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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1987년은 큰 의미를 갖는다. 기나긴 군사 독재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새로운 헌법을 쟁취하면서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해이기 때문이다. 1987년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우리는 '6월 항쟁'이라는 역사의 드라마를 쓸 수 있었을까. 만화가 최규석의 작품 제목처럼 그 해 우리는 어떻게 '100도씨'까지 끓어 올랐을까.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고문으로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1월 14일 오전 8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을 임의 동행해서 조사했다. 중요 수배자였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한 수사의 일환이었다. 박종철군이 끌려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남산 안기부, '서빙고호텔'(보안사령부 대공분실)과 함께 악명을 떨친 곳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무대로 활동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은 경찰 소속이었으나 안기부의 지휘와 예산을 받는 조직이었다. 김근태를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가 이곳에서 고문을 받고 용공 조작을 당했다.

1987년 그리고 박종철
 
남영동 대공분실 1976년 10월 2일 완공된 건물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 발주한 탓에 머릿돌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치열은 일본 주오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이승만 시절 서울지검장을 지낸 후 1970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발탁되었다. 그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김대중 납치살해 미수 사건,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이 터졌다. 민청학련 사건 때는 검찰총장이었다.
▲ 남영동 대공분실 1976년 10월 2일 완공된 건물로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 발주한 탓에 머릿돌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치열은 일본 주오대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이승만 시절 서울지검장을 지낸 후 1970년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발탁되었다. 그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김대중 납치살해 미수 사건,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이 터졌다. 민청학련 사건 때는 검찰총장이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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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은 나선형 철제계단을 통해 5층 조사실로 곧장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조사실이 있는 5층은 창문 구조가 다르다. 5층 창문은 너비가 30cm밖에 되지 않는다. 조사와 고문 과정에서 붙잡혀 온 사람이 도망가거나 투신하는 걸 막기 위함이다.

조사실 안은 감시 카메라와 방음 시설뿐 아니라 형광등 밝기 조절이 가능한 다이얼이 설치되어 있다. 조사실 문에는 밖에서 안을 감시할 수 있는 렌즈가 붙어 있다. 문에는 안에서 열 수 없고, 밖에서만 열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다.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위장 간판을 내걸었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의 건축물로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1976년 10월 5층으로 완공된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3년 12월 7층으로 증축했다. 2005년 7월 허준영 경찰청장 시절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이름을 바꿨다. 인권 유린의 현장인 남영동 대공분실은 2022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정식 개관을 준비중이다.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조사를 받던 박종철군은 욕조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다. 박종철군이 숨을 거둔 다음날인 1월 15일, 그의 사망 소식이 석간 <중앙일보>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실렸다. 이 사건이 불과 5개월 후 '6월 항쟁'을 촉발시킬 거라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1월 16일 <동아일보>는 박종철군의 사인(死因)으로 물고문이 의심된다는 의사 오연상의 말을 보도했다. 같은 날 박종철군은 벽제 화장터를 거쳐 임진강에 뿌려졌다. 서울대 박종철군 추모제에서 한 학생이 바친 추모시처럼,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죽음"이었다. 아들을 어처구니없이 떠나보내며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말은 두고두고 시민의 가슴을 울렸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정호용 내무부 장관 임명장 수여식 1987년 1월 21일 전두환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악수하는 정호용. 정호용은 전두환, 노태우와 육군사관학교 동기다. 하나회 조직에 가담했고,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특전사령관이 되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 후, 전두환은 사태 수습을 위해 정호용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 정호용 내무부 장관 임명장 수여식 1987년 1월 21일 전두환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고 악수하는 정호용. 정호용은 전두환, 노태우와 육군사관학교 동기다. 하나회 조직에 가담했고,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특전사령관이 되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 후, 전두환은 사태 수습을 위해 정호용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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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군 사건을 덮기 위해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를 했다. 말도 안 되는 해명에 시민이 납득할 리 없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이 된 정호용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때리느냐?"

정호용은 1980년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광주 학살'을 진두지휘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한홍구 교수는 정호용 장관의 이 말을 '개그'라고 표현했으나 정호용의 말은 현재의 시각으로 봤을 때 충분히 문제적인 발언이다. '사람(경찰)이 어떻게 사람(학생)을 때릴 수 있느냐'는 그의 말대로라면,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이 엄연히 존재한 그 사건에서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지 않은 경찰 폭력사가 어디 박종철군 사건 뿐일까.

<동아일보> 김중배 논설위원은 1월 17일 자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칼럼에 이렇게 썼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 주기 바란다."

1월 26일 명동성당 인권 회복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이 성전에서 우선 박종철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 정권에 대해 하고 싶은 한마디 말은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 도대체 있느냐, 아니면 이 정권의 뿌리에 총칼의 힘뿐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회의가 근본적으로 야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국민인 우리에게 이런 정권을 따라야 하는지 않는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의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와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이 쌓이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인내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시민의 소리 없는 분노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4.13 호헌조치와 항쟁의 시작
 
영화 <1987> 장준환 감독 작품으로,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이 되는 2017년에 개봉했다. 스물두 살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6월 항쟁이 전개되기까지 과정을 다뤘다. “모두가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로 7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장준환 감독은 배우 문소리와 부부다.
▲ 영화 <1987> 장준환 감독 작품으로, 1987년 6월 항쟁 30주년이 되는 2017년에 개봉했다. 스물두 살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6월 항쟁이 전개되기까지 과정을 다뤘다. “모두가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로 7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장준환 감독은 배우 문소리와 부부다.
ⓒ 우정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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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와 3월 3일 고문 추방 국민평화대행진이 연이어 열렸다. 2월 7일에는 시간 맞춰 묵념하고 차량 경적을 울리는 방법으로 청년의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를 표시했다.

박종철군 사건을 조작과 은폐로 덮으려 했던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임기 중 개헌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행 헌법에 따라 자신의 후임자에게 정권을 넘기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군부 통치를 이어가겠다는 선포였다.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자 정국이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군부 독재를 끝내기 위한 호헌철폐 투쟁이 일어났다. 야당도 전두환 정권과 타협하려는 세력을 배제하고, 김영삼·김대중을 중심으로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민주 대 독재의 구도가 확연해졌다.

5월 18일 명동성당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조작되었음을 폭로했다. 구속 경찰 2명 외에 박종철군을 죽인 경찰이 3명 더 있고, 경찰 수뇌부가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축소해서 숨겨 왔던 박종철군 사건의 진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1987년 1월 동아일보 해직 기자 이부영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구치소에 있던 이부영은 교도관으로부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수감된 경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박종철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조사실에 경찰 3명이 더 있었고, 경찰이 조직 보호를 위해 두 사람에게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도록 회유·협박했다는 내용이었다.

구치소에서 이부영은 자신이 확인한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정리해서 김정남에게 전했다. 이 내용을 김정남은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전달했다. 이것이 5월 18일 명동성당 미사를 통해 폭로되면서 사회적 분노로 폭발했다. 영화 <1987>이 자세히 묘사한 것처럼, 평범한 사람의 노력과 헌신이 모이며, 역사의 물결이 흐르기 시작했다. 

치안본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했음이 폭로되면서 시위는 확대되기 시작했다. 5월 27일 향린교회에서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발족했다. '국본'은 6월 내내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

국본은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일이자 6.10 만세운동 날에 맞춰, 박종철군 고문살인 규탄을 위한 국민대회를 갖기로 했다.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기로 했다.

이한열 그리고 6월 민주항쟁
 
이한열과 이종창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하는 이종창.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이 촬영한 사진이다. 경영학과 2학년인 이한열과 도서관학과 2학년 이종창은 이날 시위 전까지 서로 알지 못했지만,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 이한열과 이종창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을 부축하는 이종창.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이 촬영한 사진이다. 경영학과 2학년인 이한열과 도서관학과 2학년 이종창은 이날 시위 전까지 서로 알지 못했지만,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 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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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다가왔다. 대학가에서는 6.10 국민대회를 앞두고 시위가 이어졌다. 6월 9일 오후 2시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 민주광장에서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중앙도서관 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학생들은 대열을 이뤄 교문 앞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와 전투경찰의 공방이 치열해지면서 화염병과 돌멩이, 최루탄이 난무했다. 이 과정에서 연세대학교 2학년 이한열이 SY44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이종창이 부축했지만 축 늘어진 이한열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로이터통신 한국 특파원 정태원이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찍은 사진이 <중앙일보>에 실리며 시민들은 큰 충격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 사진은 6월 민주항쟁을 상징하는 결정적 장면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졌다. 민중화가 최병수가 이 장면을 판화로 새겼고,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대형 걸개그림도 제작되었다.

이한열을 부축했던 도서관학과 2학년 이종창은 6월 15일 시위 도중 돌에 맞아 두개골 골절, 뇌좌상을 입고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이종창은 부상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가, 연세대 도서관 사서로, 구산동도서관마을과 파주 가람도서관 관장으로 일했다. 이한열 군 사건이 6월 항쟁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이종창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을 지킨 '도서관인'이 아닐까.

이한열의 중태 소식이 알려지자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6월 10일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날 저녁 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선언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6.10 항쟁의 시작이었다.

주교좌성당이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인 이유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교좌성당은 1987년 6월 10일 저녁 6시, 42번의 종소리를 울리며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국민운동본부(국본)의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주교좌성당의 뒤뜰에 ‘유월민주항쟁의 진원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교좌성당은 1987년 6월 10일 저녁 6시, 42번의 종소리를 울리며 6월 항쟁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국민운동본부(국본)의 국민대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주교좌성당의 뒤뜰에 ‘유월민주항쟁의 진원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는 건 이 때문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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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는 어디서 울렸을까? 주교좌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는 종탑이다. 1987년 6월 10일 저녁 6시 이곳 종탑에서 42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분단 독재 42년을 끝장 내자는 의미였다. 종소리가 울린 후 국본이 주관하는 국민대회가 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주교좌성당 뒤뜰에 있는 표석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6월 민주항쟁 진원지인 주교좌성당은 지금도 낮 12시와 저녁 6시 하루 2번 종소리를 울린다.

6.10 항쟁의 신호탄을 울린 주교좌성당은 당시 지금과 같은 십자가 모양이 아니었다. 제3대 마크 트롤로프(Mark N. Trollope) 주교는 1917년 영국왕립건축협회(Royal Institute of British Architects) 회원이었던 아서 딕슨(Arthur Stansfeld Dixon)에게 교회 설계를 의뢰했다.

아서 딕슨의 설계를 바탕으로 1922년 9월 24일, 정동 2번지 영국대사관 옆 정동 3번지에서 공사가 시작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주교좌성당은 건물의 높은 부분은 서양 기와를, 낮은 부분에는 한국 전통기와를 얹었다. 창문도 한옥 창호 디자인을 적용했다. 서양건축과 전통건축의 조화를 추구한 건물이 주교좌성당이다.

공사비 부족으로 주교좌성당은 처음 계획한 300평 중 173평만 짓고, 1926년 5월 2일 미완성인 채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십자가 평면으로 설계된 성당은 날개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일자(一) 모양으로 공사가 끝났다. 주교좌성당 건축을 주도한 트롤로프 주교는 1930년 일본 고베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사망했다. 주교좌성당 건립에 공헌한 그는 성당 지하에 묻혔다. 그의 무덤은 한양도성 안에 있는 유일한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 대한성공회 100주년을 맞아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결정되었다. 작업을 맡은 이는 건축가 김원이다. 김원은 남아 있는 주교좌성당에 강철과 유리로 지은 공간을 추가하여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성당을 구상했다.

김원이 구상을 피력하자, 당시 책임자였던 신부는 현대적 공간을 추가하는 것보다 최초의 설계대로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성당의 요청에 건축가 김원은 자신의 안과 성당의 안 2가지 설계안을 준비할 테니, 성당에서 최종 결정을 하도록 했다.

아서 딕슨의 설계도가 '기적적으로' 전해진 사연
 
건축가 김원 김원은 아서 딕슨이 설계한 주교좌성당을 최초 설계대로 완공했다. 김원이 딕슨의 설계도를 찾지 못했다면, 주교좌성당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건축사무소 ‘광장’을 연 그는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 국립국악원, 주한러시아연방대사관, 이화여대 신세계관을 설계했다. ‘땅콩집’ 열풍을 일으킨 건축가 이현욱도 ‘광장’ 출신이다.
▲ 건축가 김원 김원은 아서 딕슨이 설계한 주교좌성당을 최초 설계대로 완공했다. 김원이 딕슨의 설계도를 찾지 못했다면, 주교좌성당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건축사무소 ‘광장’을 연 그는 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 국립국악원, 주한러시아연방대사관, 이화여대 신세계관을 설계했다. ‘땅콩집’ 열풍을 일으킨 건축가 이현욱도 ‘광장’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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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은 자신의 구상을 다듬는 동시에, 아서 딕슨의 설계도면을 찾기 시작했다. 아서 딕슨의 설계도면을 찾지 못하면 최초 설계안대로 증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국에 있는 지인을 통해 김원은 1929년 사망한 아서 딕슨이 자신의 유품을 버밍엄도서관에 기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영국으로 날아간 그는 버밍엄도서관을 찾았다. 버밍엄도서관에 가보니, 꽁지머리 히피 스타일 사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원은 꽁지머리 사서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60여 년 전 아서 딕슨이 기증한 설계도면을 구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김원이 보기에 꽁지머리 사서는 미덥지 못했지만 별 수 없었다.

꽁지머리 사서가 먼지를 뒤집어쓰며 도서관 서고를 여러 시간 뒤진 끝에 아서 딕슨의 설계도를 찾아냈다. 딕슨의 설계도를 확인한 김원은 복사가 가능한지 사서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꽁지머리 사서가 이렇게 말했다.

"Why Not?"

정말 고맙다고 감사를 전하는 김원에게 버밍엄도서관 사서는 이렇게 답했다.

"동양의 먼 나라에서 우리나라 건축가를 찾아온 것이 더 고맙다.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도서관은 존재하는 것이다."

'주교좌성당'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완성되기까지
 
십자가 모양의 주교좌성당 1926년 1차 완공 당시 주교좌성당은 공사비 부족으로 십자가 모양으로 완공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예산을 마련하면서 증축 공사에 들어갔다. 1996년 주교좌성당은 건축가 김원에 의해 아서 딕슨의 설계도대로 완성되었다.
▲ 십자가 모양의 주교좌성당 1926년 1차 완공 당시 주교좌성당은 공사비 부족으로 십자가 모양으로 완공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예산을 마련하면서 증축 공사에 들어갔다. 1996년 주교좌성당은 건축가 김원에 의해 아서 딕슨의 설계도대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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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설계도면을 복사해주면서 버밍엄도서관 사서는 자신이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라는 말을 함께 전했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도서관을 방문한 동양인 이용자에게 간절히 찾던 자료를 찾아 건넸기 때문이다.

아서 딕슨의 설계도면을 '기적적으로' 입수한 김원은 자신이 계획했던 현대적 공간을 추가하는 구상을 접었다.

"설계도를 쫙 펼쳐 보니 도면을 자른 표시가 있더라고요. 그때 심정이 어땠을까, 그 표시가 마치 후배 건축가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완성해달라'는 것 같았지요."

김원은 수십 년 전 푸른 눈의 이방인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면대로 성당을 증축하는 것이 '사명'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증축공사 과정도 난항의 연속이었다. 건축재료인 화강암과 벽돌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1994년 5월 27일 증축공사를 시작한 주교좌성당은 1996년 5월 2일 완공되었다. 공사 중단 70년 만에 아서 딕슨의 설계도대로 성당을 완성한 것이다. 산고를 거쳤지만 주교좌성당은 새롭게 증축한 부분이 어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완공되었다. 난공사를 담당한 현장소장은 완공 후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주교좌성당이라는 아름다운 건축물의 완성은 아서 딕슨과 언제 쓰일지 알 수 없는 건축가의 도면을 64년 동안 보관했던 영국의 공공도서관과 설계도면을 기를 쓰고 찾아낸 사서와 멀리 영국까지 날아가 설계도면을 입수한 건축가 김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도서관'이 어떤 기능을 하고, '사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 공공도서관도 버밍엄도서관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수십 년 후 찾아올 '미래의 이용자'를 위해 장서와 자료를 소중히 보존하고 있을까.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된 이유
 
명동성당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당이자 건축물.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김범우의 집터로 이승훈이 세례를 주던 곳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명동성당은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E. J. G. Coste) 신부가 설계했다. 명동성당은 1892년 공사가 시작되어 1898년 5월 완공되었다.
▲ 명동성당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성당이자 건축물.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김범우의 집터로 이승훈이 세례를 주던 곳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명동성당은 약현성당을 설계한 코스트(E. J. G. Coste) 신부가 설계했다. 명동성당은 1892년 공사가 시작되어 1898년 5월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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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항쟁 당일로 돌아가보자. 6월 10일 서울 도심과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는 학생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중산층 시민의 시위 행렬로 메워졌다. 국본은 전국 22개 지역에서 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한 걸로 집계했다.

6.10 국민대회는 일회성 시위로 끝나지 않고, 명동성당 농성 투쟁으로 이어졌다. 6월 10일 도심에서 시위를 이어가던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밀려들었다가 경찰의 봉쇄로 계획에 없던 시위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경찰의 강제 진압 시도가 있었지만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천주교 사제의 강력한 반발, 시민의 호응이 결합하면서 명동성당 농성은 6월 15일까지 이어졌다. 5박 6일 동안 계속된 명동성당 농성을 계기로 '6∙10 항쟁'은 단발성 투쟁이 아닌 '6월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을 상징하는 '민주화의 성지'로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는 전국 16개 도시 150만 명이 참여했다. 시위가 계속 이어지면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이 투입될 거라는 우려도 커졌다. 6월 24일 청와대에서 전두환과 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영수회담이 열렸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이렇게 선언했다.

"해담(회담)은 갤랠(결렬)되었다."

6월 항쟁이 정점으로 치달은 6월 26일, 전국 50개 넘는 지역에서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이날 전국의 거리를 18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점령했다.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 기본권과 언론 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 자율화, 자유로운 정당 활동 보장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항복'인 줄 알았던 이 선언은 훗날 군부 통치를 이어가기 위한 '속이구 선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6월 항쟁을 통해 시민사회는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정치적 개혁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연말에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는 실패했다. '6월 항쟁'이 '6월 혁명'으로 이르지 못한 것은 정치권력의 교체까지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다. 절차적 민주주의 쟁취 이후에도 여전히 민주주의가 화두가 되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7월 5일 뇌사 상태로 중환자실에 있던 이한열이 숨을 거뒀다. 7월 9일 그의 장례는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운구는 신촌로터리, 시청 앞 노제를 거쳐 그가 자란 광주로 향했다. 광주의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아들인 이한열은 5.18 망월동 묘역에 묻혔다.

1987년 6월 항쟁의 열기는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다. 6월 항쟁 이후 문화 분야에도 검열과 판금이 해제되는 조치가 이뤄졌다. 8~9월에는 '아침이슬'을 비롯한 금지가요 686곡이 해금되었다. 9월 1일 영화 시나리오의 검열이 폐지되고, 10월 19일에는 판금 도서 431종이 해금되었다.

대학도서관에서 '폐가제'가 개방적인 '개가제'로 본격적으로 전환된 것도 6월 항쟁 이후 '도서관 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다. 민주화는 도서관 수의 증가뿐 아니라 도서관 장서와 공간, 서비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도서관 앞 광장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앞 광장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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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bookhunter72@gmail.com

사람사이에 조용히 부는 따스한 봄바람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 동물, 책을 좋아하는 고양이 집사입니다. 도서관 사서로 일하다가 지금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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