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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 A씨의 숙명여대 합격 소식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그러나 대학가와 학내에서는 A씨의 여대 입학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A씨는 입학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오마이뉴스>는 A씨의 롤모델로 알려진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씨의 페이스북 글을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2020년 2월 6일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게시판에 '성전환' 신입생의 입학을 환영하는 대자보(왼쪽)와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오른쪽)가 나란히 붙어 있다.
 2020년 2월 6일 서울 숙명여자대학교 게시판에 "성전환" 신입생의 입학을 환영하는 대자보(왼쪽)와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대자보(오른쪽)가 나란히 붙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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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에게 폭풍 같은 일주일이었을 듯합니다. 저의 경우는 지난주 집에서 라면을 먹다 실시간검색어에 이름이 올랐단 연락을 받고 놀랐습니다. 이후에는 A씨의 숙명여대 입학을 둘러싼 여러 기사와 글들을 보면서 심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미 기사로 나왔지만 A씨는 숙명여대 등록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고민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A씨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과 함께 어울리고 살아갈 거라는 점에서 당사자분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나름의 소회식으로 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
  
정신과에서 성주체성장애 진단에 앞서 이루어지는 심리검사 중에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Minnesota Multiphasic Personality Inventory, MMPI)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당 검사를 통해 측정하는 척도에는 남성성-여성성이 있고, 그 결과는 진단을 내리는 데 하나의 참고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해당 검사 질문지를 보면 '이 부분을 측정하는구나' 싶은 질문들이 보입니다. 가령 '나는 추리소설보다는 로맨스소설을 좋아한다'와 같은 질문입니다. (오래 전이라 정확한 문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따른 대답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대충 보이시죠? 그런데 문제는 제가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즐겨 읽었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저는 당시 저 질문을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은 '그렇다'고 적은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저는 당시 의료적 트랜지션을 위한 진단을 원했으니까요.

트랜스젠더로서 살다 보면 이와 같은 상황들을 자주 마주합니다. 상대방이 소위 '여성성/남성성'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에 맞춰 너를 증명하라는 요구들입니다. 제가 대리한 한 성별정정 사건에서는 판사가 "요새 머리 긴 남자도 있고 머리 짧은 여자도 있는데 그냥 살지, 왜 굳이 수술하고 정정하냐"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뭐라 대답해야 할까요. 단지 헤어스타일의 문제가 아닌 관계, 노동, 일상 모두와 연결되는 이 성별화된 사회 속에서 말입니다. 질문이 조악하면 대답도 조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이미 강고한 성별고정관념을 가지고 너의 정체성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상대의 고정관념을 충족시키는 대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입증의 요구는 병원, 법원만이 아닌 일상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이러한 입증을 남이 아닌 나 스스로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체화의 과정은 어느 날 한순간의 번뜩임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불신과 내적 설득의 과정을 거칩니다. 저 역시 그러했고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저 또한 사회에서 학습된 성별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긴 괴로움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여성의 외모는 이렇고, 행동과 성격은 어떠어떠해야 하는데 아무리 돌아봐도 저는 거기에 못 미치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 그냥 망상에 빠진 사람 아닌가' 하는 의심도 꽤 했었습니다. 심지어 트랜지션 이후에도.

그런 고민들을 해결해 준 것이 저한테는 '페미니즘'이었습니다. 누구나 도달해야 할 절대적 여성상/남성상은 없고, 이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어떻게 보면 정말 기본적인 내용을 깨닫고서야 비로소 저는 자기의심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냥 '나는 나로서 살면 된다'고 여기고 편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의 모든 행동이 허용되거나, 사회 구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 해방감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저를 비롯한 수많은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요즘 따라 더 깊은 좌절과 괴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어째서 염색체가 진지한 정체성의 호소보다 우선되어야 하나
  
분리하고 추방하며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고 그 안에서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
 분리하고 추방하며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고 그 안에서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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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저한테 한 가지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면서 왜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는가'라는 의문. 그에 대한 제 대답은 "그냥 그렇다"입니다.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모, 행동, 성격 등을 통해 성별을 설명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는 성별이분법적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나는 그러하다'는 내면의 정체감뿐입니다. 이는 비단 트랜스젠더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라는 감각, 내가 타인과는 구분되는 몸과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무엇이라는 감각은 상당히 즉각적이고 직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뒤에 붙는 여러 설명은 사회 속에서 나와 남을 설득하기 위한 이후의 과정이고요. 그렇기에 미국의 트랜스젠더 연구자인 수잔 스트라이커의 말처럼,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냥 지정 성별과 다른 성별의 정체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논리와 말을 붙이듯 그 사실 자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그런 정체감은 자기만의 생각일 뿐이고 결국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여성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생물학적 성별은 무엇일까요.

얼마 전 기사에서 숙명여대 학칙을 '생물학적 여성만 입학 가능'으로 개정하자고 요구하면서 든 근거는 염색체였습니다. 일말의 합리는 있습니다. 외관과 신체 외과수술 등을 통해 변경이 가능한 상황에서 염색체는 변경이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저 학칙이 실제 통과되면 입학 시 유전자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상황이 온다는 것을 차지하고서라도 생각해 봅시다. 신체 조건이 변경 가능하고 이를 통해 성별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생물학적 성별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는 인정하기에 염색체를 들고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염색체는 단지 X와 Y의 기호 외에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어째서 내 세포 속의 23쌍 중 1쌍에 불과한 염색체가 진지한 정체성의 호소보다 우선되어야 할까요.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안전을 이유로 '트랜스젠더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성차별과 폭력의 위협 속에서 여성들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에 대해서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러한 안전에 대한 대답이 분리와 위험인자의 추방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별에 따른 완벽한 구분이 난망하고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결국 위험인자로 추정되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경계에 선 사람들은 또 다른 안전의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8월 미국에서는 한 트랜스여성이 여성화장실을 이용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한 일이 얼마 전 보도되었습니다. 화장실을 이용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야 하는 사회가 정말 우리가 추구하는 안전을 위한 사회일까요? 안전의 문제 역시 중요하지만, 저울질을 통해 누가 더 위험한지, 우선순위에 있는지 가릴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지금 당장의 위협 앞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분리하고 추방하며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고 그 안에서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기있는 자들의 외침 덕분에 사회는 반드시 변할 것
 
 
변희수 하사, A씨 모두 더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이에 대한 각계각층의 지지도 이어졌다. 이 흐름이 다소의 부침은 있을지라도 결코 뒤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변희수 하사, A씨 모두 더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이에 대한 각계각층의 지지도 이어졌다. 이 흐름이 다소의 부침은 있을지라도 결코 뒤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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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부터 성별정정 금지법 청원까지, 일련의 터져나오는 말들을 보며 이밖에도 여러 가지 떠오르는 말들은 있지만 정리되지 않는 관계로 한 가지만 더 하겠습니다. 가타부타 말하기에 앞서 상대방이 나와 같이 복잡한 생각과 삶의 여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줬으면 합니다. 

A씨를 비롯해 트랜스젠더들은 조롱과 모욕을 위한 가상의 캐릭터도 아니고 인터넷의 밈도 아닌 현실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같이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들의 삶 속에는 "이러이러하니까 여자 혹은 남자다"라는 설명으론 삭제될 수 없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인간의 삶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로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트랜스젠더의 삶도 한두 마디의 문장으로, 나아가 오직 트랜스젠더만으로서의 삶으로 요약할 수 없습니다. 논쟁과 토론은 환영하지만 모든 것은 부디 이 점에서부터 출발해주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일련의 사건들이 당사자만이 아니라 이를 지켜본 많은 성소수자 및 지지자들의 마음에도 큰 상처가 됐을 듯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렇게까지 실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변희수 하사, A씨 모두 더는 자신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고 이에 대한 각계각층의 지지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흐름은 다소의 부침은 있을지라도 결코 뒤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신답게 살아가며 이를 드러내는 존재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이에 맞추어 우리 사회도 변해나갈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나갑시다. 끈질기게.

태그:#성소수자, #숙명여대, #함께사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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