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기가 느껴지는 한 가족이 있다. 벤을 운행하며 '사장님' 소리를 듣지만 현실은 택배일을 하는 일용 노동자이자 남편 리키(크리스 히친), 일주일 중 3일을 제외하고 매일 야간마다 도움이 필요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 애비(데비 허니우드), 그리고 그래피티가 취미이자 반항기 가득한 큰아들 세브(리스 스톤)과 똑똑하고 배려심 있는 막내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까지. 
 
배경만 놓고 봐도 경제적으론 중하위에 해당하는 서민이다. 이들은 서로의 고민과 일, 가족으로서 의무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워하다가도 위로하길 반복한다. 어쩌면 이 영화의 배경인 영국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국가 어느 곳에 데려다 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평범함이다.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켄 로치는 이 영화, <미안해요, 리키>(원제: Sorry We Missed You)를 내놓기 전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었다. 2016년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그의 길고 굵었던 영화 인생이 마무리되는 듯 했다. 하지만 뭔가 할 얘기가 남아 있었던 걸까. 4년 뒤 <미안해요, 리키>를 들고 돌아왔다. 

무너지지 않는 용기
 
 영화 <미안해요, 리키> 관련 사진.

영화 <미안해요, 리키> 관련 사진. ⓒ 영화사 진진

  
 영화 <미안해요, 리키> 관련 사진.

영화 <미안해요, 리키> 관련 사진. ⓒ 영화사 진진

 
켄 로치 감독은 평범함의 위대함, 특별함을 제대로 짚는 인물이다. 때론 강한 사회운동적 성격을 갖는 작품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의 영화에선 노동자, 서민이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진짜 그의 은퇴작일 지 모르는 <미안해요, 리키>는 바로 전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함께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의 후반기 작품은 줄곧 자본주의 경제, 자유경쟁 체제의 현대국가를 상수로 놓고 거기서 아등바등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곤 했다. 전작이 한 개인이자 국가 시스템에서 소외돼 간 서민을 의미한다면 이번 작품에선 시선을 보다 확장해 그 시스템이 한 가족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 작동원리를 매우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미안해요, 리키>를 두고 어둡고 우울하다고 느끼기 십상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노던록 은행이 파산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집과 돈을 잃었고, 리키-애비도 그 중 하나였다. 유일한 재산이던 차를 팔고 두 사람은 맞벌이를 시작했지만 좀처럼 경제적 환경은 나아지지 않는다. 모든 위험 부담을 가입자에게 떠넘긴 고용 노동 시스템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멀리서 보면 모든 걸 효율적이고 빠르고 깔끔하게 바꿔놓았지만 그만큼 '인간적 온도'는 앗아가 버렸다. 개인 여가와 가족 구성원 간 신뢰마저 돈으로 환산해버리는 놀라운 그 시스템이 얼마나 많은 가족을 해체시키거나 위기에 빠뜨렸던가. 배달 중 소변조차 볼 시간이 없어 플라스틱 공병을 들고 다니는 리키, 주말 저녁에도 호출에 뛰쳐 나가야 하는 애비는 그만큼 서로와 자녀를 보듬을 시간과 기회를 뺏긴다. 단 몇 푼 때문에 말이다. 그마저도 없으면 일상이 위태로워지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위기에 몰린 이 가족이 무너지지 않는 힘은 이들 각자 내면에 있다. 시간을 뺏기고 몸은 더욱 고단할지언정 네 사람은 서로를 믿고 이해해야 한다는 마음은 뺏기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처절하게 지키려 한다. 엉뚱하게도 그런 일상에서 소소한 웃음을 자아내는 포인트가 영화에 종종 묘사되는데 너무도 사실적이라 이 장면에서조차 눈물이 날 법하다. '블루 칼라의 시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이번 작품에서도 감독은 전혀 영화 연기 경험이 없다시피 한 비전문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했다. 크리스 히천은 실제로 배관공으로 일하던 노동자였고, 이제 막 연기를 배워가던 차였다. 보조 교사로 일하던 데비 허니우드는 TV에 출연하는 게 버킷 리스트였고, 단역 출연이 전부였던 이였다. 리스 스톤과 케이티 프록터는 모두 학교에서 캐스팅 된 경우였다. 

이처럼 일상의 파편을 켄 로치와 폴 래버티 작가가 열심히 모았고, 최선을 다해 조합해 놓았다.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구성과 화면이지만 컷 하나 하나에 숨결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기계적이거나 기술적 조합이 아닌 인물과 이야기의 화학 반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울하고 암담한, 어쩌면 극장에서 영화를 쉽게 즐길 수 있는 관객보다 다소 경제 환경이 어려운 인물들이 주는 위로가 매우 크다. 기꺼이 울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한줄평: 지금 시스템에 길들지 않고 다른 세상을 말할 줄 아는 용기
평점: ★★★★☆(4.5/5)

 
영화 <미안해요, 리키> 관련 정보

연출: 켄 로치
각본: 폴 래버티
출연: 크리스 히천, 데비 허니우드, 리스 스톤, 케이티 프록터
수입 및 배급: 영화사 진진
러닝타임: 101분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12월 19일
 
미안해요, 리키 켄 로치 영국 한국 택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