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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시장의 모습(자료사진)
 꽃시장의 모습(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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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수험생 둘째 딸이 수시에 응시한 6개 학교에 모두 떨어졌다. 낙심한 아이는 풀이 죽어 방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다. 힘든 시간을 혼자 견뎌내는 것도 인생에 필요하리라 믿으며, 당분간 무엇을 하든지 참견하지 말자 싶었다.

며칠 지난 이른 아침, 아이의 방문이 열려 있어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 아이가 없었다. 깜짝 놀라 핸드폰으로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마음이 약해져서 나쁜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곧 전화가 왔다.

"엄마? 저, 친구랑 꽃시장 왔어요. 엄마 깰까 봐 그냥 나왔어요."
"놀랐잖아. 식탁에 메모라도 남겨두지. 꽃시장엔 왜 갔어?"
"힐링하고 싶어서요"
"그렇구나. 거기 조화 파는 가게도 있거든. 간 김에 외할아버지 산소에 가져갈 꽃 좀 사 올래?"


아이와 전화를 끊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짧은 5분 동안 별생각을 다 한 내가 머쓱해졌다. 한편 생뚱맞게 새벽 꽃시장에 간 아이를 보니 잊고 있었던 나의 스무 살이 생각났다.

대학 시절 '꽃꽂이 동아리'

대학교에 입학한 스무 살 3월, 학교 입구부터 게시판까지 각종 동아리 모집 광고로 가득했다. 오가는 길에는 직접 나눠주는 동아리 전단도 여러 장 받았다. 여대라서 그런지 다른 대학과 함께 하는 연합동아리의 장점을 홍보하는 선배들도 많았다.

전공 수업을 듣는 가정과학대 건물 입구에는 단과대 동아리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꽃꽂이 동아리'가 눈에 띄었다. 당시 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큰 예배당 양쪽에 매주 화려하게 놓여있는 꽃꽂이 장식이 늘 아름다워 언젠가 나도 꽃으로 봉사하고 싶었다. 과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지면 전공 공부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나는 친구 둘을 꾀어 동아리방에 들어갔다. 넓은 책상에 싱싱한 장미가 가득 놓여있었다. 선배들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조금 뒤에 곱게 한복을 차려입으신 할머니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분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꽃봉오리같이 귀여운 신입생들이 새로 들어왔군요. 오늘은 첫 시간이니까 이것만 배워볼까요? 꽃도 우리처럼 얼굴이 있어요. 어디가 앞모습이고 어디가 옆모습일까요?"

그때는 몰랐다. 그분이 대한민국 1호 플로리스트이신 임화공 선생님이라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꽃꽂이라는 단어를 처음 선보인 분이고, 1950년대 말부터 영부인과 주한 외교 대사 부인들에게 꽃꽂이를 가르쳐온 분이라는 것도.

선생님의 시범이 끝나자, 백자 화기 안에 침봉을 넣고 능숙하게 꽃을 꽂는 선배들이 우아하고 멋져 보였다. 신입생인 우리는 열심히 장미 가시를 제거했다. 선생님은 사용하지 않은 장미는 가져가도 좋다고 하셨다. 우리는 신이 나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나왔다.

오늘 과팅(다른 대학 남학생들과 단체 미팅)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같이 꽃을 팔러 가자고 했다. 당시에는 소개팅하는 친구를 따라가 옆 테이블에서 구경하다가, 껌이나 꽃을 내밀면 남자가 사주거나 우리가 마신 음료수 값을 계산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남자의 체면치레를 이용한 악습이었으나 그때는 낭만이라 여겼다.  

우리는 신문지에 꽃을 하나씩 다시 포장했다. 한 카페 안에 우리 과 동기가 남학생과 수줍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불쑥 다가가 말했다.

"같은 과 친구인데요. 수요일엔 빨간 장미 어떠세요?"

남자가 곤란해하자 과 동기는 우리에게 빨리 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우리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첫 만남 때 장미를 선물로 주면 이어진다는 둥, 꽃 점을 쳐주겠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았다. 남자는 마지못해 꽃을 샀다.

낄낄거리며 카페를 나오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확 밀려왔다. 어떻게 그런 능청스러움이 나온 거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민망해했다. 서둘러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다음날 과 동기는 분위기 좋았는데 우리 때문에 망쳤다면서 화를 냈다. 우리는 미안하다고 싹싹 빌고 자판기 고급 커피를 대령했다(학교 커피 자판기에는 일반과 고급이 있었다).

그 뒤로 꽃꽂이 동아리에 한두 번 더 참석했고, 여기저기 동아리를 기웃거리다가 학교 채플 시간에 노래하는 성가합창단에 정착했다. 그렇게 꽃꽂이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집 식탁에 꽃을 꽂았다

10년 전, 아이들이 초등학교 3~4학년쯤 됐을 때였다. 아파트 안에서 꽃꽂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알게 되었는데, 임화공 선생님 제자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나는 "저도 임화공 선생님의 '한 달' 제자예요"라며 이번엔 열심히 배우리라 생각했다.

우리나라 꽃꽂이는 나뭇가지를 많이 사용한다. 봄에는 산수유나 조팝나무 같은 꽃나무를, 가을에는 탱자나무나 감나무같이 열매 달린 나뭇가지를, 겨울에는 동백나무 가지 등을 사용해 계절감을 살린다. 무엇보다 선과 여백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뭇가지의 선을 잘 사용해야 한다.

꽃꽂이 선생님이 말했다. 꽃꽂이를 시작했을 때는 디자인에 맞게 나뭇가지를 인위적으로 구부리거나 끊었지만, 지금은 나뭇가지가 생긴 형태대로 살리려고 한다고. 그럴 때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며 웃었다. 나무의 잔가지들도 지저분하다고 모두 잘라버리면 멋스러움이 사라지니, 중요한 여백을 해치지 않으면 최대한 살려보라고 조언했다.

그 말에 문득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각자 타고난 천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부모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로 억지로 휘고, 자른다고 하여 아이가 잘 자랄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스스로 가지를 뻗어 가기를,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그 역시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려주자고 다짐했다. 그것은 나의 부모관이 되었다.

두 딸이 사춘기로 나와 부딪칠 때도 꽃꽂이의 나뭇가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아이들 마음의 가지가 잘못 뻗어간다 싶을 때도 - 당장 가위를 들고 잘라내고 싶었지만 - 한숨 고르고 기다려주면 다시 햇빛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 아이들이 커서 이제 스무 살이 되었다. 딸의 스무 살을 통해 나의 스무 살을 들여다보니, 아이들 덕분에 또 한 번의 스무 살을 사는 것 같다. 앞으로도 딸들의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그 시절의 나를 회상하겠지.

꽃시장에 갔던 둘째 딸은 크리스마스 꽃이라 알려진 빨간 포인세티아 조화를 사 왔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 있어서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조화뿐이었단다. 묘지에 크리스마스 꽃을? 아니다, 어쩌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친정엄마 생신이 크리스마스이니, 엄마를 생각하시라고 아버지 묘지에 꽂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잘했다, 잘했다 하며 화병을 꺼내 일단 우리 집 식탁에 꽃을 꽂았다.

태그:#나의스무살 , #1990, #꽃꽂이, #동아리 , #스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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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창간 20주년 공모] 나의 스무살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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