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아버지의 대를 이어 초상화를 그리는 여성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 분)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아델 하에넬 분)의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당시 유럽 귀족 사회에서는 결혼 전 신부의 초상화를 정혼자에게 미리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 측이 보낸 초상화 덕분에 약혼자의 생김새의 파악할 수 있지만 여자는 정말 신랑 얼굴 한번도 보지 못하고 결혼해야 했던 셈이다.

엘로이즈는 아버지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백작부인(발레리아 골리노 분)의 부탁으로, '억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엘로이의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는 포즈 잡기를 거부하는 그를 몰래 관찰하며 그림을 완성해야한다. 작업을 위해 엘로이즈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마리안느와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기는 엘로이즈 간에 미묘한 시선이 오간다. 그렇게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막이 오른다. 

최근 전 세계 영화제 및 영화 시장에서 지지와 호평을 받은 로맨스 영화들 중 동성애를 다루는 작품들이 많다. <캐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대표적이다. 이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역시 두 여성의 사랑을 밀도 있게 보여주면서도 페미니즘, 여성 연대, 예술가와 뮤즈 간의 관계, 예술 혹은 영화가 취해야할 윤리적 태도, 시선의 문제에 대한 많은 질문거리를 던진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그린나래미디어(주)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당대 유명 화가로 주목받은 아버지 못지 않은(혹은 뛰어넘는) 재능과 능력이 있지만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각종 예술 활동에서 배제된다. 결혼을 거부하고 자결을 택한 것으로 추측되는 언니의 모진 운명을 물려받은 엘로이즈는 '평등'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엘로이즈는 적어도 수도원 내에서는 계급을 불문하고 모두가 평등할 수 있기에 수도원에서 지내던 시간을 그리워 한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자신 못지 않게 주체적인 삶에 대한 의지가 확고해보이는 마리안느에게서 일종의 해방구를 찾게 된다. 

적지 않은 여성들을 화폭에 담았던 마리안느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인물과의 별다른 교감 없이 훔쳐보기 혹은 몰래보기 식으로도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이는 마리안느뿐만 아니라 동시대 예술가들이 흔히 범했던 오류다. 영화는 과거 남성 예술가들이 사람을 그릴 때도 자신의 예술적 도구, 대상 정도로만 간주했을 뿐 동등한 입장에서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짚는다. 

여성이긴 하지만 마리안느도 아버지를 비롯한 남성들에게서 그림 교육을 받고 연마 했다. 그가 첫 번째 초상화를 완성할 때까지만 해도 (작품 안에서 자기가 모든 걸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기존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당신이 그린 초상화는 나와 비슷하지 않고 당신과도 닮지 않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로 인해 그간 가지고 있던 마리안느의 예술적 아집과 관념들이 산산조각 부서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엘로이즈를 일방적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닌, 엘로이즈와 시선과 감정을 동등하게 교류하면서 함께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예술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또한 동등한 시선과 감정이 오가야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속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누가 상대를 더 좋아하고 바라보나의 차원을 떠나 동등한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서로의 선택을 지지한다. 

이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뿐만 아니라 그녀들보다 계급이 낮은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 분)과의 관계에서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엘로이즈의 어머니인 백작부인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소피, 마리안느, 엘로이즈는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같은 침대에 눕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티케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가열찬 토론을 이어나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가 정면을 마주하고 앉은 신이었다. 소피는 십자수를 하고 마리안느는 와인을 따르며 그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엘로이즈는 요리를 한다. 각각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위치에서 이야기를 동등하게 주고 받고 그들 각각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뒤바꾸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었다. 이러한 일상을 다룬 영화와 예술 작품은 지금까지도 많지 않았다. 더구나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한 프레임 안에서 어느 한 인물에게 치우치지 않고 균등하게 세 사람을 담았다. 여성들의 탈 권위와 쌍방향 소통이 두드러지는 마법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캐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이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까지, 유독 퀴어 로맨스를 다룬 영화 작품들이 최근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이성애를 기반으로 했던 멜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관계의 평등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자신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갈구 하지도 않고, 상대방이 자신을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애써 상대를 앞지르거나 짓누려 하지도 않고, 그녀를 배려한다고 억지로 뒤로 물려 서지도 않는다. 그녀들에게 사랑이란 각자의 감정에 충실 하면서도 동등한 시선, 위치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결말을 두고 혹자는 시대의 한계와 질서를 넘지 못한 순응적 태도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 또한 여성들의 주체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한편 영화는 여성 감독, 여성 배우, 여성 촬영 감독 등 훌륭한 여성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각본, 연출은 물론 영화가 지향해야 할 윤리적 태도, 시선까지 완벽에 가까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시대의 명작으로 기억될 페미니즘 영화다. 16일 개봉.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 아델 하에넬 노에미 메를랑 여성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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