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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영화 대사가 유행했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금씩이라도 변해 간다. 바위도 깎이고, 불국사 금돼지도 사람 손 닿는 곳만 반들반들 윤이 나게 변하는데, 생명 있는 것은 말해 무엇하랴. 하물며 사람도 나이 듦에 따라 식성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한다. 나도 돌아보면 계속 변해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꽃에 관심도 두지 않던 내가 요즘 유독 꽃에 눈길이 가는 것도 변해가는 모습 중의 하나다.
      
꽃에 눈길이 가다
  
예식장에서 받아와 페트병에 꽂아둔 꽃
 예식장에서 받아와 페트병에 꽂아둔 꽃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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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따님 결혼식에 다녀왔다. 요즘 예식장에서 하는 결혼식은 조금만 늦으면 끝나 버릴 정도로 번개같이 진행되는데, 이번 결혼식은 천천히 여유 있게 진행되는 결혼식이었다. 같이 온 분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진행되는 결혼식을 보는데 유독 식장을 가득 채운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신부만큼이나 예쁜 생화들이 결혼식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식이 끝난 후 저 아름다운 꽃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에 자꾸 꽃에 눈이 갔다.

그런데 식이 끝나고 식사 시간이 되자 하객들이 여기저기서 포장된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물어보니 '예식장에 장식된 꽃들 가운데 원하는 꽃을 가져오면 집에 가져갈 수 있게 포장해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옛날 같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내가 테이블을 돌며 아직 남아있는 꽃들 가운데 예쁜 꽃들을 한 다발이나 챙겼다. 옅은 분홍과 노랑, 하얀색의 장미와 빨간 동백꽃 그리고 안개꽃까지 한 다발 챙겨서 집으로 가지고 왔다.
   
천리향이 남긴 열여섯 살의 기억
  
거실에 놓인 화분들
 거실에 놓인 화분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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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집에 가지고 오니 꽃의 양이 정말 많았다. 꽂을 데가 마땅치 않아 고민하다 페트병 두 개를 잘라 물을 가득 붓고 꽃을 꽂았다. 거실에 꽃이 놓이자 마치 등불이 밝혀진 듯 거실이 환해지고 은은한 향기가 집안에 맴돌았다. 기분까지 꽃처럼 환해졌다.

몇 년 전까지 생화를 사다 꽂아 놓곤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그때부터 화분을 사 거실에 놓아두었다. 그렇다고 화분의 꽃을 살뜰하게 돌보는 것 성격도 아니라 곧잘 죽이기도 했다. 그래도 몇 개의 꽃 화분은 포기하지 않고 가꿨다. 이 모든 변화는 몇 년 사이에 생겼다.
  
앞서 말했든 나는 꽃에 시선조차 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엄마는 옛날부터 꽃을 좋아하고 뭐든지 가꾸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중학생 때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갔을 때, 엄마는 정원에 사과나무 한그루, 배나무 한그루, 여러 종류의 꽃들을 심었었다. 엄마의 정원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는데 중학교 수학여행을 갔다 돌아왔을 때, 그때까지는 맡아보지 못한 아름다운 향기가 코끝을 강렬하게 스쳐 깜짝 놀랐다.

향기에 취한다는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어디서 나는 향이지?' 꽃의 정체를 확인해 보니 그건 우리 집 대문 바로 앞에 엄마가 심은 천리향 나무에서 나는 향기였다. 내가 수학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봉우리이던 꽃이 며칠 새 만발해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맡은 천리향의 향이 뇌에 각인 된 탓인지, 지금까지 나는 천리향의 향만 맡으면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던 열여섯 살의 풍경을 고스란히 떠올린다. 

나이가 들수록 꽃이 좋아지는 이유
  
거실에 놓아 둔 천리향 화분이 겨울을 지나고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거실에 놓아 둔 천리향 화분이 겨울을 지나고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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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뒤 우리 집도 많은 일을 겪으며 그 집을 떠나게 됐다. 나는 가끔 천리향의 향기를 떠올리긴 했어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분을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을 때 천리향 화분도 사서 거실에 놓아두고 봄마다 천리향의 향기를 즐겼다. 그렇다고 '꽃무늬 옷'까지 사는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대체 왜 나이가 드신 어른들은 꽃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일까? 왜 옷 문양까지 꽃무늬 선명한 것들을 좋아하는 걸까? 예전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요즘에는 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건 '생명'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 때문이 아닐까? 살아있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 꽃이 아닌가, 그것도 작은 씨앗에서부터 조금씩 자라는 생명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다가 어느 날 절정의 아름다움을 꽃으로 피워내는 걸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는 절정이 지나면 꽃은 미련 없이 진다. 그게 끝이라면 그렇게 부럽지만은 않을 텐데, 마치 죽은 것 같은 화분이 다음 해에는 다시 생명을 잉태하고 꽃을 피워낸다. 절정을 보인 뒤에 진다 해도 다시 피워 올릴 수 있는 꽃의 '생명력'이 나이 들어가면서 부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이 들어가면 유독 꽃에 눈길이 가고, 꽃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까?

결혼식에서 가져온 꽃다발의 꽃들이 오랫동안 싱싱함을 유지하길 바라면서 얼음까지 넣어주는 수고를 감내하며 하루에 한 번씩 물을 갈아 주었다. 새삼 화병에 꽂혀있는 꽃들을 보다가 문득 '이제는 나도 안개꽃처럼 나이 들어가는 나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꽃을 꽂는 솜씨가 없어도 화려한 꽃송이 뒤에 푹 꽂으면 꽃 전체를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꽃, 어느 꽃과도 다 잘 어울리면서 모든 꽃을 감싸 안는 꽃, 튀는 주인공을 욕심내지 않고 주인공을 받쳐주는 배경으로 만족하는 안개꽃,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아름다운 청춘들의 배경이 되는, 그런 안개꽃처럼 나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예식장에서 가져온 꽃이 질 때쯤 화분의 천리향이 꽃을 피웠으면 좋겠다. 우리 안개꽃처럼 나이 들어가실래요?
 
안개꽃은 어디에, 어떻게 꽂아둬도 아름답다
 안개꽃은 어디에, 어떻게 꽂아둬도 아름답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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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블로그 < 바오밥스토리아카데미 >와 < 브런치 >에도 실립니다.


태그:#결혼식, #꽃, #꽃 키우는 즐거움, #안개꽃, #꽃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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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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