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미슐랭 가이드>로 친숙한 '미쉐린 가이드'는 가장 오래되고 신뢰받는 맛집 안내서로 100년 넘게 전세계 미식 시장에 군림해 왔다. 하지만, 명성의 이면엔 공정성과 전문성에 의문을 품은 시선이 따라다녔다. 별 평가를 좌지우지한다는 브로커가 있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지난 11월 14일 KBS가 돈으로 거래되는 미쉐린 가이드를 단독 보도하며 브로커가 존재한다는 소문의 실상이 밝혀졌다. KBS는 브로커의 실체, 컨설팅 장사에 연루된 미쉐린의 고위층, 정부에서 지원한 예산 등 미세린 가이드의 민낯을 낱낱이 폭로했다. 지난 30일 방송한 KBS <시사기획 창> '미쉐린 별과 돈 그리고 브로커' 편은 단독 보도의 취재 과정을 정리한 종합판이었다. 120년 전통에 가려져 있던 미쉐린의 검은 커넥션. 그 실체는 무엇인가.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프랑스의 타이어 회사 미쉐린이 매년 발간하는 미쉐린 가이드는 암행평가단(인스펙터)이 요리 재료의 수준, 요리법과 풍미의 완벽성, 창의적인 개성, 가격에 합당한 가치, 전체 메뉴의 통일성과 일관성 등 다섯 가지를 기준으로 최고급 식당을 엄선하여 1스타(특별히 맛있는 요리), 2스타(요리를 맛보기 위해 찾아갈 식당), 3스타(요리를 맛보기 위한 여행을 가도 아깝지 않은 식당)로 별점을 매긴다. 최고 점수를 받은 3스타 식당은 전 세계 100여 개 밖에 되지 않는다. 미쉐린 가이드가 부여한 별 평가는 가게의 매출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에 효과를 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유럽에서 출발한 미쉐린 가이드는 2005년 북미, 2007년 아시아, 2015년 남미로 발을 넓혀 현재 31개국에서 발간된다. 우리나라는 2016년 처음 발행되어 올해로 4년째를 맞이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0'엔 신라호텔의 '라연'과 광주요그룹의 '가온'이 4년 연속 3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2스타 식당 7개, 1스타 식당 22개가 선정되었다.

이어진 폭로들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한식당 윤가명가의 윤경숙 대표는 미쉐린 가이드가 돈이 오고 가는 컨설팅 장사를 하며 별을 달아준다는 의혹을 최초로 제기했다. 윤경숙 대표는 일본에서 도쿄 윤가로 운영하며 2스타를 딴 언니의 소개로 어네스트 싱어를 만났다. 그는 2013년경에 미쉐린 가이드 서울이 2016년 하반기에 나온다는 미쉐린의 내부 정보를 윤경숙 대표에게 알려주고 발간 전에 3스타급 식당을 오픈하길 권유한다.

윤가명가는 2014년 연말에 서울 명동에 문을 열었고 미쉐린의 인스펙터가 몇 차례 방문했다. 이후 어네스트 싱어는 3스타를 받는 대가로 1년에 4만 달러(약 5000만 원) 컨설팅비와 연간 최소 6차례 방문하는 컨설턴트의 항공료, 숙박비, 체류비, 음식 먹는 값을 라연, 가온과 나눠서 지불할 것을 제안한다. 계약서에 서명까지 했던 윤경숙 대표는 고민 끝에 연간 2억 원 가까이 지불하는 별 등재 비용을 거절하고 계약을 파기한다. 윤경숙 대표의 말이다.

"별 뒤에는 돈 결탁 저런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잖아요. 애초부터 미쉐린 3스타를 받으려면 이런 것들을 진행해야 한다고 알려줬다면 저는 그때 선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KBS 기자가 어네스트 싱어에게 미쉐린의 내부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를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답변을 피한다. 그런데 윤경숙 대표와 체결한 계약서의 서명자는 어네스트 싱어가 아닌 홍콩의 데니 입으로 되어있다. 어네스트 싱어는 데니 입은 자신이 고용한 컨설턴트라고 말한다. 실제로 싱어와 윤경숙 대표 사이에 오간 메신저와 이메일을 살펴보면 계약의 모든 사항을 어네스트 싱어가 결정하고 지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경숙 대표는 신라호텔의 라연과 광주요그룹의 가온이 어네스트 싱어에게 돈을 주고 컨설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2015년 당시 라연 지배인은 어네스트 싱어를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KBS의 취재 결과 어네스트 싱어는 2010년대 초부터 와인이벤트에서 컨설팅 계약을 맺어 함께 일했고, 신라호텔은 싱어와 관계된 데니 입에게 식당 벤치마킹에 관한 컨설팅을 진행했음이 밝혀졌다.

신라호텔의 전 임원은 이부진 사장이 미쉐린 가이드에 관심이 많았고 컨설팅 계약 역시 알았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신라호텔 측은 "이부진 사장은 통상 그런 류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가온의 입장은 어떨까? 광주요그룹의 조태권 회장은 처음엔 데니 입을 모른다고 잡아떼다가 나중에서야 지난해까지 컨설팅을 받았음을 털어놓았다. 어네스트 싱어를 만난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데니 입이 어네스트 싱어의 부하직원인 사실은 몰랐고 싱어의 소개로 만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실력 있는 식당들까지 피해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미쉐린 가이드에 대한 여러 의혹이 불거지자 그렌달 뿔레넥 미쉐린 인터네셔널 디렉터는 "어네스트 싱어는 미쉐린 직원이 아니고 그는 미쉐린과 어떠한 계약도 맺은 적이 없다"며 연루설을 일축했다. 싱어는 미쉐린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인물일까? 그렇지 않다. 윤경숙 대표의 조카이며 도쿄 윤가를 운영하는 주 모씨는 아시아 미쉐린 평가 총괄 책임자인 알랭 프레미오의 소개로 어네스트 싱어를 만났다고 기억한다.

어네스트 싱어와 미쉐린 고위층 연루설에 대해 미쉐린 측은 "지난해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내부 조사를 했었는데 미쉐린 관계자 연루 의혹에 대해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 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미쉐린의 해명과 달리 어네스트 싱어가 컨설팅하거나 관계한 식당들이 별을 단 사례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져 있다. 6년 연속 3스타를 단 홍콩의 일식당의 공동 소유자 가운데 한 명은 어네스트 싱어의 부인이다. 싱가포르에 있는 일식당은 개업 4달 만에 2스타를 얻었다. 이 식당은 싱어 부부에게 일부 소유권을 준 뒤 파트너십을 맺었다. 마카오에 자리한 2스타 일식집은 2015년 1스타를 받은 후 1년만에 2스타를 달았다. 이곳도 싱어 부부가 컨설팅했다. 싱어 부부, 또는 그의 부하 데니 입이 관계된 식당들은 이례적으로 빨리 별을 달았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의 산물일까?

싱어와 미쉐린이 긴밀한 연결된 정황은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 어네스트 싱어는 몇 년 전까지 와인의 제왕이라 불리는 로버트 파커가 설립한 '와인 어드버킷'의 일본 대표를 역임했다. 미쉐린 그룹은 2017년 로버트 파커의 와인 어드버킷 지분 40%를 인수해 두 회사는 사실상 계열사 관계가 되었다.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이명박 정부 당시 김윤옥 여사의 주도로 시작한 '한식 세계화'의 일환으로, 박근혜 정부는 '미쉐린 가이드 서울' 도입을 위해 정부 예산 20억 원을 제공했다. 2016년 발표한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서 별을 받은 식당 24곳 가운데 한식당이 10여 곳이나 선정되면서 일부 식당에 자격 논란이 일었다. 한식 세계화를 위해 돈을 준 정부의 요구를 미쉐린이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왔다.

이런 논쟁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미쉐린은 태국, 싱가포르, 홍콩 등과 스폰서를 맺고 직간접적으로 정부 예산을 지원 받았다고 알려진다. 아시아 최초로 미쉐린 가이드가 발간한 일본 역시 정부가 후원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런데 미쉐린 가이드는 아시아 각국의 개업 1년도 안 된 식당들에 별을 남발하여 스폰서와 별 평가가 관련이 있다는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10여 년 전엔 16년 동안 인스펙터로 활동한 파스카 레미가 미쉐린의 평가 시스템이 형편없다고 폭로한 적이 있다. 최근엔 일부 유명 쉐프들은 미쉐린의 별을 거부하거나 스스로 반납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여기에 브로커와 결탁한 의혹까지 나와 미쉐린 가이드의 신뢰와 권위는 무너진 상태다. 논란이 심화되면서 실력으로 별을 얻은 식당들까지 피해를 보는 모양새다.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시사기획 창>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어네스트 싱어와 관계를 계속 부인하던 미쉐린은 KBS 보도 이후 입장을 바꾸어 "미쉐린 임원진이 어네스트 싱어와 교류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상적인 만남일 뿐"이라고 답변했다. 미쉐린은 어네스트 싱어가 미쉐린 고위 관계자와 연루돼 있으며 내부 정보를 이용하여 컨설팅 장사를 했다는 구체적인 의혹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네스트 싱어나 알렝 프레미오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중이다. 도리어 별 장사 의혹을 폭로한 윤경숙 대표에 대한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미쉐린은 브로커와 결탁 의혹을 말로만 부인할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조사 결과로 씻어야 한다. 명성은 대중의 신뢰, 과정의 공정성, 평가의 전문성에서 나온다. 이런 것들을 무시한다면 120년 동안 쌓은 역사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법이다. 지금 미쉐린의 행태는 '블로거지'와 다를 바가 없다. 인터넷상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며 광고성 글을 올리기 위해 과도한 서비스나 물건을 요구하는 '블로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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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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