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은 어찌 생각하면 역설적인 영화다. 뇌수술을 앞둔 진무는 수술 후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기억해야 될 것들을 캠코더에 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캠코더에 담기는 장면들이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제목부터 ‘작은 빛’이니 빛과 같은 찬란한 순간들을 진무가 촬영하지 않을까 여긴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기는 건 곰팡이 핀 벽이나 어두운 방, 무표정한 가족들이다. 떠나고 싶어지는 공간이고 만나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얼굴이다. 영화가 지닌 진정한 역설은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이런 공간과 얼굴 속에서 느껴지는 가족의 따스함과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마음을 자극한다.
영화가 품은 가족에 대한 따뜻함은 기억과 소멸이란 작품의 주제와 연관되어 있다. 진무는 어쩌면 기억이 소멸될 수 있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그는 잊혀서는 안 될 소중한 기억을 담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오래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먹서먹한 가족들과 만난다. 이 과정은 소멸을 이겨내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진무의 가족은 영화 속 낡은 집의 모습과 같다. 크고 좋은 집처럼 산뜻하지도 쾌활하지도 않다. 어둡고 좁은 집처럼 분위기는 축 처지고 서로 대화도 많지 않다. 하지만 작고 오래된 집에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포근하고 안락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함께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고 따스함을 느낀다.
이런 감정은 진무가 아버지를 다시 기억해내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흩어져 지냈던 가족을 다시 추억하는 순간 기억 속 잊힌 존재인 아버지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가족이 다 같이 모인 산소에서의 무덤 장면은 이런 기억과 진무가 마주한 순간으로 기억의 탄생과 소멸, 다시 기억해내는 과정을 통해 가족의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영화의 느낌은 어둠 속을 비추는 작은 빛처럼 밝고 따뜻하다. 이를 가족을 통해 풀어내며 사랑을 느끼게끔 만든다. 이 속에서 감독이 찾고자 하는 건 존재이다.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내며 인간의 존재 이유를 기억에서 찾아낸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나는 나라는 존재로 자리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캠코더를 통해 기억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인 아버지와 마주한다. 이 부분에서 아련함이 느껴지는 건 아버지는 땅에 묻힌 게 아니라 마음에서 아예 묻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화가 말하는 ‘작은 빛’은 기억일 것이다.
아주 작은 순간이지만 그 사람과 함께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면 찬란하게 빛나는 추억을 통해 잊지 않을 수 있다. 진무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존재의 큰 의미 중 하나인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이는 관객들에게 과연 우리는 어떤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지,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될 작은 빛이 사라진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작은 빛>은 이미지를 통해 주제의식을 확고히 정립하는 영화다. 카메라는 한 순간도 들뜨지 않고 담담하게 인물을 조명하며 이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보다는 느끼고 스며들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어둠을 밝히는 작은 빛처럼 관객들의 마음에 작지만 환한 빛을 비치는 이 영화는 다양성 영화가 지닌 실험과 공감의 가치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