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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멋진 찻집도 도서관도 된다. 사계절 빵빵한 냉난방과 무료 와이파이 서비스가 제공되니 한두 시간쯤 자도 인터넷 서핑을 해도 좋다. 1250원으로 시간만 잘 맞춰 옮겨 타면 반나절 이상도 이용 가능하다. 시내버스의 장점이다. 떠나고 싶기도 안 떠나고 싶기도 하다면, 여행을 가고 싶지만 돈과 시간, 그 밖의 일상 여러 가지 것들이 발목을 잡는다면, 그럼에도 새로운 풍경과 영감, 또어떤 여행의 묘미를 즐기고 싶다면 그냥 훌쩍 내 옆에 와 서는 시내버스에 올라보시길.[편집자말]

'어디로든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갈증을 느낀 지 일주일여. 봄날처럼 환하고 따뜻한 일요일 정오 집을 나섰다. 여느 때 가던 버스 정류장이 아닌 그보다도 가까운 차고지로. 자전거 산책 중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거의 매일 들르는 '민락동 골목시장' 몇 걸음 옆에 41, 83, 83-1, 583, 62, 108번 버스들이 전체 노선을 달려와 쉬는 곳, 일명 종점이 있었다. 시작점이기도 하고. 

어느 버스를 탈까. 마치 '버스 뷔페'에 와 있는 기분. 혹은 어디라도 내 맘대로 떠날 수 있는 여러 장의 차표를 선물받은 듯도. 마지막까지 반대편 종점이 '충무동 해안시장'인 41번과 '자유·평화시장'인 583번 사이에서 고민하다 먼저 온 41번에 올랐다. 583번 버스 여행은 다음으로. 오늘은 41번의 종점, 내가 좋아하는 '충무김밥'과 이름이 닮아 괜히 정감 가는 '충무동 해안시장'으로 간다. 
 
 집에서 걸어 5분 거리 버스 차고지
 집에서 걸어 5분 거리 버스 차고지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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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에 기대어 햇빛을 한가득 받으니 마음도 피부도 기분좋게 소독되는 것 같다. 하지만 1월의 때아닌 따뜻함의 이유와 그 영향을 생각하면 불안하다. 불평등한 세상, 나는 다만 운이 좋아 아직은 안녕한 시대와 대륙에 산다. 일단은 지금의 행복을 만끽하는 수밖에. 목적지가 반대쪽 종착지다 보니 신경쓸 것이 없다. 얼마쯤 햇살욕을 즐기는 거 외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진다.   

이틀째 재밌게 읽고 있는 책,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을 꺼냈다. 만화책이라 벌써 1/4 분량만이 남아 아쉽다. 내용 중에 일본 남극 탐험대가 남극을 철수하며 15마리 개를 두고 왔는데 그 중 살아남은 두 마리 개에 대한 일화가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아무 대책 없이 개들을 남겨둔 거라면(무려 남극에!) 그 무슨 무책임하고 잔혹한 짓인지. 타자의 고통은 쉽사리 모른 척하면서 자신의 고통, 죽음에는 수많은 의미를 부여하며 서글퍼하는 것도 인간의 아이러니. 

그런데 어라, 궁금했던 41번 버스의 종점 '충무동 해안시장'은 내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곳임을 여섯 정류장을 남겨둔 '부산역'을 지나는 순간 깨달았다. 나는 부산역과 가까운 동광동과 영주동에서 네 해를 살았고, 그 인근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명소인 '국제시장', '깡통(야)시장', '자갈치시장' 등이 있는데 '충무동 해안시장'은 사실 '자갈치시장'과 구분이 거의 무의미한 하나의 시장이기 때문.   
 
 '충무동 해안시장'
 "충무동 해안시장"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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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이렇게 하얗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우스웠다. 하지만 8년 전 귀향해 가장 좋은 기억들이 서린 동네라 실제로 얼마 전부터 이쪽으로 한번 와보고 싶었던 차에 나의 착각이 선견지명 같았다. 육해공 음식들이 가득한 재래시장이 사방에 있어 점심 메뉴는 되레 맛있는 게 너무 많은 게 걱정 아닌 걱정. 익히 알고 있는 거리 음식들을 떠올리니 급 허기가 느껴졌다. 

'충무동 해안시장' 하차. 인접한 바다와 선박들, 온갖 날생선과 굽고 끓인 음식들이 뒤섞인 냄새가 반가웠다. '충무동 해안시장' 구간은 '자갈치 시장'에 비해 훨씬 허름한 느낌이지만 그 오래돼 낡은 풍경에 그만의 멋이 있다. 손님들도 대부분 소박한 차림에 연세 많은 단골들. 큰 솥에 선지해장국과 매운 닭발 등이 그득한 야외 테이블에 각각이 온 손님들이 붙어 앉아 낮술을 겸한 식사가 한창이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 

'충무동 해안시장' 골목을 계속 걸으면 자연스레 '자갈치 시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유명세 탓에 방문객은 훨씬 많다. 특히 설을 앞둔 대목이라 오늘은 말그대로 사람 반 고기 반이었다. 모처럼 보는 엄청난 종류와 양의 생선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는데 상인 한 분이 "일본인인갑다" 하셨다. 종종 받는 오해인데 오늘도 정말 그런 척 했다. 외국인이라 신기해서 그렇겠지 하고 사진 찍는 걸 너그러이 봐주실 것 같아서.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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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많으면 좋을 법도 한데 하루 온종일 시장을 지키는 상인 분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으신 듯했다. 어느 생선 가게 아주머니는 "따라가요, 따라가. 거 서 있으면 하루종일 못 갑니다" 하면서 한 발 떼기 쉽지 않은 상황에 어찌할 줄 모르는 방문객들에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한숨 돌리려 잠시 옆길로 빠졌다가 그래도 모처럼 그 북적임과 생생함이 좋아서 다시 시장 골목으로 섞여들었다. 

'자갈치 시장' 끝에는 몇 년 전 현대식으로 재정비한 '회센터' 빌딩과 바다와 배들을 볼 수 있는 항구 광장 그리고 여객선 터미널 선착장이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광안리 해수욕장'과는 많이 다른 느낌. 해수욕장이 놀기 위한 바다라면 이곳 바다는 치열한 삶터. 당연히 장소의 기운도 다르다. 항구 광장에 서서 바다와 하늘, 늙은 가수의 열창을 잠시 감상하다 바로 길 건너 '부산 국제 영화제' 거리로. 

참 볼거리 먹을거리 많은 동네다. '부산 국제 영화제' 거리에는 극장과 복합 매장들, 그리고 보다 다양한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들이 파라솔 아래 줄줄이 서있다. 앞서 시장에서 푸짐한 생선구이 한상을 먹을까 여기에서 이것저것 입맛 당기는 대로 사먹을까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 고소하고 달달한 씨앗호떡부터 오동통 쫄깃쫄깃 담백한 소라꼬치, 그리고 모짜렐라 치즈가 가득 든 어묵으로 행복한 점심 식사 완료.
   
나온 김에 겨울 외투를 하나 사려고 대형 매장에 갔다. 마침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색색깔의 후두 점퍼 1+1 행사 중. 빨강, 노랑, 초록, 연두, 파랑, 연파랑, 보라, 연보라, 남색, 갈색, 검정색, 하얀색 정말 색깔별로 다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빨강과 노랑을 택했는데 노랑색이 원하는 사이즈가 없었다. 2층까지 가서 검정으로 바꿨는데 이번엔 1+1 해당 제품이 아니란다. 슬슬 한계가 느껴졌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가고 싶진 않아서 인내심을 발휘해 또다른 가게로 갔다. 결국 전혀 다른 모양의 가격도 제법 비싸서 3개월 할부 카드 결제를 해서 정장에도 어울릴 만한 외투를 샀다. 이로써 겨우내 검정색 단벌 외투 신세에서 탈출. 후회 없는 쇼핑을 위해서도 분별력, 자제력, 인내력, 통찰력 등 많은 덕목이 요구되니 어려운 게 당연한 것도 같다. 

어느새 저녁 기운이 감도는 오후. 다리도 아프고 이제 그만 집으로 가고 싶다. 예전에 살던 집도 둘러보고 마을버스를 타고 경치 좋은 산복도로를 올라 '민주공원'까지도 가보고 싶지만 다음으로. 시내버스 여행의 장점 중 하나는 언제 끝내더라도 아쉬움이 적다는.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다시 올 수 있으니까. 어둠이 내리니 아직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에 등이 켜졌다. 

버스를 타러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5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문재인 아웃 독재 타도'란 글귀가 적힌 커다란 팻말을 들고 서 있었다. "진짜 독재가 뭔지 모르나 보지." 나도 모르게 소리내서 말을 해버렸다. 말을 해서 통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해버리는, 이런 것도 꼰대 기질 같아서 스스로 움찔했다. 올 때도 똑같이 41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민락동'까지. 편히 와서 내 집까지도 5분만 걸으면 되니 이것도 참 좋네. 
 
 '자갈치시장'과 인접한 남항
 "자갈치시장"과 인접한 남항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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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여행에서 만난 물건
 
 배수관 청소기
 배수관 청소기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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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투와 달리 찾은 덥석 산 물건이 있는데 바로 '배수관 청소기'! 백제시대 유물로 알려진, 오래 전 교과서에서 봤던 '칠지도'와 닮은. 가격은 1천 원. 얼마 전부터 물 빠지는 게 영 시원찮던 욕실 세면대에 가늘고 긴 그것을 방향 따라 쑤욱 넣었다 빼니 문제의 이물질들이 걸려나와선 다시 시원스레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비싼 수리비나 유독한 세제 필요 없이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으니 각 가정에 하나씩 비치해두면 좋겠다.

 
 겨울옷 매장
 겨울옷 매장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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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털'이란? 나의 경우 쇼핑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진짜 동물의 털과 가죽 제품 사용을 중단해서이다. 결국 사지 못했지만 마음에 들었던 후두 점퍼의 제품 설명에 '보아털'이라는 용어가 있어 어느 동물의 털인가 싶어 낙담했는데 알고보니 화학섬유를 길게 만들어 포개는 방식의 제직법을 써서 만든 인조털이라고.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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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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