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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이력도, 경력도, 나이도 제각각인 학우들과 작년 2019년 하반기 4개월여 동안 글쓰기 수업을 했다. 책을 가까이서 접하고 관심이 많긴 해도 '글쓰기'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학우들이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글쓰기'와 친해지고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한 작품들을 써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뿌듯했다. 그들과의 즐거운 동행은 소박한 한 권의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2019년말, 학우들과 함께 펴낸 글 모음집< 다시, 날다 >
원고부터 디자인까지 학우들이 직접 다 했다
 2019년말, 학우들과 함께 펴낸 글 모음집< 다시, 날다 > 원고부터 디자인까지 학우들이 직접 다 했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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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글쓰기에 도전할 자신감이 없던 그들에게 펜을 들 수 있는 용기를 준 말은 첫 수업시간에 내가 그들에게 했던 '졸작을 쓸 권리'라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글쓰기' 수업을 할 때면 첫 수업시간에 항상 '졸작을 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근사한 작품을 쓰려는 욕심을 버리고 '졸작'이라도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일단 첫 문장을 쓰는 게 중요해요."

물론 이것은 나의 말은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쓰레기 같은 글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 나탈리 골드버그 <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전 세계에 글쓰기 붐을 일으킨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다. 그러니까, 실제 글쓰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필요한 것은, 명작을 쓸 용기가 아니라 '졸작'이라도 써볼 요량으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다. 일단 시작만 하고 나면 어렴풋이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굳이 명작도 아닌 졸작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이 질문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글쓰기 책에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답한다.

'글쓰기'는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까지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그로 인해 '치유 글쓰기'는 아예 글쓰기의 한 장으로 자리 잡았다. 글쓰기의 치유능력을 경험한 이들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유명인들도 많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쓴 나탈리 골드버그도 그랬고,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이 치유 받았다고 고백했다.
 
"내 작품의 중심 주제는 내 가족이 장애아이와 함께 살아온 방식이었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숙했다"
                                                               -오에 겐자부로
 
내가 생각하는 '졸작'이라도 써야 하는 이유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잠시 멈춰서기 위해서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라는 명언도 있지만 속도에 휩쓸려 그저 살아가다 보면 어디로 가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한번 멈춰 서기도 쉽지 않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는 나를 한번 돌아보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글을 쓸려면 필수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깊은 우물을 돌아보아야 한다.
  
글쓰기 수업을 함께 한 학우들의 캐릭터. 학우들의 개성을 살려 디자인을 전공한 위다혜 학우가 직접 그렸다.
 글쓰기 수업을 함께 한 학우들의 캐릭터. 학우들의 개성을 살려 디자인을 전공한 위다혜 학우가 직접 그렸다.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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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에는 거의 말라버린 내면의 우물을 찾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자꾸 들여다보고 찾다보면 우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찾을 수 있다. 그때쯤 두레박을 내리면 쓰고 싶은 이야기, 글감이 길어올려진다. 물론 처음부터 쉽게 글감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라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런 쉽지 않은 훈련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글쓰기를 통해 가장 내밀한 친구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의 광풍을 온 몸으로 마주했던 13살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지하실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만난다. 바로 13살 생일에 받은 일기장, 안네는 아예 일기장에 '키티'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털어 놓는다. 안네가 일기장을 친구로 선택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종이는 인간보다 잘 참고 견딘다. "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의 일기장
 안네 프랑크의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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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다 보면 부딪히는 수많은 억울한 순간, 스스로 비겁해지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순간들, 차마 친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상황들에 '인간보다 잘 참고 견디는' 종이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털어놓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정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비단 안네뿐 아니라 지금은 대작가가 된 많은 이들도 힘겨운 삶의 시간들을 글쓰기의 힘으로 견뎠다고 고백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글쓰기는 '삶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자신이 겪은 많은 삶의 경험들을 소설로 썼던 박완서는 이런 고백을 하기도 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도 지킬 수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도
거기서 구원이 됐던 건 내가 언젠가는 저런 인간을
소설로 한번 써야지 하는
학교 다닐 때의 단순한 문학 애호가로서의 그것과는 다른
어떤 생각이었어요.
불행의 밑바닥에서도 그것이 불행감을 조금 덜어주고
뼛속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박완서
 
'글쓰기'는 요새 말하는 '가성비'의 관점에서 보아도 꽤 가성비가 높은 편이다. 사실 달랑 펜 하나와 종이 한 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뭐가 있을까? 그런데 막상 글쓰기를 시작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을 할 수 있다는데 놀라게 될 것이다. 이 단순한 두 가지의 도구는 잊고 있던 '내면의 나'를 만나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버린 '시간'의 얼굴을 맞딱드리게 해 주는 힘도 있다. 분명 하늘에서 내리긴 했으나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눈처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 그런데 그 순간을 기록해 놓으면,'기록'은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가끔씩 펼쳐보면 그 기록은 우리의 좋지 않은 기억력보다 훨씬 많은 당시의 상황들을 고스란히 복원해 보여주는 능력이 있다. 글쓰기'는 시간을 이기는 힘이 있다.    

글쓰기에 관한 우리나라 학교 글쓰기가 놓친 것 중의 하나는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당장 베스트셀러가 될 '명작'을 쓰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도 일단 '졸작'을 쓸 용기로 새해에는 글쓰기를 시작해 보자. 가깝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오마이뉴스>기자되기 쯤은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면 나와 모든 것을 공유할 친한 '벗'을 사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돼 주기도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블로그 <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에도 실립니다


태그:#부산 글쓰기 수업, #해운대여성인력개발센터, #바오밥 스토리아카데미, #졸작을 쓸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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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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