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11일 NCAA 대학농구 경기 후반전에 짐 왓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 전 LA레이커스 선수.

지난해 1월 11일 NCAA 대학농구 경기 후반전에 짐 왓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 전 LA레이커스 선수. ⓒ AP-연합뉴스

 
통산 5개의 우승반지를 가진 전 농구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가 헬기사고로 사망했다.

ESPN 등 복수의 현지매체는 27일(이하 한국시각) 미 프로농구(NBA)의 레전드 슈퍼스타 코비 브라이언트가 캘리포니아주 칼라바사스에서 추락한 헬기에 탑승해 있었고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슬하에 네 딸을 두고 있는 코비는 농구에 가장 재능이 있는 13세의 둘째 딸 지아나와 함께 농구를 하기 위해 자신의 체육관으로 향하던 중 변을 당했다.

1996년 NBA 데뷔 후 LA레이커스에서만 20시즌 동안 활약한 코비는 2008년 정규 시즌 MVP와 두 번의 파이널 MVP, 올스타18회 선정 등 누구보다 화려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코비는 지난 2017년 자신이 현역시절에 사용했던 등번호 8번과 24번이 모두 레이커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NBA 역사상 한 선수의 번호 2개가 영구결번이 된 것은 코비가 역대 최초로, 그만큼 그는 2000년대 레이커스와 NBA를 상징하던 슈퍼스타였다.

파이널 3연속 우승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불타는 승리욕의 화신

이미 고교 시절부터 '천재'로 불리던 코비는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된 후 트레이드를 통해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었다. 코비는 프로 입단 후 두 시즌 동안 주전이 아닌 식스맨으로 활약했지만 1997-1998 시즌 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일찌감치 스타의 기질을 보였다(1998년 올스타전에서는 레이커스의 주전 슈팅가드 에디 존스와 백업 슈팅가드 코비가 동시에 올스타에 뽑혔다). 

3년 차 시즌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한 코비는 4년 차가 되던 1999-200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그리고 레이커스 역시 코비의 성장과 함께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코비는 매직 존슨이 활약하던 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 시절에도 이루지 못한 쓰리핏을 달성하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3연패 기간 동안 파이널 MVP는 모두 '공룡센터' 샤킬 오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시카고 불스 왕조의 최고 조연 역할에 만족했던 스코티 피펜과 달리 승부욕이 넘치는 코비는 오닐의 조력자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코비의 지나친 투지는 오닐과의 불화로 연결됐고 결국 오닐은 2004년 7월 트레이드를 통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했다. 코비는 그토록 바라던 1인자가 됐지만 오닐이 빠진 레이커스의 전력은 급격히 약해졌고 코비는 2006-2007 시즌과 2007-2008 시즌 연속 득점왕에 오르고도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코비의 불타는 집념은 끝내 2008-2009 시즌과 2009-2010 시즌 레이커스를 파이널 우승으로 이끄는 업적을 만들었다. 코비는 2009년 파이널에서 32.4득점, 2010년 파이널에서 28.6득점으로 두 시즌 연속 파이널MVP에 선정되며 우상인 마이클 조던과 라이벌(?) 샤킬 오닐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2010-2011시즌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독일병정' 덕 노비츠키가 이끄는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4연패로 무너졌다.

승리에 대한 코비의 집념은 국제대회에서도 빛을 발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리딤팀'으로 불리던 미국 대표팀에 합류한 코비는 "올림픽 금메달이 NBA 파이널 우승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을 남기고 실제 미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코비는 4년 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대표팀의 최고참으로 올림픽에 참가해 미국의 대회 2연패 주역으로 활약했다. 

NBA 최초 등번호 2개를 영구결번으로 만든 레이커스의 영원한 전설

물론 코비의 삶에 언제나 영광만 함께 했던 것은 아니다. 코비는 파이널 3연패를 달성한 후 농구선수로서 전성기를 맞고 있던 2003년 성폭행 혐의로 피소돼 경찰에 체포됐다. 물론 치열한 법정공방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민사소송도 비공개로 합의했지만 코비는 스폰서와의 계약이 해지되고 한동안 경기장에서 팬들의 야유를 받는 등 도덕적으로 커다란 흠을 남기고 말았다.

코비를 상징하는 승리에 대한 투지 역시 전성기가 지난 후에는 오히려 '탐욕'으로 폄하돼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실제로 코비는 30대 중반이 다가오면서 필드골 성공률이 급격히 떨어졌음에도 여전히 리그에서 가장 많은 슛을 시도했다. 그리고 팀의 리더임에도 코트 위에서 실수를 하는 동료들을 나무라는 장면이 여러 차례 목격되면서 레이커스의 팀워크에도 악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비는 코트 위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이 넘치는 선수였다. 실제로 코비는 2012-2013 시즌을 끝으로 더 이상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지 못했음에도 언제나 파이널을 치르듯 진지하게 경기에 임했다. NBA팬들도 그런 코비의 열정 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코비는 무릎부상으로 6경기 출전에 그쳤던 2013-2014 시즌을 포함해 은퇴할 때까지 무려 17시즌 연속 올스타에 선발됐다.

코비는 2016년 4월 13일에 열린 유타 재즈와의 은퇴 경기에서 무려 60득점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코비다운' 마무리를 하고 홈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NBA 역대 최초로 등번호 2개가 영구결번이 된 코비는 2018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 작업에 참여한 <디어 바스켓볼>을 통해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코비는 은퇴 후에도 팀에 유망주들이 들어올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레이커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사망 하루 전 르브론 제임스가 자신의 득점 기록(33,643점)을 경신했을 때는 SNS를 통해 축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은 코비 사망 후 성명을 내고 "코비는 친동생 같았다. 내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며 슬픔을 나타냈다. 코비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전 세계 농구팬들의 마음도 조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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