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헤로니모> 포스터

다큐멘터리 <헤로니모> 포스터 ⓒ 커넥트픽쳐스

 
때론 우연이 필연을 낳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의 전후석 감독이 그런 경우다.
 
재외동포로 뉴욕에 거주하는 변호사 전후석은 2015년 12월 쿠바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한인 4세 쿠바인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게 된다. 전 변호사는 자신을 태운 택시기사의 할아버지가 에네켄(선인장) 농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낀다. 이후 그녀의 가족 모임에 초대를 받으면서 그 가족의 위대함을 접하게 된다. 

놀랍게도 그녀의 아버지 헤로니모 임은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했던 유일한 한인 출신 혁명가였다. 또 그가 죽음을 맞기 전 15년이란 시간을 한인들의 결속과 정체성을 찾는 데 바쳤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당시 해외거주자로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전후석은 헤로니모 임(임은조)의 삶을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들의 정체성을 짚어보기로 한다. 결국 우연이 <헤로니모> 감독 전후석이라는 필연을 만들어낸 것이다.
   
"묵서가(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다. 부자가 많고 가난한 이가 적으니, 젊은 한인들이여, 어서 오라"
 
1900년 초 신문광고에 속은 1033명의 한인이 '미국 옆에 있는 나라니 부강한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멕시코행 배에 오른다. 그 중에는 당시 만 2세였던 헤로니모 임의 아버지 임천택도 있었다. 농장에서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이어가던 한인들은 계약기간인 4년을 다 채운 뒤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1910년 들려온 한일합방 소식에 돌아갈 고국을 잃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스틸 컷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스틸 컷 ⓒ 커넥트픽쳐스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디아스포라' 헤로니모 임의 가족은 멕시코에 남기로 한다. 이후 1921년 3월 15일 헤로니모 임의 가족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마나시 항구를 통해 쿠바의 농장으로 이주한다. 헤로니모 임의 아버지 임천택은 없는 살림에도 쌀 한 숟가락씩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는 등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다. 더불어 한글교육을 하는 등 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다.  
 
쿠바에서의 생활도 멕시코 농장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헤로니모도 대부분의 한인아이들처럼 초등학교를 마치고 농장에서 일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학업에 대한 열의를 버리지 않고 공부해 한인 최초 대학생이 된다. 헤로니모는 아바나 법대 동기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혁명의 중심에 선다. 혁명 성공 후 체 게바라와 함께 일하며 산업부 차관으로 사회주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사회주의가 모두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되면서 헤로니모 임의 이상과 꿈도 좌절된다.
 
헤로니모 임은 두 개의 조국에서 두 개의 꿈을 살다 간 '디아스포라'다. 그는 쿠바 혁명을 통해 이상을 실현하려던 이상주의자였고 그 꿈이 좌절되자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새로운 희망과 변화'로 바꾸어 내고 자신의 정체성을 한인의 뿌리에서 찾으려 한 또 다른 의미의 혁명가였다. 

헤로니모는 1995년 쿠바 한인 대표로 생애 처음 한국 땅을 밟는다. 아버지 임천택이  독립유공자여서 아버지의 조국에 초청된 것이다. 헤로니모는 조국의 산천을 밟은 뒤 새로운 삶을 구상한다.

한인회 부활과 한인 정체성을 되찾으려 한 그의 15년 간의 노력은 서서히 열매를 맺고 있다. K-콘텐츠와 한국의 위상은 한인 3, 4세들이 한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만들었다. 한인 후손들은 한글을 배우고 아리랑, 고향의 봄, 만남을 부르며 한인의  정체성을 확인힌다. 한인의 피가 1% 섞여 있어도 자기는 한국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스틸 컷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스틸 컷 ⓒ 커넥트픽쳐스

 
유럽 미대륙, 아시아 등 전 세계에 800만 명의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존재한다고 한다. '다이스포라'는 현지인이면서 유랑인이고,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한편으론 부유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혼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조국,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00년 이상 '디아스포라'의 고통 속에서도 한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던 헤로니모 임 가족과 쿠바 한인의 삶은 남북 분단 70여년을 맞아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어떻게 하나의 민족정체성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전후석 감독이 쿠바 한인 헤로니모의 삶을 통해 '디아스포라'들이 어떻게 고통을 승화시키고 공간과 시간을 벽을 뛰어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헤로니모 임의 아버지 임천택은 독립유공자로 현충원에 안장되어있다. 인생 전반기에 쿠바를 조국으로 여기며 쿠바 혁명에 함께하고 공을 세워 9개의 훈장을 받은 헤로니모는 쿠바 유공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스틸 컷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 스틸 컷 ⓒ 커넥트픽쳐스

 
헤로니모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