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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최초로 경군과 싸워 승리한 황룡 전투 승전기념탑
▲ 황룡전투승전탑 동학혁명 최초로 경군과 싸워 승리한 황룡 전투 승전기념탑
ⓒ 고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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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을 점거한 동학농민군은 진로를 남쪽으로 정하고 진군하였다.

이동경로를 보면, 정읍의 연지원(4월 6일) - 흥덕(4월 7일) - 고창(4월 8일) - 무장(4월 9~12일) - 영광(4월 12~16일) - 함평(4월 16일) - 무안(4월 18일) - 나주(4월 19일)를 거쳐 장성 황룡천으로 남진하여 경군을 맞게 되었다. (주석 3)

동학군의 주력 부대가 곧바로 북진하지 않고 남진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호남의 요새 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무기와 식량 그리고 더 많은 농민군의 전력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무기를 비롯하여 물자가 풍부한 나주를 공격하여 물량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학자들 중에는 전봉준이 전주를 선공하지 않고 남진한 것을 두고 정권(政權)을 도모할 혁명의 의도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북진을 위한 전략상의 남진이었다.

동학혁명군이 고을에 진공하면 군수를 비롯하여 관리들은 대부분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관아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방비에 나설 뿐 대응하려 하지 않았다. 반면에 지역 농민들은 대대적으로 이들을 환영해 마지않았다. 심지어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농민군에 가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결의를 다지기 위한 행동이었다.

농민군이 남진하면서 속속 관아를 점거해도 관군의 책임자 홍계훈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황토현의 참패로 전력의 큰 손실을 입은 데다 군사들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어 싸울 계제가 못되었다. 또 내려오기로 된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벌자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조선 중기 문인 박수량의 묘 전경. 앞으로 황룡 들녘이 펼쳐진다.
 조선 중기 문인 박수량의 묘 전경. 앞으로 황룡 들녘이 펼쳐진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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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에서 패배한 홍계훈은 민심을 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위무책을 썼다. 4월 8일에는 농민봉기군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방문(榜文)을 각 고을에 붙였다.

이번 양호(兩湖)의 동학교도들을 평정하려 이날 초 7일 전주에 머물고 있는 바 이런 서투(󰜅偸, 작은 도적 · 동학군) 쯤이야 왕명으로 며칠 아니면 초멸되겠지만 그러면 너희 백성들이 오랫 동안 소요의 피해를 입은데다가 이제 농사철인데 자칫하면 실업의 폐단을 가져올까 염려되어 안타까운 일이 아니랴? 본군문(本軍門)에서는 성상의 백성을 생각하는 은혜를 베풀어 이에 방문을 게시하여 타이르니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동요됨이 없이 너희 자제와 친척에게 일러 사설(邪說)에 물들어 죄를 범하는 일이 없다면 어찌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그리고 고을의 교졸(校卒)들이 동학군을 잡는다고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있으면 마을에서 그들을 결박해놓고 그 성명을 기록하여 보고해 오면 그들을 엄벌에 처하겠으니 꼭 거행토록 하라. (주석 4)


동학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고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홍계훈의 방문 따위에 겁을 먹거나 '회개'하여 전선을 떠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9일이 되어서야 경병(京兵) 160명과 향병(鄕兵) 200명을 금구와 태인으로 투입하고, 14일에는 선발대 2대를 무장으로 내려 보냈다. 이런 정도의 군사로는 1만 명에 가까운 농민군을 대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전라병사 이문영이 전라좌우도에 징병령을 내려 군사의 모집에 나섰다. 징병령은 소연한 민심을 더욱 어지럽혔을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간신히 끌어 모은 장병의 수는 몇 백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을 각 고을관아에 배치했지만, 강제로 끌려 온 농민들이 관복을 입고 관군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춘향이 노릇이었다. 숫적으로도 중과부적이었다.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녹두꽃> 속의 황룡촌 전투. 동학군이 공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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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의 황룡촌에서 다시 한번 접전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큰 전투이다. 농민군의 주력은 4월 21일 장성 황룡촌의 월평 삼봉(三峰)에서 진을 쳤다. 이를 정탐한 홍계훈은 다음날인 4월 22일 관군 300명을 동원하여 공격명령을 내렸다.

이날 오전 동학농민군 4~5천 명이 황룡촌에 집결하여 점심식사 중인 것을 탐지한 관군이 대포 2문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관군이 먼저 공격한 것이다. 관군은 숫적으로 열세이지만 대환포를 쏘면서 농민군의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황토현에서 이미 관군의 역량을 시험해 온 농민군은 관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때의 농민군의 행렬을 일본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동학군의 실력을 살펴 보건데 4천명, 그 가운데 2천명은 화승총을 가졌고, 기병 1백 명은 2열로 나뉘어 수색에 종사하고 있다. 그 동작은 양식조련과 닮아 지방민을 감복케 하였다." (주석 5)


주석
3> 『광서(光緖) 20년 4월 14일, 18일 승정원 개소(開所)』, 신복룡, 앞의 책, 140쪽.
4> 최현식, 앞의 책, 82~83쪽, 재인용.
5> 일본 『동경일일신문』, 1894년 5월 26일자.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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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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