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로농구 1번 역사의 대부분은 이른바 정통 포인트가드가 차지하고 있다. 넓은 시야와 유연한 드리블 그리고 이타적인 패싱플레이로 게임을 이끌어가는 이들의 가치는 그 어떤 포지션보다도 높았다. 외국인 제도가 장착된 프로무대에서는 더욱 그랬다. 적재적소에 공을 잘 찔러주는 1번과 받아먹는데 능한 외인 4, 5번은 환상의 콤비였다. 이상민-조니 맥도웰, 김승현-마르커스 힉스, 주희정-아티머스 맥클레리 등이 대표적이다.

그만큼 빼어난 정통 1번은 희소성 만큼이나 인기도 좋았다. 강동희(1966년생)-이상민(1972년생)-김승현(1978년생)-김태술(1984년생)로 연결되는 '최고 포인트 가드 6년 주기설'까지 나왔을 정도다. 해외에서는 '페니' 앤퍼니 하더웨이, '더 앤써(The Answer)' 앨런 아이버슨 등 에이스급 공격형 가드가 주목받고 있었으나 국내 리그에서만큼은 선패스 마인드의 정통파가 득세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KBL 역시 트렌드가 바뀌어갔다. 쟁쟁한 선배들을 이어갈 만큼 완성도 높은 정통 포인트가드가 잘 나오지도 않았거니와 특별한 어떤 선수의 등장으로 '탑 포인트가드의 첫째 덕목은 패스와 게임리딩이다'는 오래된 불문율(?)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다름 아닌 울산 현대모비스 전성시대를 이끈 프랜차이즈 스타 양동근(38·181㎝)이다. 전체 1순위로 지명되기는 했으나 당시만해도 양동근이 이상민, 김승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형 가드가 될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양동근은 KBL의 전설적인 1번이 됐고 소속팀 현대모비스 역시 챔피언 결정전 최다 우승에 빛나는 명가로 우뚝 섰다. 양동근의 대성공으로 말미암아 농구계 역시 '정통 1번이 아니라해도 얼마든지 팀을 우승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플레이 스타일이 문제가 아닌, 기량+활용법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SK 돌격대장 김선형

SK 돌격대장 김선형 ⓒ 서울 SK

 
공격형 가드 양동근·김선형, 정통 1번 편견 깨다
 
양동근의 성공은 SK 돌격대장 김선형(31·187㎝)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프로무대에 들어서기 전 김선형은 2번 슈팅가드가 더 익숙한 선수였다. 게임을 조립하기보다는 빠른 발과 탄력 넘치는 움직임을 앞세워 수비진을 휘젓는 플레이를 즐겼다. 데뷔 초기에도 2번 포지션에서 주로 뛰었다.

하지만 문경은 감독은 김선형에게 1번 포지션에서 뛸 것을 주문했고, 이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포지션 대비 우월한 신체조건을 가진데다 스피드가 탁월한 김선형은 코트를 종횡무진 활보하며 SK 속공 농구의 중심에 섰다. 패싱능력을 통해 게임을 이끌어가기보다는 빈틈이 보이면 직접 치고 들어가 골을 성공시켰고 자신에게 수비가 몰리면 빈 공간을 찾아서 동료들에게 패스를 건네줬다.

정통 포인트가드와는 관계가 멀었지만 팀 공헌도는 그에 못지않다. 사이즈, 운동능력 등에서 상대를 압살해버리는지라 상대팀에서는 늘 김선형 매치업 상대에 대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모비스의 영원한 캡틴 양동근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정감이다. 지금이야 많은 나이로 인해 플레이가 예전 같지 않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 시즌 두자릿수 득점을 한결 같이 기록하는 등 꾸준하게 자신의 몫을 해냈던 선수다. 양동근이 입단한 이래 소속팀 현대모비스는 1번 포지션을 걱정한 적이 별로 없다. 양동근이 확실하게 버티어주는 가운데 백업 가드만 구하면 됐다.

양동근은 신장은 크지 않지만 탄탄한 근육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파워와 스피드로 매치업 상대를 압도했다. 그와 몸싸움을 벌이는 상대 가드들은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소속팀에서는 이를 활용해 적극적으로 포스트업을 주문하기도 했다. 거기에 빼어난 슈팅력과 강한 체력까지 갖추고 있는지라 돌파와 슛을 반복하며 상대를 농락하기 일쑤였다.

이렇듯 좋은 육체적 능력은 수비에까지 영향을 끼쳐 양동근이 맘먹고 대인마크를 들어가면 어지간한 상대는 평소보다 경기력이 뚝 떨어지고는 했다. 시야, 패싱센스 등에서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상대 가드를 우선적으로 제압하면서 경기를 풀어나갔던지라 그러한 단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내가 잘하는 것을 하면서 상대가 잘하는 것은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신인 시절부터 꾸준히 잘했음에도 여러 혹평에 시달렸으나, 실력과 결과로 깨트려버렸다. 선수 생활 초창기 고 크리스 윌리엄스의 도움을 받으며 꾸준히 성장했고, 이후에도 특유의 성실성을 내세워 탑급 1번으로 위상을 굳혔다.

리더십과 캡틴 근성이 강한지라 동료들 전체를 아우르며 분위기를 다잡는 카리스마도 일품이다. 이제는 누구도 그에게 '정통가드가 아니기 때문에…'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트랜드를 바꿔버린 공격형 가드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KT의 현재와 미래로 불리는 허훈의 최대 장점은 두둑한 자신감이다.

KT의 현재와 미래로 불리는 허훈의 최대 장점은 두둑한 자신감이다. ⓒ 부산 KT

 
거침없는 허훈, 공격형 가드 성공신화 이어갈까?
 
팀 성적과 개인 기록을 모두 잡은 양동근, 김선형의 성공 이후 공격형 1번은 더욱 늘어난 상태다. 전주 KCC 유현준(22·178cm) 정도를 제외하고는 각 팀에서 주목받는 젊은 1번들 역시 대부분이 공격형이며 대학에도 그런 유형의 가드들이 더 많다.

전자랜드의 에이스로 부각되고 있는 김낙현(24·184㎝)같은 경우, 가드의 다른 능력치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무시무시한 3점 능력을 앞세워 젊은 가드 돌풍의 중심에서 활약하고 있다. 꼭 정통가드가 아니라해도 양동근이 그랬듯 자신이 잘하는 플레이를 극대화시키고, 팀 전술에 녹아들게 되면 높은 공헌도가 가능해졌다.

김승기 안양 KGC 인삼공사 감독은 중앙대학교 재학시절 '터보가드'로 불렸다. 특유의 리더십과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통해 홍사붕, 김희선, 양경민, 김영만 등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캡틴으로 활약했다. 신장(182cm)은 크지 않지만 현주엽(195cm·123kg) 현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과 씨름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힘이 좋았다고 한다.

정통파는 아니지만 공격적이고 파워풀한 플레이를 통해 중앙대 농구의 돌격대장 역할을 했다. 프로에서의 활약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대학시절에는 국가대표로도 선발되고, 이상민 현 삼성 감독과 라이벌로 불리는 등 평가가 좋았다.

프로에서 '터보가드'라는 별명이 붙을만한 대표 공격형 1번은 양동근, 김선형이 있으며 그 뒤를 이을만한 기대주로는 부산 KT 소닉붐 간판스타 허훈(24·180㎝)을 꼽을 수 있다. 13일 현재 허훈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평균 16.43득점(전체 6위), 어시스트 7.33개(전체 1위), 1.29스틸(전체 10위)로 펄펄 날고 있다.

허훈의 퍼포먼스에 힘입어 소속팀 KT 역시 6연승 신바람을 내며 하위권에서 3위까지 치고 올라온 상태다. 현재 기세라면 어떤 팀도 두렵지 않다. 지금의 폼을 유지해나갈 경우 정규리그 MVP 역시 노려볼만하다. 나이도 아직 어리고 계속 성장 중인 단계인지라 어디까지 커나갈지 많은 관심이 몰리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허훈은 '농구천재', '농구9단', '농구대통령'으로 불리던 허재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의 농구 재능을 형 허웅보다 더 많이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 프로에서의 활약상도 훨씬 좋다. 양동근이 그랬듯 신장은 크지 않지만 탄탄한 근육질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워와 전투적인 투쟁심 등을 앞세워 매치업 상대를 박살내버린다.

허훈은 신장은 작지만 아버지의 현역 시절이 연상될 정도로 웨이트가 잘 갖춰져 있다. 때문에 자신보다 큰 선수들과 몸싸움을 벌이거나 충돌해도 밸런스를 쉽게 잃지 않고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가장 큰 장점이다. 거기에 아버지가 그랬듯 승부사 기질을 가지고 있어 접전이나 중요한 상황에서 해결사 본능을 보여주는 강심장의 소유자다.

허훈은 몸이 날렵하고 힘이 좋은데다 배짱까지 두둑한지라 공격을 할 때 망설임이 없다. 외국인선수가 버티고 있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골밑으로 파고들어 돌파를 성공시키는가하면 들어갈 듯 말 듯 하다가 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쏘는 스탑점프슛도 일품이다.

최근 들어 외곽슛까지 정교해지고 있어 단신 외국인선수만큼이나 막기 어려운 전천후 폭격기가 되어가고 있다. 거기에 안정된 드리블과 시야를 바탕으로 경기조율, 패싱플레이 등도 나날이 발전되고 있는 모습인지라 리그 대표 1번으로서 우뚝 설날도 멀지않았다는 평가다.

과연 허훈은 양동근, 김선형의 뒤를 이어 공격형 가드 전성시대를 이어갈 선두주자가 될 수 있을까. 대통령의 아들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진화중인 뉴스타 행보에 팬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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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디지털김제시대 취재기자 / 전) 데일리안 객원기자 / 전) 홀로스 객원기자 / 전) 올레 객원기자 / 전) 이코노비 객원기자 / 농구카툰 크블매니아, 야구카툰 야매카툰 스토리 / 점프볼 '김종수의 농구人터뷰' 연재중 / 점프볼 객원기자 / 시사저널 스포츠칼럼니스트 / 직업: 인쇄디자인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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