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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수진 멕시코 콜리마주립대 교수의 '중앙아메리카 이주자 리포트'를 전북대안언론 참소리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동시 연재합니다. 
☞ 참소리 페이지에서 보기 (
http://cham-sori.net/opinion/44614)

중앙아메리카 북부삼각지대 이주자들의 실상(1)
 
6월 24일(현지시각) 멕시코-미국 국경인 리오그란데강에서 25살 아빠 오스카와 2살배기 딸 발레리아가 숨진 채 발견됐다.
▲ 이민자 부녀, 미국-멕시코 국경 리오그란데강 익사사고 6월 24일(현지시각) 멕시코-미국 국경인 리오그란데강에서 25살 아빠 오스카와 2살배기 딸 발레리아가 숨진 채 발견됐다.
ⓒ 연합뉴스/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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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2019년 6월 24일, 미국 텍사스 주 국경도시인 브라운즈빌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멕시코 마타모로스 국경검문소 근처 다리 밑이었다. '북쪽'이라 불리는, 강 건너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이주자였을 것이 분명했다. 매년 50만 명 정도가 멕시코와 미국 사이를 가르는 3200km에 달하는 국경 어디쯤에서 합법적 절차 없이 월경을 시도하고 그 중 약 400여 명 정도가 그곳 어디쯤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죽음 역시, 어찌보면 특별할 것 없는, '그저 있을 법한' 죽음일 수 있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라면 말이다.

그럼에도 언론들은 이들의 죽음을 앞다투어 타전했다.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의 사진이었다. 죽은 아빠의 셔츠 안쪽에 묻힌 채, 죽어서도 미국에 닿지 못하고 다시 멕시코 쪽으로 흘러 들어온 아이의 삶이 너무 참담하게 느껴진 것일까? 아니면, 두 살배기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목숨을 걸고 강으로 들어가야 했던 스물다섯 살 아빠의 상황이 너무 아프게 느껴진 것일까?

아마도 세상은 이 사진 앞에서 2015년 난민이 된 부모를 따라 유럽을 향해 이주하던 중 지중해에서 목숨을 잃고 다시 터키 해안으로 밀려온 세 살배기 아이 쿠르디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한 장의 사진을 두고 많은 언론들이 미국 트럼프 정부의 불법 이주자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비판했다. 같은 사진을 두고 트럼프는 이와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도 무관용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며 맞섰다. 오히려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콘크리트 장벽에 대한 명분의 입지를 다시 한 번 다지는 듯했다.

멕시코와 미국을 가르는 국경은 전세계적으로 '합법적이지 못한' 이주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국경을 넘으려는 쪽과 그 국경을 막으려는 쪽 사이의 긴장이 가장 팽팽하게 유지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간의 여느 대통령이라고 국경 감시를 소홀히 한 경우는 없었을 것이나, 갈수록 미국의 멕시코와 접한 국경 전 구간에 대한 감시는 더욱 촘촘해지고 있다.

특히 현 대통령인 도날드 트럼프는 대선 기간 내내 멕시코와 접한 국경 강화를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공약으로 내걸었고, 취임 이후 오늘날까지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멕시코와 접한 '남서쪽 국경'을 언급하면서 돌파구를 모색하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물론, 국경 강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멕시코에 청구하겠다는 내용도 포함해서 말이다. 어찌되었든, 전체 길이 3200km에 달하는 두 나라 사이의 국경에 높이 9미터 혹은 15미터에 달하는 장벽이 세워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국경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갔던 사람들 대부분은 멕시코인들이었다. 미국 남서부의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를 포함하는 대부분 지역이 과거 멕시코 영토였음을 상기한다면, 그들 삶의 영역에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국경을 사이에 두고 왕래하는 삶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불법 월경은 있었다

오늘날 미국 내 거주하는 라티노(latino) 6천만 명 중 62%에 해당하는 3천7백만 명이 멕시코계인 것을 감안하면, 역사적이었고 문화적이었을 '월경'에 대한 이해가 좀더 쉬울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주말연속극 배경음악으로 소개되면서 대한민국 사회에 충분히 익숙한 노래가 된 ´돈데보이 Dónde voy'라는 노래를 기억한다면, 멕시코와 미국을 가르는 국경 어디쯤에서 늘 있어 왔을 이주자들의 슬픔, 두려움, 혹은 막막함 등의 감정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국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 국경에 대한 미국 정부의 통제와 감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국경을 상상키 힘들었을 것이다. 시기에 따라 다소 느슨하거나 혹은 촘촘해진 감시는 있었다지만, 누구든, 맘 먹는다면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었다. 오히려 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후로도 미국 내 노동력이 부족할 때에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멕시코 노동자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때로 감시가 촘촘해져 월경이 수월치 않을 경우 '코요테 coyote' 혹은 '닭장수 pollero'라 불리던 월경 브로커에게 약간의 돈을 주면 상황이 해결되었다.

끊임없이 이주자들이 밀려왔고, 다양한 방법의 '밀입국'이 시기마다 유행의 양상을 달리하며 이루어졌다. 미국과 접한 멕시코 북쪽 국경에 위치한 거점도시들은 이주자들이 뿌리고 간 돈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자 하는 이주자들이 몰릴수록, 거기에 더해 미국으로의 밀입국이 어려워질수록 이 도시들의 경제는 화려해졌다. 그렇게 멕시코 북쪽 국경에서 미국을 향해 가는 이주는 오랜 역사 속에 만들어진 문화였으며, 늘 존재하던 일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다. 국경을 넘으려는 자와 국경을 막으려는 자 사이의 긴장이 날이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그간 역사였고 문화였던 '월경'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운 혹은 신의 가호에 맡길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몇백 달러 수준에서 수만 달러 수준까지 수직 상승한 액수를 지불하고 '코요테' 혹은 '닭장수'라 불리는 월경 브로커를 고용한다 해도 더 이상 성공이 보장되는 일이 아니다.

그마저 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 앞에 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자신의 목숨이다. 도무지 사람이 건널 수 없는 곳이기에 국경에 대한 감시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사막이나 강물 속으로 목숨을 건 채 뛰어든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에 다름이 아니다. 그들의 한 켠에 두 살배기 어린 딸을 안은 채 강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죽어서도 미국에 닿지 못한 채 딸과 함께 멕시코 쪽으로 밀려온 젊은 아빠 오스칼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젊은 아빠 오스칼과 어린 딸 발레리아는 멕시코가 아닌 엘살바도르 출신이다. 오스칼(25)은 수도 산살바도르 피자가게 점원으로 일을 했고 아이의 엄마 타니아(22)는 중국 식당 점원으로 일을 했다. 둘이 하루 열 시간 이상 일을 하며 벌었지만, 한 달 수입 미화 600달러 정도였다. 아빠 오스칼은 작은 집이라도 자신의 집을 가지고 싶어 했다. 결혼 이후 아이가 태어났지만 여전히 어머니 집에 얹혀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지난 4월 작은 가방 하나를 꾸렸고, 그렇게 이 가족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여정은 줄곧 육로로 이어졌다. 엘살바도르에서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 남쪽 국경에 닿았고, 멕시코 입국 당시 비교적 쉽게 사증을 얻을 수 있었다. 작년 10월 이후 중앙아메리카에서 미국을 향해 가는 '이주자 카라반'이 형성되고 수만 명의 이주자들이 멕시코를 통과해 미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멕시코 정부가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한 사증이다.
 
발레리아 가족의 여정
 발레리아 가족의 여정
ⓒ 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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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족이 멕시코에 입국한 이후 미국 국경에 닿기 위해 택한 루트는 멕시코의 가장 동쪽 마타모로스를 향해 가는 '대서양 연안' 루트였다. 대서양 연안 전역에 걸쳐 치안이 부재하다시피 해 멕시코를 통과해 가는 이주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루트 중 하나이지만, 거리상으로 그 어느 루트보다 짧은 여정이다. 이주자들에 대한 지원 시설이 비교적 많은 태평양 쪽 도시 티후아나(Tijuana)로 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나, 그러기 위해서는 멕시코 남쪽 국경을 넘고도 3000km를 더 이동해야 한다. 대신 대서양 연안을 따라  타마울리파(Tamaulipa) 주의 마타모로스까지는 1200km 안팎이다. 그리고 바로 그 건너가 미국 텍사스 주 브라운즈빌(Brownsville)이다. 9미터 혹은 15미터에 달하는 높이의 장벽은 없지만, 미국에 닿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리오 브라보(Rio Bravo), '사나운 강'을 건너야 한다.

발레리아의 가족은 집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인 지난 5월 중에 이곳 멕시코 북쪽 국경 마타모로스(Matamoros)에 닿았다. 그간 멕시코를 통과하면서 가족들과 통화한 바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발레리아의 아빠 오스칼은 이곳에서 미국 측 국경검문소를 통해 난민 신청을 할 생각이었다. 치안이 완전히 부재하다시피해 세계적으로 살인율이 가장 높기로 유명한 도시 산살바도르에서 지속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난민 신청의 이유였다.

발레리아의 가족뿐 아니라 멕시코를 통과해 미국 국경에 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이유였다. 내면적으로야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폭력에 의한 생명의 위협이 이들 사이에 공식과도 같은 이유였다. 이들의 이유가 한결 같듯이, 미국의 입장 또한 한결 같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 난민을 신청하고자 한다면, 안전한 제3국을 통해 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현재 그들이 머무는 멕시코에서 난민 신청을 하라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

지난해 10월 이후 수만 명의 중앙아메리카 출신 이주자들이 '이주자 카라반'을 형성하면서 멕시코를 통과하여 미국 남쪽 국경에 닿아 난민신청을 하고자 하였지만, 미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들의 출신국인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정부에 그간 이루어진 경제적 지원을 당장 끊겠노라 협박하였고, 이주자 카라반의 통과를 허락한 멕시코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멕시코 정부에 대해서는 2019년 6월 초까지 이들의 통과를 제제하지 않을 경우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모든 물품에 5% 이상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더욱이 멕시코 정부가 관세 부과 이후에도 이들의 통과에 대한 제제를 가하지 않을 경우 매달 관세를 5%씩 인상하여 2019년 10월까지 총 25%의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6월 10일로 정해진 관세 부과 개시일이 다가오면서 멕시코 정부도 긴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외교부 장관이 미국으로 직접 날아가 협상을 시작하였고, 결국 당사국이 미국에 가장 많은 수의 이민자를 보내는 상황이라 자국에 들어오는 이주자들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었던 기존의 입장을 철회함과 동시에 이들의 입국을 통제하고 이미 들어온 이들에 대해서도 추방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게 된다.

미국의 관세 부과 압박에 밀린 멕시코 정부의 발표와 함께, 발레리아의 가족은 국경과 국경 사이에 갇혀 버렸다. 그들이 한 달 넘게 진치고 있던 멕시코 마타모로스 건너 미국의 브라운스빌 국경이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달리 해 볼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수중의 돈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멕시코 내에서도 중앙아메리카에서 올라온 이주자들로 인해 자국의 경제가 압박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주자들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아이를 안은 채 이곳까지 온 발레리아 가족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온 길을 되짚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선택, 목숨을 걸어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어떻게든 아이와 함께 미국 땅에 닿게 된다면, 아이 때문에라도 즉시 추방 대신 미국 내 보호소에 수용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수일 동안 진을 치고 있던 곳 바로 앞의 강만 건너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아빠가 강을 건너는 사이, 엄마는 강 이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그들이 먼저 미국에 닿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을 향해 가던 수많은 이주자들처럼 미국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또한 숱한 이주자들처럼 미국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이 걸었던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 발레리아의 죽음으로 세간의 이목이 주목되는가 싶더니, 미국의 단호함 앞에 그마저도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멕시코와 접한 미국의 국경 어딘가에선 발레리아와 같은 어린아이를 안은 채 미국에 닿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미국 정부가 15미터가 아니라 150미터 높이의 장벽을 세운다 해도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상황이 좋아지지 않는 한 이들의 미국을 향한 이주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와 같은 나라들이 처한 지금의 상황이 미국과 얽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한 지금의 미국 역시 이들의 이주로부터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저자 소개
림수진(Lim, Su Jin),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Facultad de Ciencias Políticas y Sociales, Universidad de Colima)
 
일곱 살 먹던 해 겨울, 할머니를 따라 서울에 갔습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서울역 광장에 단아하게 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울역사 앞에서 짜릿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각인이었습니다. 이후 늘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였습니다. 결국, 이다음에 크면 반드시 관광버스 운전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진 못하였습니다. 대신, 지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핑계 삼아 원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 서른 살이 되던 2001년, 코스타리카로 갔습니다. 19세기 말 파나마 운하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의 증손자 쯤으로 신분을 둘러대고 커피밭에 '위장취업'을 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커피를 따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하루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저 '불량노동자'를 걱정하며 자신들이 딴 커피와 음식과 마음을 나눠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대부분이 니카라과에서 건너온 불법 이주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들의 삶을 좇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06년 이후 현재, 멕시코 콜리마주립대학교 정치사회과학대학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주', '국제분쟁', '지정학'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2010년 이후 멕시코 연방정부 고등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국가연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커피밭 사람들: 라틴아메리카 커피 노동자, 그들 삶의 기록>, <21세기 중앙아메리카의 단면들:내전과 독재의 상흔>, <세계의 분쟁(공저)>, <디코딩라틴아메리카: 20개의 코드(공저)>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제휴사인 <참소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중앙아메리카, #림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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