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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과수원에서 일하다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팔을 다치셨다.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맨 얼굴에 안경을 쓰고 병문안을 갔다. 깁스를 하게 되어서 밥은 어떻게 해 먹을지 걱정이라고 하더니, 태평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조심하지 않고 허둥지둥하다 넘어졌다며 속상해했다. 엄마와 병실을 같이 쓰는 분들에게 요구르트를 돌리면서 인사를 하자, 한 할머니가 나에게 "총각 고맙데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웃으면서 내 기분을 살폈고 내 성별을 잘 못 짚은 할머니는 곤란해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젠 필요할 때마다 원하는 성별을 선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하기까지 했다. 화장을 안 하고 나온 날 일부 사람들은 나를 남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성별에 얽매여서 사람들을 가리지 않아도 될 것이고, 여성스럽게 행동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관련 기사 : 어느 날, 긴 머리를 잘랐다 http://omn.kr/1mcqx)

머리가 짧아지니 무례한 사람에게 기선제압을 하는 것도 수월했다. 표정을 조금 딱딱하게 지어주면 긴 머리 시절일 때보다 쉽게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젊은 여성일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달라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나에게 자신감이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짧은 머리는 여러모로 편리했다.

내 주변에도 쇼트커트를 한 친구들이 있다. 그중 J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20대 초반, 진한 화장에 킬힐은 J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자신이 풍기는 이미지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커피우유를 먹을 때 우유갑에 어울리는 빨대 색을 고르고, 약간 빈틈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밴드를 손등에 붙였다. 그러던 그가 10년 동안 점점 편한 옷과 낮은 운동화를 구비하더니 어느새 머리를 싹둑 잘랐다. 머리를 그렇게 자른 후 그는 거의 립스틱만 바르고 다닌다. 어느덧 간단한 연출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J가 멋있다.

길을 다녀보면 쇼트커트 스타일을 한 여성을 하루에 한 번 보기도 쉽지 않은데, 친구랑 둘이 같은 머리를 하고서 나타나면 웃음이 터진다.

혼자 다닐 때는 눈에 띄지 않지만, 두 명이 함께 있자 '나를 함부로 대하거나 멋대로 넘겨짚지 마시라' 이렇게 주장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함부로 말하고, 생각을 지레짐작한다.

명절에 집에 갔는데 친척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세련된 스타일이라며 칭찬해주는 분도 있었지만 '남자 같은 스타일을 했다'며 지적하는 분도 있었다. 어떤 친척은 아주 집요하게 내 심기를 건드렸다.

친척 : "사람들이 머리 자른 거 보고 뭐라고 이야기 안 하니?"
: "별말 안 하는데요."
친척 :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짧은 머리를 안 하니까 뭐라고 할 것 같은데"
: "제 주변 사람들은 크게 신경 안 쓰던데요." 
친척 : 그래도 사람들이 관심 가지니까 좋지? 그렇게까지 짧게 자르는 건 솔직히 주목받고 싶어서 자른 거잖아.
: (짜증스럽게)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가 젊은 여자라고 무례하게 대하는 게 싫어서 강하게 보이려고 자른 거에요.


의미 없는 대화는 막을 내렸지만 그분은 계속 옆 사람에게 수군거렸다. 나는 친척들이랑 예민해질 만한 대화가 시작되면 금세 짜증을 부리는데, 그쪽에서도 지치지 않는 게 대단하다. 별생각 없이 자른 머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되었다. 쇼트커트를 한 채로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 수는 없을까.

피곤했던 친척들과 만남 후 아프리카댄스 학원에 갔다. 정수리 부분만 머리를 땋고 아래쪽은 밀어낸 사람을 보며, 뒤통수에 진 주름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거친 파마머리를 한 사람도 보았다. 구릿빛 피부에 새카만 머리칼이 건강해 보였다. 밝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의 머리를 보면서 다음번엔 어떤 머리를 해볼지 생각했다. 지난 공연에서 봤던 댄서처럼 나도 레게머리를 하면 에너지가 넘쳐 보일까? 나의 얼굴에 레게머리를 합성해서 떠올려보았다. 으... 엄청 이상할 것 같다. 역시 그런 스타일은 사람들 눈을 잘 마주치고, 이를 드러내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겠지.

신이 나서 추임새를 넣으면서 춤을 추는 선생님을 보았다. 또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아까 배운 동작이 이게 맞았던가?' 하고 삐걱거리면서 춤을 추는 모습도 보았다. 사람들이 너무 귀여워서 헤헤헤 웃었다. 아무리 수줍음을 많이 타도, 주어지는 모든 일을 어설프게 마무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인생 하나만 제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닌가? 엄마의 어리바리한 표정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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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 권눈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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