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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말]
분명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했다. 월요일로 예약 날짜를 정할 때만 해도 어깨선에 닿는 머리카락이 덥수룩해 보였고,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거 같았다. 막상 3일 뒤 아침, 거울을 보니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예약을 했으니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머리 스타일은 별로였으니까. 퇴근 후 예약한 곳을 방문했다.

15분 후 그대로 문을 열고 나왔다. 염색·파마·커트를 2년째 맡기던 곳이다. 그런데 원장님은 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겠다고 했다.

"계속 기르실 거라고 했죠? 지금도 괜찮아요. 한 달쯤 후에 뒷머리가 더 자라면 뒷머리를 잘라주고 길이감 맞춰가면 될 거 같아요." 
 
 16년차 헤어디자이너 최순희(38)씨다.
 16년차 헤어디자이너 최순희(38)씨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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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에 파마를 하는 건 어떨까 묻자, 아니란다. 반 곱슬이니 그냥 다듬기만 하면 기르는데 지장이 없을 거란다. 나한테만 그랬던 걸까? 미용실 리뷰를 찾아봤다. 이곳은 포털사이트를 통해 예약을 받고 있는데, 324명의 실제 이용자가 리뷰를 남겼고 이 중 320명이 5점 만점을 줬다. 최근 평들이다.

"염색+커트 하러 갔는데~ 정말 양심적으로 염색은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해주시고, 정말 필요한 시술만 해주셔서 감사해용." (jru1****2020.01.02. 방문)
"이익을 보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제 만족도를 신경 써주시는 디자이너 선생님이라서 너무 감동입니다."(gool****2019.12.11. 방문)


그로부터 한 달 뒤, 커트를 마친 후 인터뷰 섭외 요청을 건넸다. 카톡으로 답을 듣기로 했다. '천천히 답을 주셔도 된다'라고 했지만 어지간히 답이 오지 않았다. 5일 후 '하겠다'라는 답이 왔다.

어떤 지점에서 고민했냐 묻자 "홍보성 기사로 읽힐까봐 걱정됐다"라고 했다. 그래도 "이 일을 한 지 2020년이면 16년찬데, 지난 시간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응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미용실 이름은 기사에 쓰지 말아 달라"고 했다. 

2년 만에 처음 안, 원장님의 성은 '최'씨였다. 최순희(38)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월 23일, 성신여대 인근에 위치한 그의 미용실에서 진행됐다.
  
"머리를 하는 게 아니라 영업을 하던 나... 이제는 관계가 더 중요"

2017년 9월 문을 연 그의 미용실에는 간판이 없다. 100% 예약제다. "시간 내서 방문해주신 분들에 오롯이 집중해서 응대해야 하는데, (지나다 들르는 분들로 인해 흐름이 끊기면) 실례가 될 수 있어서"라고 했다.

"예약제가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죠. 근데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20대 때는 돈 욕심이 정말 많았어요. 대표님이 따로 있는 숍에서 일했는데 인턴 더 붙여달라고 요구하면서 '더,더,더' 그러고 있더라고요. 어느 순간 머리를 하는 게 아니라 영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러면서 "'머리카락이 상해서 클리닉을 하지 않으면 염색할 수 없어요, 파마할 수 없어요' 이건 말이 안 되거든요. 파마나 염색을 할 수 없는 상태의 모발이면 클리닉 한 번 한다고 뿅 하고 해결되는 게 아닌데, 클리닉을 끼워 파는 거"라고 말했다.

그걸 알면서도 답습하던 자신이 보였고, 부끄러웠다. '아니다'를 깨달은 후 상담 방법을 바꿨다고 한다. 일단, 들었다. "일대일로 한 명 한 명 상담하다 보니 머리카락에 갖는 불편감이 정말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함께 고민했고, 그러다 보니 관계가 단단해졌다"라고 했다.  
 
 최순희씨의 미용실 내부 모습이다. 가구들은 모두 목수인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최순희씨의 미용실 내부 모습이다. 가구들은 모두 목수인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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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에서 '관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순히 돈을 주고받는 상대가 아닌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관계'다. 관계를 소중히 아는 사람들은 대개 염치를 안다. 그 관계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내 욕심을 내세우기보다는 그걸 억누르고 상대를 배려한다. 염치가 가진 사양지심(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의 모습이다. 관계를 길게 이어가는 기본이다.

답을 알 거 같았지만, '도대체 왜 머리카락 자르러 온 사람을 돌려보내냐, 여기 임대료 비싸지 않냐'라고 물었다.

"제가 아닌 걸 이미 아는데 그걸로 돈을 벌고 싶진 않아요. 나를 속이는 거잖아요. 저는 머리를 만지는 사람이잖아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대화에 집중해서 오신 분이 원하는 결과를 내야죠." 
 

"직원 생활 할 때보다 덜 벌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 그도 부끄러웠던 때가 있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매장에서 일하던 때였다고 했다. 대표는 따로 있고 디자이너는 본인 한 명에 스텝이 한 명 더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쉬기도 어려울 만큼 바빴다.

"핑계를 대자면, 너무 바빴어요. 오전 10시부터 9시까지 일하는 상황이었어요. 파마를 원하는 고객 샴푸를 스텝에게 맡기고 전 화장실에 갔어요. 너무 몸이 망가져서 혈변을 보던 때였거든요. 그리고는 파마약을 발랐는데, 바르자마자 머리카락이 녹더라고요. 그때야 아차 싶었는데, 그 손님이 탈색을 했었던 거예요. 탈색 머리에는 펌 안 하는 게 좋거든요. 제가 상담할 때 모발 이력을 여쭤봤어야 했는데... 제가 꼭 회복시켜드리겠다 했지만 안 오시더라고요. 몇 차례 연락드리다가...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려요."

시행착오는 본인 매장을 낸 후에도 겪었다. 개업 초기, '사장님'이 됐는데 '직원'일 때보다 월급이 적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는데도 돈이 안 따라왔다. 

"만날 울고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 또 돈돈돈 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돈 벌 수 있을까'를 내려놓고 고객님과 소통하는 것에 집중하니, 고객님들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또 주변 분들에게 추천해 주시고 그러면서 차차 나아지더라고요."

돈 욕심을 버리니 오히려 돈이 따라왔다는 말이다. 물론 현재도 직원으로 일할 때보다 적게 가져지만, 만족한다고 했다. 관계에서 오는 만족감이 나머지를 채웠다고 했다.

"숍 차렸지만 직원 생활 할 때 벌었던 만큼 수익이 남은 적은 없어요. 그래도 먹고살아요. 금전적인 것만 생각하면 (예전에 비해) 아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 삶이 너무 좋아요."
 
 최순희씨 미용실 내부. 나무로 만든 것들은 모두 목수인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최순희씨 미용실 내부. 나무로 만든 것들은 모두 목수인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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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욕심보다 관계에 집중하게 된 건, 공간이 준 힘 덕도 컸다. 21살에 미용일에 뛰어들어, 35살에 갖게 된 '나의 매장'. 그는 "30대 초중반까지의 시간을 갈아서 반죽해놓은, 지난 시간들의 보상 같아요. 안 무너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 매장에서 그는 "허투루 일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목수인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미용실 안 모든 가구들, 과거 남자친구(현 남편)가 직접 발로 뛰어 완성한 인테리어. 그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노력과 자신의 15년여를 갈아 만든 이곳에서 그는 겸손해졌다고 했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아 꾸린 공간이니 뭐 하나 허투루 할 수 없더라고요. 점점 돈에서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공간이) 내가 진정성 있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달까요."

그와 같은 다짐에 힘을 실어준 것은 또한 고객이었다. 그들과 대화하며 길을 찾아나갔다. 어떤 때는 고객이 스승이 되기도 했다.

"악성 곱슬이신 분이 앞서 매직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셨어요. 그런데 머리가 자라면서 곱슬기가 붕 뜨더라고요. 그냥 그 상태로 자라면 히피 펌(파마의 한 형태) 느낌이 날 거 같아서 그냥 길러보자 제안 드렸더니 그러겠다 하셨어요. 2~3달 후에 오셨는데 고객님이 '매직한 곳을 원래 (곱슬)머리처럼 파마해보면 어떠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매직 한 곳을) 길러서 잘라낼 생각만 했는데 한 대 빡 맞은 느낌이더라고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비슷한 모발을 가진 다른 고객님께도 '손님한테 배웠다, 해보시겠냐'라고 제안 드리고, 정말 좋아요."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고, 고민의 장이 넓어지게 된 게 "너무 즐겁다"고 했다.

"예전에 노홍철씨가 <무한도전>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걸 하면서 돈도 벌다니 '나는 러키 가이'라고 했었잖아요. 지금 제가 그래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가 아니라 재미있는 일을 하는데 돈이 따라오고 있어요. 그래서 너무 좋아요."

그래서 그는 이 직업을 다른 이에게도 권하고 싶다.

"예전에는 다시 태어나면 4대 보험 받는 사무직 종사자로 태어나야지 했어요. 근데 지금은 '미용 하라'고 권해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남녀노소 떠나서.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멋있잖아요. 또 누군가의 역사를 함께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솔로였던 사람이 커플이 되고 결혼해서 아기 낳아 배냇머리 밀러 오고 그래요. 육체적인 노동 강도가 낮은 편은 아니지만, 참 매력적이에요. 제가 행복하니까 이 직업을 권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사는 게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이렇게 살면 행복하더라고요."

고객을 '돈'으로 보니 부끄러웠다. 그 마음을 알고 난 후 '관계'에 집중했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봤다. 그랬더니 스스로 만족감도 높아졌고, 행복해졌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염치 있음'의 힘이 느껴졌다.

[염치주의 연재 목록]

01. 트위터리안 요시키, "프로매국노" 일본인을 만나다
02. 수의사 김정호, '북극곰 없는 동물원' 꿈꾸는 동물원 수의사
03. 판사 박주영①, 동사무소에서 판사는 부끄러웠다 "법에 무지하여..."
04. 판사 박주영②, "역사는 디스코 팡팡 같아... 진보와 염치는 한 몸"
05. 배우 김남길, "이젠 저도 건물주 됐으면 좋겠어요"
06. 가수 아이유, 이것은 팬레터입니다, 수신자는 '아이유'
07. 심리학자의 분석, 조국-나경원 욕먹는 각각의 이유
08. 대학생이 꼽은 '염치없는 교수', 세 가지 유형
09. "전두환, 황금 가면 쓴 최고 철면피 3위"
10. 염치는 전염된다... 친일인명사전으로 옮아간 부자의 염치
11. 조선왕조실록 2067번 등장하는 염치, 역사학자 이덕일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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