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4 18:41최종 업데이트 20.02.0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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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음식은 다른 투숙객들이 보면 그래서요. 밖에서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호텔에 배달온 나를 발견한 보안요원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손님은 호텔 1층으로만 주소를 적었고, '출입이 안될 수도 있으니 전화달라'는 메모는 남기지 않았다. 배려없는 손님에 짜증이 나 있는데 한 겨울에 밖으로 나가라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음식이 아니라 호텔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치워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감정은 꿈틀거렸지만, 기분 나빠해도 되는 정도의 문제인지, 과도한 피해의식은 아닌지 망설여졌다. 화를 낼까 생각해보다가 로비안에서 소란이 나면 이 공손한 젊은 보안요원이 곤란해질 터였다.  


하루는 경비가 현관문을 지키고 배달원들을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태우는 고급아파트로 배달을 갔다. 멀쩡한 엘리베이터가 네 개나 있는데 굳이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탈 필요가 없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 생각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탈 수 없다고 하고, 손님에게 전화해서 올라갈 수 없으니 1층에서 받아 가시라고 안내했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손님은 화가나 있었다.  

"화물용 타면 되지, 뭐 이따위 이유로 사람을 오라 가라 해"     

그 사람은 내게 욕설까지 했다. 내가 왜 욕을 하느냐고 따졌더니 보안요원을 향해 경찰에 신고하라고 외쳤다. 보안요원과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주말 같은 아파트에 또 배달을 갔다. 근처에만 가도 속이 울렁거리지만 먹고살려면 할 수 없다.

하필 배달해야 할 곳이 이 아파트 외에도 네 군데나 있었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든 그냥 엘리베이터든 가릴 여유가 없었다. 실랑이를 하는 순간, 네 군데의 가게와 네 명의 손님에게 욕을 먹을 터였다. 다른 배달원도 황급히 뒤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톱니바퀴처럼 사람과 시간에 떠밀려 지저분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려올 때는 주민들이 쓰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유치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옛 어른들이 먹고살려면 '간이랑 쓸개' 빼고 살라는 것도, '모난 놈이 정 맞는다'고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삶의 경험에서 나온 교훈일 것이다. 일상의 부당한 일들은 너무 많고 하나하나 고치려고 덤비다 보면, 내 삶이 망가진다.

세상을 움직이는 톱니바퀴를 멈추는 송곳이 튀어나오면 나의 삶은 물론 톱니바퀴가 돌아야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친다. 게다가 그 송곳이 찌르는 곳은 이 사회의 권력자보다는 내 주변 사람들이나 같은 처지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배달하는 사람에게 소리치는 것은 건물주가 아니라 비정규직 보안요원이나 은퇴한 경비아저씨다.  

PC함이 만드는 '통합과 화합의 정치'
  

“우한 교민을 따뜻하게 포용하자”는 아산시민의 여론이 SNS 등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 페이스북 갈무리

 
차별과 혐오, 사회의 통념에 반기를 드는 것은 지배자들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프로불편러' 'X선비' 'PC충' 같은 비하적 표현들을 만들어냈다. 다 참고 사는데, '제 잘난' 맛에 살며 사람을 가르치려드는 몇몇 관종들 때문에 다수가 피해를 본다는 논리다. 여기엔 문화적 자본을 가지고 잘난체하는 위선적인 지배계급에 대한 조롱도 담겨있다. 통상의 편견에 기반한 '혐오'가 표가 되고 우파 정치인들의 토양이 되는 또다른 이유다. 편견은 덜 피곤한 행위다. 급기야 PC함이 진보의 성장에 방해가 된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에서 비롯된 인종혐오, 변희수 하사의 전역 이후 쏟아진 트랜스젠더 혐오에 맞서는 움직임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정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우한교민을 환영한다'는 아산 시민들의 SNS 인증은, 'PC충'이라고 비난받아온 이들이 만드는 통합과 화합의 정치를 보여준다.

'정치적인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즉 PC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SNS에서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전시하거나, 교양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고 주목받기 위해 혐오와 차별을 멈추자고 하는 게 아니다. 인종, 성적지향, 나이, 자산, 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우리 사회가 만든 최소한의 합의다. 이것은 통합의 논리이자 보편성의 논리다. 무엇보다도 여러 소수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저항의 창구이자 존재증명의 창구이기도 하다.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집회와 점거다.  

그렇다면 PC충의 문제라고 하는 것들은 민주주의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일 뿐 특별히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소란을 감당할 수 있는가? 다행히도 우리는 이 값비싼 민주주의를 조금씩 짊어지고 앞으로 나가고 있다.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저항하며 살아가는 것은 위선이나 내로남불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민주주의의 진짜 얼굴일 것이다. 이 얼굴을 비추는 정치가 혐오가 아니라 공감과 연대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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