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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김개남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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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은 최시형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태인의 대접주가 되었다.

접은 김낙삼과 김문행 등이 통솔하고 1,300명의 도인이 있었다. 김덕명도 태인을 기반으로 접주가 되었다.

동학은 전국 각지에 세포조직인 포(包)와 접(接)을 두고 포를 다스리는 포주(包主)ㆍ접주, 도접주 등을 두었으며 포주와 접주 밑에는 교장(敎長)ㆍ교수(敎授)ㆍ도집강ㆍ집강ㆍ대정(大正)ㆍ중정(中正) 등 육임(六任)을 두었다. 접주는 군(郡) 단위의 책임자급, 포주는 현(懸) 단위의 책임자급을 말한다.
  
담장 구석에 있는 고부 군수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영세불망비.
 담장 구석에 있는 고부 군수 조병갑 아버지 조규순 영세불망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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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구는 18살 때인 1893년 황해도 팔봉접주가 되었다. 김구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연비(聯臂)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해주를 떠나 충청도 보은군 장안에 도착하여 대도주 해월 최시형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불원천리하고 온 뜻은 선생의 선풍도골도 뵈오려니와, 선생께 무슨 신통한 조화 줌치나 받을까 함이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선생은 연기가 육십은 되어 보이는데 구레나룻이 보기 좋게 났으며 약간 검게 보이고 얼굴은 여위었으나 맑은 맵시다. 크고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에서 약탕관이 김이 나며 끓고 있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했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 김연구, 박인호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씨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백범일지』)

 
태인군수 공덕비중 맨 오른쪽이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 공덕비이다. 김건호(공주중 2) 학생은 비석을 깨부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덕비라고 생각되었다.
▲ 태인군수 공덕비중 맨 오른쪽이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 공덕비이다. 김건호(공주중 2) 학생은 비석을 깨부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덕비라고 생각되었다. 태인군수 공덕비중 맨 오른쪽이 조병갑의 부친 조규순 공덕비이다. 김건호(공주중 2) 학생은 비석을 깨부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덕비라고 생각되었다.
ⓒ 최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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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시간적으로 100여 년의 차이를 둔 1789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과 비교된다. 당시 프랑스는 10%도 안되는 제1신분인 승려와 제2신분인 귀족이 특권계급을 유지하여 토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모든 관직을 독차지하면서 면세의 특권까지 받았다. 전 인구의 90% 이상의 농민과 서민들은 수탈과 빈곤에 시달렸다. 특히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 등의 과도한 사치와 국고낭비, 인사개입 등은 국민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조선말기의 국정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은 조대비의 근친이고 고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조규순의 조카였다. 비록 서자출신이지만 워낙 세도가라 철종 14년(1863)에 관직에 올라 고종 30년(1893)에 통정 대부에 이어 진주목사 자리를 꿰찼다가 내놓고 먹잇감이 많은 고부군수가 되었다.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동학농민군 고부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던 만석보 자리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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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군수가 된 조병갑은 부임초부터 먹잇감을 찾았다.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상류에는 주민들이 축조한 멀쩡한 보가 있었음에도 쓸데없이 더 큰 보를 만들면서 농민들을 임금도 주지않고 동원하고, 만석보가 완공된 후에는 만석보의 물을 쓰는 농민들에게 과도한 수세를 징수했다.

뿐만 아니었다. 인근 태인의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적비를 세운다고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고, 이런 저런 사유로 백성들을 붙잡아다 곤장질을 하면서 재물을 받고 풀어주는 등 탐학이 극심하였다.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만석보가 있던 자리 전경. 두 강이 합쳐진 왼쪽편의 하류에 고부군수 조병갑은 새로 만석보를 쌓았다.
ⓒ 이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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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을 지켜보았던 황현의 기록이다.

병갑은 한재(旱災)를 듣고 영문(營門)을 돌면서 북쪽 사면의 세금 받는 전담을 모두 훑어 받고 나서, 영문에 선언하여 세금을 감해 주지 않겠다고 하고, 여기에서 못 받은 세금을 남쪽으로 옮겨서 갑절을 받도록 했다. 또 북쪽 지방에 대해서는 세금을 남쪽으로 옮겼다는 것을 크게 떠들어 백성들에게 중한 배상을 물려서 논 1경(頃)에 대해서 벼 100두(斗)까지 받았으니, 이는 실상 국세(國稅)의 3배보다도 더 많았다.

또 경계 안에 집을 짓고 첩을 사서 살게 했는데, 집의 역사를 급하게 서두는 것이 공사(公事)의 역사보다도 더 심했다. 이에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어서 기약 없이 모인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들이 진정(陳情)하고 호소하려 했으나 병갑은 전주로 달아났으니, 이는 2월 초순의 일이다. (주석 5)


주석
5> 황현, 조민수 엮음, 『동학난』, 106쪽, 을유문화사, 1985.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조병갑_탐학,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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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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