진압을 위한 원병파견 결정(東學黨 鎭壓을 위한 援兵派遣 決定)

이 나라 경상ㆍ전라ㆍ충청 3도에서 동학당이 다시 봉기한 데 대해 지난 번부터 계속 전보품신을 드렸습니다만 요즘에 와서 동학당의 기세가 더욱 창궐하여 끝내는 경성에까지 쳐 올라올 것 같은 형황(形況)이 현저하게 나타난 모양이므로 이 나라 정부의 제 대신 특히 개화파 인사들이 극심한 공포에 빠져 자주 우리에게 원병차견을 요청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전보 품신을 드린 끝에 재용산 병참부 소속 수비병 중에서 파견키로 결정을 보게 되었으므로 원병청구의 건으로 새삼 다시 공문으로 외무대신께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런데 대원군께서는 그전에도 보고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것은 물론 자국의 군대로 정토(征討) 하는 것 마저 그다지 원치 않는 것 같은 눈치여서 갑자기 결말이 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외무대신과 기타 인사와도 내적으로 타협을 본 다음 새삼 다시 이쪽에서 동학당 폭거의 사정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우리가 원조하기 위해 출병하게 되었다고 별지갑호 사본과 같은 조회를 보냈던 바 이에 대해 외무대신이 동당의 소행을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어서 드디어 진무 차 출병하게 되었으니 동심협력의 원조를 해 주기 바란다고 별지 을호와 같은 회답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난 17일을 기해 재 용산 수비대 중에서 2개 소대 만을 출동시켰습니다. 단 부산방면으로부터는 현재 적정(賊情)을 정찰 중이어서 그 정찰 결과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접한 다음에야 2개 소대를 파견하게 될 것이라고 실전(室田) 총영사로부터 전보가 왔습니다.

이상 개략적인 전말을 말씀드립니다.

1894년 10월 21일
임시대리공사 삼촌준(杉村濬) (주석 6)


주석
4> 이이화, 앞의 책, 335~336쪽.
5> 『현양사사사(玄洋社社史)』에는 전중시랑(田中侍郞) 등 3인이 전봉준의 군사로, 그리고 나머지 멤버들은 동학군의 대장 또는 부장으로 임명되어 동학군을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 『주한일본공사관기록』(5), 국사편찬위원회, 6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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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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