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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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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숨진 채 발견된 김포 일가족이 평소 생활고에 고통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서른일곱의 여성 가장은 남편과 이혼 뒤 노모와 여덟 살 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프리랜서로 일했지만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 아파트 관리비조차 밀렸다고 한다.

소식이 알려지자 지자체에서는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며 관리 지원 대책을 내놨다. 사후약방문 처방이다. 현실의 도피처를 삶의 마감으로 택한 서글픈 죽음의 행렬이 이어질 때마다 정부와 지자체는 온갖 대책을 쏟아낸다. 하지만 또 다른 죽음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김포 일가족이 계속 2020년을 살았다면, 대통령의 7일 신년사처럼 '나와 이웃의 삶이 고르게 나아지고, 경제가 힘차게 뛰며 도약하는 신년'의 수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문 대통령은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국민의 삶은 여전히 힘겨웠고 극단의 선택은 줄을 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정부가 실적처럼 말한 통계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것인데, 2020년 대통령의 호언 역시 허망한 약속으로 여겨지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경제는 나아진다는데... 우리는 왜 힘들까?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 신년사 발표하는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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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2019년에 대한 간략한 평가와 2020년의 여러 가지 포부를 담았다. 촛불 정신을 계승한 정부가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포용·혁신·공정에서 확실한 성과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상, 법적·제도적·행정적 개혁을 멈추지 않겠다는 약속, 부동산 투기 억제의 의지, 남북관계의 활로 모색과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6.15 공동선언 20주년을 앞두고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위한 여건을 남북이 같이 마련하자는 호소에는 답방 성사를 위한 염원도 담았다.

그러나 특별할 것 없이 평이한 신년사였다. 부동산 억제에 대한 의지나 김정일 위원장 답방 염원 등이 예년에는 담기지 않은 내용이었다고는 하나, 재벌개혁이나 소득주도 성장에 대한 의지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성장을 이어가자는 성장론에 힘을 실었다.

집권 4년차, 개혁보다는 성과가 더 필요한 시점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국민의 호주머니를 채워 경제를 살리겠다는 포부가 희석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가는 대목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몇 번이나 흔들렸고, 최저임금 1만원 달성 공약도 스스로 거둬들인 상황 아닌가.

신년사에서 문 대통령은 2019년 일자리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신규 취업자가 28만명 증가해 역대 최고의 고용률을 기록했으며, 청년 고용률도 13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통계는 잘 와닿지 않는다. 청년 고용률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지난해 청년 체감 실업률(15~29세)이 2015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았다는 결과도 있다. 그리고 비정규직 근로자는 오히려 1년 사이 87만명 급증했다. 수치는 거짓이 없다고 말하지만 같은 현상에 상반된 통계도 비일비재하다. 야당이나 보수 언론이 일부의 통계로 극한 위기감을 증폭시키는 나쁜 버릇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고용 부문이 자랑할 만큼 나아졌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줄고 고용의 질이 개선되었다"는 주장에도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정부의 노력으로 저임금근로자 비중이 줄고 상대적 빈곤율 지표도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가 여전히 크고, 불평등 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저임금 노동자의 소득 기준이 되는 최저임금은 온갖 구실을 내세워 인상을 억제하면서도 대기업 임원에게는 해마다 수억, 수십억 원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관행 아닌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줄고 상대적 빈곤율이 낮아진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선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수출주도 성장과 부동산을 띄우는 성장을 멈추겠다고 내세운 것이 소득주도 성장론이었다. 수출보다 내수를 살리고 기업보다는 국민의 호주머니를 채워 성장을 이어나가겠다는 것이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의 큰 그림이었다.

취임 3년 내에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고, 대기업의 갑질을 없애고, 공정경제를 마련하여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 구체적인 복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보수야당과 언론, 재계의 압력에 스스로 굴복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대기업의 갑질 근절과 '공정경제'라는 의제에선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지난해 5월 21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회원들이 최저임금 개악 피해사례 고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지난해 5월 21일 오후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회원들이 최저임금 개악 피해사례 고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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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통령의 신년사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경제가 나아진다는 것도,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것도 체감하기 어렵다. 자영업자들의 폐업 릴레이는 여전하고, 노동에서 소외된 빈곤은 극한 선택이라는 결과로 되풀이된다.

지난 2019년 11월 성북구에서 70대 노모와 40대 젊은 자녀 셋 등 일가족 네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들의 죽음을 두고 40대 젊은 사람 셋이 있는 집안에서 경제문제를 비관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40대 젊은 사람들도 노동 시장에서 밀려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임기 절반을 지난 문재인 정부. 아직 성과를 논하기에는 이르다. 국민과 시장은 낙관보다 비관이 앞선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들의 박탈감은 문재인 정부라고 다를 바 없다. 문재인 정부가 다시 한번 초심을 다잡았으면 한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제시한 2020년 목표다. 이를 위해 구체적 실천으로 뚜벅뚜벅 걸어갔으면 한다. 노동을 통해 가정을 꾸리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 집값보다 인간의 노동이 제값 받는 사회. 이런 사회가 되어야 국민도 산다. 최저임금 1만원과 소득주도 성장을 이룰 수 있는 2020년이 되었으면 한다.

태그:#신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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