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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을 형상화한 그림. 출처는 고등학교 <한국사>.
 동학농민군을 형상화한 그림. 출처는 고등학교 <한국사>.
ⓒ 삼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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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빠지지 않고 여름ㆍ가을에 몰아치는 태풍이 여러가지 피해를 주지만 이득이 되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바닷밑에 쌓인 침전물을 뒤엎어 바다를 청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회혁명도 그같은 기능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회혁명이 구체제(앙시앙 레짐)를 전복하고 새시대를 여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창업이나 쿠데타, 역성혁명, 반란, 반정, 의거 등이 있었지만, 혁명다운 혁명은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최초의 일이다.

세계적인 혁명, 예컨대 영국의 청교도혁명, 독일의 종교혁명(개혁),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 중국의 신해혁명,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은 모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일대 변혁운동이었다. 우리의 경우 동학혁명이 이들의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자주적인 민중혁명에 속한다.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광장 우측에 자리한 "동학농민군 출진상".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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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주자학의 전통으로 굳게 닫힌 전근대의 강고한 철벽에서 반봉건ㆍ평등ㆍ자주ㆍ인존ㆍ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혁명이다.

1894년 3월 21일 (양 4월 26일) 무장(茂長)의 당산마을 앞 들판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제1차 봉기에 속한다.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거했다가 스스로 해산한지 80일 만의 일이다.

이번에는 지난번 때와는 군중의 수나 조직, 내건 구호, 지휘체계 등이 확연히 달랐다. 1월의 봉기가 다소 자연발생적, 즉흥적이었는데 비해 이번 봉기는 사전에 치밀하게 조직하고 동원된 혁명적인 집결이었다.

무장에서 시작된 농민혁명은 백산 → 황토현으로 집결지를 옮기면서 수많은 동학농민이 자발적으로 참가하여 혁명의 진행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고부에서 농민들의 해산과 함께 몸을 숨겼던 전봉준ㆍ손화중ㆍ김개남ㆍ김덕명 등 지도부는 본격적인 혁명을 기포할 장소를 무장으로 결정하였다. 무장은 동지 손화중이 동학접주로 있는 곳이고, 이들 지도부의 지인, 친지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거사에 적합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동학혁명모의탑
 동학혁명모의탑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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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는 고부관아 점거의 주동 인물로 전봉준 등이 지목되어 조정에까지 보고되고, 그들의 이름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의 체포에 나섰으나 모두들 변신을 하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관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이들 지도부는 3월 초순부터 농민군을 지휘하게 될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를 조직하였다. 전봉준이 총대장인 동도대장(東徒大將)에 추대되고 손화중ㆍ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ㆍ오지영이 총참모, 최경선이 영솔장, 송희옥ㆍ정백현 등이 비서에 선임되었다. 대부분이 보은집회 등에 참가했던 동학의 핵심멤버들이었다.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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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고부관아를 공격할 때에도 앞장에 섰으며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릴 때에도 서명한 면면들이다.

지도부가 구성되면서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동학 조직을 통해서였다. 그 결과 며칠 만에 수천 명의 동학농민혁명군이 집결하였다. 지도부에 속한 인사들이 그만큼 도인과 농민들의 신망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때 집결된 동학ㆍ농민군의 수는 약 8천여 명이고, 영솔자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솔자와 참여인원 (주석 1)
 
 
 영솔자와 참여인원
▲ 영솔자와 참여인원  영솔자와 참여인원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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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우윤,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268쪽, 창작과비평사, 199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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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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