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30 16:57최종 업데이트 20.01.06 18:21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내부에는 윤 의사의 동상이 마련돼 있다. ⓒ 류승연

 
우리나라 임시정부 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서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밥을 먹고 우리가 향한 곳은 홍커우 공원. 지금은 루쉰공원으로 불리는 그 공원에 갔다. 보면 볼수록 예쁘기도 하고 내가 너무 잘 아는 장소라서 관심이 생겼다. 내가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1학기 역사 수행평가 주제가 윤봉길 의사의 일생이었고, 심지어 나는 윤봉길 의사를 연기했기 때문에 조사 과정에서 나름 해박하다고 할 정도로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굉장히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조사하고 인터넷으로만 보았던 곳을 직접 가보다니 말이다. 처음에는 걸으면서 설명을 듣다가 나중에는 기념관으로 들어가서 영상을 봤는데 머나먼 타지에 와서 이 영상을 보고 있는 우리도 힘듦이 느껴지는데 과연 윤봉길 의사는 얼마나 힘든 일생을 살았을까, 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느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장부출가생불환'이었다.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그 뜻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의미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에 갔다. 보통 우리가 책에서 배우는 내용은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여러 임시정부가 통합되었고 김구 등이 주요 인사였다' 정도지만 역사 해설가님의 설명을 듣다가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정말 빙산의 일각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서 신규식 선생님은 크게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학진 실장님은 우리들에게 상하이를 기억할 때에는 꼭 신규식 선생님을 기억해달라고 하셨다. 정말 우리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안착할 수 있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하신 분이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인 윤동주 시인처럼 부끄러움을 아시는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게 내가 느낀 첫 번째 감정이었고, 두 번째는 임시정부가 임시정부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너무 작고 너무 허름한 이런 곳이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 분들이 일하셨던 곳이라는 점이 너무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로는 이런 곳에서도 끝까지 헌신하신 독립운동가 분들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누가 내게 그렇게 물어본다면

두 번째 날, 송경령 능원으로 향하며 송경령에 대한 설명도 듣고, 능원에 도착해서는 그곳에 계신 독립운동가 분들을 만나 뵙고 묵념의 시간도 가졌다. 이날도 역시나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정말 많은 역사들 중 일부분만 배운다는 것을 느꼈다. 송경령 능원을 나온 뒤 우리가 향한 곳은 가흥에 있던 임시정부 요원 거주지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좁아보였고 역시나 국가를 위해 일하시던 분들이 일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고 시설이 좋지 않았다.

호텔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김구 선생님의 피난처였던 재청별곡으로 향했다. 거기서 우리는 책에서는 절대 다루지 않는 인물을 봤다. 그 인물의 이름은 '주애보'이고 해설자님은 썸녀의 느낌이었으며,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물 위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배를 움직일 사람이 필요해 구한 현지 뱃사공이었다고 한다. 주애보 역시도 해설자님이 우리고 기억해야 할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설명해주셨다.

이렇게 하고 둘째 날도 다른 장소의 겉면만 둘러보다가 내가 이번 역사탐방에서 가장 좋았던 방학진 실장님의 역사 강의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걸 여기까지 와서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끝날 때에는 '그런 걸 거기까지 가서 들어서 나는 운이 좋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역사 강의의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임시정부가 세워지기 전날 12시간에 걸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정하기 과정이었다. 다른 부분도 들으면서 너무 감명 깊었지만 정말 내가 듣고 소름이 끼친 부분은 이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제'가 대한민국의 '민'이라는 글자가 되기까지 몇 천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한 글자를 바꾸는 데에 걸린 시간이 몇 천 년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심장이 아팠다. 진짜 그 한 마디의 짧은 문장을 그렇게 멋있게 말 할 수 있는 건 실장님이 유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중국 갔을 때 어떤 게 가장 좋았어?'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방학진 실장님의 강의를 얘기할 것이다.

세 번째 날 아침, 모두가 차타는 이동하는 시간을 걱정했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차라리 아침부터 걷는 것 보다는 차타고 이동하면서 자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4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였다.

이곳은 김원봉 장군이 중국 국민당 대표였던 장제스의 지원을 받아 지어진 곳인데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까지 가르치는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다고 한다. 물론 터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거기서도 들었던 강의가 기억에 남는다. 그 학교 출신 중에 정일성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을 중국에서 모르면 간첩이라고 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데 역시나 한국 역사책에서는 다루지도 않는다. 여기도 참 안타까운 부분인데 앞부분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들이 배우는 역사는 너무 일부분이고 많은 사람들이 잊히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그렇게 등산을 마친 뒤 우리가 향한 곳은 절로 나도 모르게 엄숙해지는 남경대학살 기념관이었다. 남경대학살 기념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300,000이라는 숫자가 너무 많이 보이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궁금했는데 가이드님이 일본인이 남경에서 죽인 민간인의 수라고 대답해주셔서 정말 깜짝 놀랐다.

민간인을 30만 명이나 죽인다는 것은 학살을 넘어선 도살에 가깝다고 얘기해주셨는데 그 숫자를 보니 정말 도살에 가깝다는 얘기를 했다. 그곳에서는 방문객의 이름과 하고 싶은 말을 쓸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먼저 쓰시고 나도 회장으로서 짧지만 한 마디 쓰고 왔다.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장 선생님의 한 마디였는데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잊어선 안 된다'가 정말 인상 깊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밖에 나와 자유시간을 가지고 호텔로 돌아갔다.

용서할 수 있지만 잊을 수는 없다
 

중국 난징(남경)에 있는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벽면에 있는 70명의 위안부 할머니 사진. 사진 밑에는 항상 마르지 않는 흙이 있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을 상징하고 있다. ⓒ 조정훈

 
마지막 날, 나에게 가장 가슴이 아팠던 곳이다. 바로 남경위안소다. 아침부터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고자 검은색 착장에 구두를 신고 위안소로 향했다. 3일 동안 운동화만 신었으면서 굳이 구두를 신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안소로 향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역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숙제이기 때문이다. 위안소에 들어서서는 정말 경건한 마음으로 설명을 들으며 천천히 그렇지만 집중해서 해설을 들었고, 가슴에서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느라 많이 힘들었다.

해설이 끝나고 나는 해설을 해주신 해설가 분에게 "일본인들 중에서 이 곳을 찾아오는 일본인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물론 위안소를 찾아가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일본인들도 꽤나 있었고 그런 일본인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봤다.

마지막 날 나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던 건 해설가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우리가 항저우에서 남경까지 가는 시간도 4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과연 한국에서 차를 타고 열악한 환경 속에 끌려와 그 끔직한 일을 당하셨던 할머님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3박 4일이라는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정 속에서 나는 마냥 즐거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적인 장소를 돌아다녔던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알차게 보낸듯하여 뿌듯하고 다시 한 번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여러 관계자분들과 우리학교 선생님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우석님은 단성중학교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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