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4 08:48최종 업데이트 19.12.2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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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 종교가 있는 게 아니지만 그 표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잘 될 거야',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은 때로 허황되게 느껴진다. 미래를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는가. 누군가를 위로하다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런 말을 하고 나면 마치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바란다', '희망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바라면 이루어지는가? 희망하면 뜻대로 되는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나에게는 상대방의 상황을 바꿀 아무런 힘이 없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거짓이고 한다고 해도 최소한 나는 무의미한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다시 한 번 상대를 기만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감정이지 일상에서 저 말들을 쓰는 사람을 향한 문제의식이 아니다, 나는 주변 사람이 내게 저런 말을 전할 때 그 속에서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내게 '기도한다'는 달랐다. 우리는 몸을 납작 엎드리거나 적어도 고개를 푹 숙인 채 기도한다. 나는 이러한 행동이 신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무력하고 한 없이 약한 존재, 가진 게 많건 적건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와 상관 없이 그저 한낱 미물에 불과한 존재.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비록 아무런 답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을지라도. 그래서 내게 기도란 겸손하지만 강한 의지를 내포한 행위로 다가온다. 현실에 발이 묶여 있음을 인정하지만 결코 그 상태로만 남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는 행동. 여기에는 어떠한 허황된 낙관도 무의미함도 없다. 그래서 제대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네 번의 초상
 

올해 세상을 떠난 설리씨와 구하라씨 ⓒ 오마이뉴스

 
올해 네 번, 때로는 장례식장에서 혹은 집에서 홀로 상을 치렀다. 너무도 아끼는 두 명의 활동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설리와 구하라의 비보를 차례로 접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간 동안. 처음에는 슬펐고, 그 다음에는 허망했으며, 결국에는 이 모든 일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성소수자 공동체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옆에 있는 사람을 떠나 보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기도 하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작년도 재작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내게 장례란 익숙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1년에 네 번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짜고 나를 몰아가는 느낌이 든다. 다 거짓말 같다.

연말이 다가오고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글을 준비하며 나는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쓸 수 있는 주제는 많았지만 그 생각에 사로잡혀 다른 소재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노트북 앞에 앉자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실한 사람을 굳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떠나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아마 평소라면 그런 글을 썼을 것이다. 두 명의 활동가가 어떤 사람이었고, 설리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존재였으며, 구하라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야기하는 글. 우리가 이를 기억해야 한다는 글.

떠나간 이를 떠올리면 드는 외로움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가혹한 일처럼 여겨졌다. 죽은 이의 삶을 정리하고 남은 이들이 살아갈 이유를 만든다는 것이 말이다. 죽음이 죽음으로 남지 않고 다른 삶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게 나쁜 일은 아니다. 설리와 구하라의 행보와 그 의미를 정리한 글들은 분명 필요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탁월하게 그 일을 해낸 글쓴이들에게 무척 감사한 마음이다.

나에게도 그랬지만 어쨌든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은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고인이 된 두 사람이 자기 삶을 정리하고 공유할 겨를이 없기도 했고. 다만 지금의 나는 그런 일을 할 용기가 없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전에 글에서 주장해온 것과 달리 누군가의 죽음을 정리하는 일에 성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죽은 이들을 떠올리면서 생각한다. '사랑해', '보고싶어', '어디에 있는 거야', '돌아와줘'. 정리는커녕 그리움과 슬픔의 감정이 한데 뒤엉켜 속을 어지럽힌다. 어쩌면 이 글은 그래서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떠나간 이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사람들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이고 한 해를 돌아보며 서로를 격려하는 이 연말에 누구도 그들을 생각하지 않으면 고인들이 정말 외로울지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의 빈자리가 느껴지고 그래서 공허한 마음이 들면 오히려 내가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꼈다. 그렇게 외로우니까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죽은 이들을 붙든다. 마치 공기를 잡기 위해 허공에서 손을 휘젓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도 전할 수도 없는 바람을 되뇌인다.

기도를 멈출 수 없는 이유
 

아이유가 11월 발표한 신곡 'Love poem' ⓒ 카카오M

 
'누구를 위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나 봐/ 숨죽여 쓴 사랑시가 낮게 들리는 듯해'

올해 발표된 아이유의 노래 'Love Poem'은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숨죽여 쓴 낮게 들리는 사랑시,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이보다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을까. 유독 힘들었던 올해 말, 나는 이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누군가는 'Love Poem'이 아이유가 세찬 풍파를 겪었던 동료 여성 연예인들을 위해 썼을 것이라 추측했는데 아마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처럼 아름다운 많은 노래 가사들이 보통은 추상적이고 그래서 듣는 사람에게 미끄러지듯 닿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독 이 노래는 누군가 옆에서 말하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구체적인 청자를 설정하고 썼다고 가정하면 가능한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이 노래는 사랑시가 상대방에게 '늦지 않게 닿기를' 바란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나는 어쩌면 다음 앨범에서 아이유가 그 이후에 대해 노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도를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왕래가 불가능한 생사의 경계를 넘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닿을 수 없을 때, 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깊은 늪과 같은 비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기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기도란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히 무기력해지지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행동이니까.

나는 소연 누나가, 윤정주 활동가가, 설리와 구하라가 지금은 안녕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어쩌면 남들보다 유독 차가운 겨울을 보내며 비슷하거나 같은 기도를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외롭기를, 많이 고독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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