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소중한 추억이 참 많지만, 그 중에 빠질 수 없는 게 '계몽사 소년소녀 명작 동화집'이었다. 서울 구석진 동네에 살던 아이는 동화책들을 읽으며 세상을 향한 눈을 틔웠다. 물론 그 세상에는 주로 라플란드의 요정과 첨탑 위에서 물레를 빚는 마녀 등등이 살았지만. 그 중에 <의사 둘리틀 선생>이 있었다.

퉁퉁한 덩치에 작고 동그란 안경을 걸친 사람좋게 생긴 의사 선생님은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큰 정원이 있는 그의 집은 언제나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물들로 붐볐다. 사람들 치료하지 않기에 빈털털이가 되어 구멍난 양말을 신어야 하는 형편이지만, 지하실 작은 굴까지 생쥐 손님들로 가득찬 둘리틀 선생. 아프리카 원숭이들이 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둘리틀 선생은 그의 동물 친구들과 함께 먼 왕진 여행을 떠난다. 동화책은 이렇게 시작되는 둘리틀 박사와 동물 친구들의 모험담이었다. 

'닥터 두리틀'이 된 로다주
 
 영화 <닥터 두리틀> 포스터

영화 <닥터 두리틀>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그때 그 둘리틀 박사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이하 로다주) 버전 영화로 돌아왔다.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닥터 두리틀>이다. 

<아이언맨>에서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를 보여준 로다주였기에 '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엠마 톰슨, 라미 말렉 등 여러 할리우드 배우들이 목소리로 출연해 힘을 더했다. 그러나 쉬지 않고 쏟아놓는 두리틀 선생의 달변, 그리고 허허실실 연기는 <아이언맨>의 로다주와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아이언맨>의 로다주가 그리워지는걸까? 왜 연기는 로다주가 하는데 자꾸 조니 뎁이 떠오르는 걸까. 작품 때문일까? 연기 때문일까?

<닥터 두리틀>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 영화의 전통을 고수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고 인간도, 동물도 치료하는 것을 거부하고 두문불출 칩거하는 두리틀 선생으로 영화는 막을 올린다. 원숭이가 열병에 걸렸다고 해서 아프리카까지 왕진을 떠나는 원작의 두리틀 선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 아닐까 싶다.

여느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듯, 극 중에서 두리틀 선생이 질색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위기에 봉착한 두리틀 선생은 동물들과 대화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위기를 타개하고 목숨이 위험해진 영국 여왕을 구해주기 위해 미지의 세계에 있다는 식물을 구하러 간다.

동물들과 대화하는 의사 선생님 설정인 만큼 <닥터 두리틀>의 동물 캐릭터들 역시 화려하다. 원작에서도 등장한 183살 앵무새 폴리네시아를 비롯해, 원숭이 치치, 개 지프, 오리 댑댑 이외에도 추위를 타는 북극곰, 겁이 많은 고릴라와 타조, 기린, 조수 토미가 데려온 다람쥐까지. 마치 '어벤저스' 군단과도 같은 동물들은 영화에서 각자 자신의 몫을 해낸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 영화?

원작에서 앵무새는 둘리틀 박사에게 동물의 말을 가르쳐 주고 오리는 꼼꼼하게 살림을 맡고 올빼미는 회계를 담당하고 참새는 소식통 노릇을 했다. 독특했던 원작의 동물 캐릭터들은 영화로 오면서 할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들로 변했다. 꼼꼼했던 오리가, 수술하는 두리틀에게 파를 갖다주는 모자란 행동을 하는 식이다. 특히 두려움에 떨다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뒤, 위기 상황에서 두리틀 박사의 목숨을 구하는 고릴라가 대표적이다. 겁많고 소심했던 캐릭터가 어떤 계기로 용감해진다는 스토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장담이다.

섬에 갇힌 닥터 두리틀의 목숨을 위협하던 호랑이의 '마더 컴플렉스' 역시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왕의 방에서 특파원 노릇을 톡톡히 한 문어라든가, 대벌레의 존재감은 색달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다소 평범해 보였다.

<둘리틀 선생의 바다 여행> 속 내용을 참조한 듯 영화에는 고래까지 출연해 박진감을 더했다. 모험은 그럴 듯하지만 난파선 잔해에서 유리병 조각으로 면도를 했다는 원작 '둘리틀' 선생의 넉넉함은 로다주표 액션 어드벤처가 대신했다. 또한 두리틀의 동창이라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왕실 주치의의 도발은 치졸한 수준이었다. 사랑하는 딸을 두리틀에게 빼앗긴 아버지의 복수는 어설픈 감동 스토리로 마무리돼, 갈등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가족영화임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대목이었다.
 
 영화 <닥터 두리틀> 스틸 컷

영화 <닥터 두리틀> 스틸 컷 ⓒ 유니버설 픽쳐스

 
로다주는 <아이언맨>에서 보여준, 때론 한없이 가볍다가도 어느 순간 감정을 울리는 그 연기의 폭을 <닥터 두리틀>에서도 여지없이 선보인다. 하지만 비슷한 캐릭터인데 두리틀은 '아이언맨'의 기성품같다. 로다주는 지금까지 <아이언맨>을 제외한 <셜록 홈즈> 시리즈 등에서는 늘 예의 <아이언맨>에 미치지 못하는 틀에 박힌 캐릭터를 답습해 왔고, 아쉽게도 <닥터 두리틀>의 두리틀 캐릭터 역시 그렇다. 더욱이 아쉬운 것은 그런 그의 로다주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예측되는 연기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이래로 트레이드 마크를 넘어 박제가 되어가는 조니 뎁의 연기와 같은 잔상을 남긴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과 함께 가서 두어 시간 재밌게 보내기에 나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로다주에 대한 기대를 품고 간 사람이라면 어쩐지 이보다는 영화를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인스턴트'의 향기를 느끼고 돌아설 것이다.

아쉬운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로다주와 동물들이 평범한 캐릭터를 변주하는 가운데, 뜻밖에도 사냥꾼 집안에 태어나 동물을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아이 토미 스터빈스(해리 콜렛 분)가 스스로 조수가 되어가는 성장 스토리는 울림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닥터 두리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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