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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정독도서관은 '책을 정독하다'할 때의 '정독'(精讀)에서 명명된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다. '독서법'을 이름으로 삼은 드문 도서관이라 생각한 게다.

근래 들어 '다독다독 도서관' 같이 독서법을 연상시키는 도서관이 생겨나고 있지만, 독서법을 도서관 이름에 넣은 건 흔치 않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정독도서관의 정독은 '정독'(精讀)이 아닌 '정독'(正讀)이었다. 굳이 뜻을 풀이하자면 '정밀하게 읽는다'가 아니라 '바르게 읽는다'라는 뜻이다. '바른 독서'와 '바르지 않은 독서'는 또 뭐란 말인가.

'독서법'이 이름인 도서관?
 
정독도서관의 ‘정독’은 ‘정독’(精讀)이 아니라 ‘정독’(正讀)이다. 도서관 현관에 내걸려 있는 저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서관 이름을 지었다.
▲ 정독도서관 입구 정독도서관의 ‘정독’은 ‘정독’(精讀)이 아니라 ‘정독’(正讀)이다. 도서관 현관에 내걸려 있는 저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서관 이름을 지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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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정'(正)과 독서의 '독'(讀)자를 한 글자씩 따서 명명한 이름이란 걸 알았다.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대통령의 '정'과 육영수 여사의 '수'를 한 자씩 떼서 만든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정독도서관 입구에 내걸려 있는 '정독도서관'(正讀圖書舘) 글씨도 박정희가 직접 썼다. 

어쨌거나 '정독'(正讀)을 '정독'(精讀)이라고 생각했으니, 도서관 이름에 대한  '오독'(誤讀)도 이만한 오독이 없었던 셈이다. 한편 서울을 대표하는 도서관에 박정희 시대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것을 알고 씁쓸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정독도서관은 왜 박정희의 이름을 달게 되었을까?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은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강북, 특히 종로구와 중구에 있던 명문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경기고, 서울고, 양정고(1980년대 양천구로 이전), 배재고, 휘문고, 보성고, 중동고, 경기여고, 창덕여고, 숙명여고, 진명여고(1980년대 양천구로 이전), 정신여고 같은 명문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평준화'는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 시행되었다. 1975년부터는 대구, 인천, 광주 같은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고교 평준화 시행 후 고등학교 입학은 '시험'이 아닌 '추첨'에 의해 배정되었다. 고교 평준화와 함께 명문고가 강남으로 옮기면서, 이른바 '강남 8학군' 시대가 열렸다.

공교롭게 중학교 입시 폐지, 고교 평준화 같은 정책은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의 진학 시기와 맞물려 추진되었다. 이 때문에 '대통령 아들'을 위한 교육 정책 개편이라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강남 개발과 명문고의 강남 이전
 
서울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기 위한 정책 중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은 강북 명문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체비지를 학교 용지로 지원하는 혜택을 제시하고, 명문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명문고등학교 서울시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하기 위한 정책 중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 것은 강북 명문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체비지를 학교 용지로 지원하는 혜택을 제시하고, 명문고등학교의 강남 이전을 추진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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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의 강남 이전 과정에서 경기고등학교 이전은 학교와 동문의 반발이 거셌다. 서슬 퍼런 유신헌법 선포 후 터진 경기고와 동문의 반발에 박정희 정권도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반발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경기고등학교의 유서 깊은 교정을 '도서관'으로 바꿔 유지하겠다는 타협책을 내놓았다. 학교 교사를 도서관으로 보존한다는 대책이 발표되자, 경기고등학교는 1976년 2월 20일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했다.

도서관 개관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1975년 12월 16일 발표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이름을 딴 '정독도서관'이라는 이름이 함께 공개되었다. 도서관 공사는 1976년 5월 31일부터 시작했고, 공사비는 3억 4천여만 원이 들었다.

1977년 1월 4일 개관한 정독도서관은 직원이 98명이나 근무하는 매머드급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장서는 3만 4천 권, 열람석은 남산도서관의 2배인 2868석을 갖춘 규모였다. 개관 당시 교실 3개를 하나의 열람실로 터서 열람실 12개를 갖췄다. 정독도서관은 열람석 수를 기준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공공도서관이었다.

개관하자마자 정독도서관에 자리를 잡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수천 명이 줄을 서는 풍경이 이어졌다. 인파에 떠밀려 행인이 길 옆 축대로 떨어져 다치는 사고도 잇따랐다. 도서관 측이 회초리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대기 행렬을 관리했다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도서관 좌석에 대한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 공공도서관의 '갑질' 이야기다.

열람실 안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화장실에 갈 때도 이용자가 가방을 비롯한 소지품을 챙겨 다니도록 했다. 직원이 열람실 앞을 지키고 앉아 있다가 가방 같은 소지품을 휴대하지 않으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용자가 서고에 출입할 때는 책 훔쳐가는 걸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점퍼 같은 상의를 벗고 출입하도록 했다. 군사 정부 시절이라지만 그 시절 도서관은 '고압적'이었다.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은 임시 당사로 정독도서관을 고려했다. 민주공화당 시절부터 도서관 건물을 '애용'한 전력이 있어서일까. 3당 합당 과정에서 출현한 보수대연합 세력은 도서관을 새 보금자리로 검토했다.

정부 수립 이후부터 도서관을 외면해온 집권 세력이 갑자기 도서관에 관심 가졌을 리는 없다. 그저 도서관이 만만했던 게 아닐까. 정독도서관을 당사로 쓸 경우 새 도서관을 지어줘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민자당은 여의도에 당사를 마련했다.

급진개혁파는 왜 '규장각'을 없애려 했을까?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주변은 김옥균 집터로 알려진 곳이다. 김옥균 저택은 홍현에 자리해 ‘홍현댁’이라 불렸다. 정독도서관 안에 김옥균 집터 표석이 서 있다.
▲ 김옥균 집터 표석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는 서울교육박물관 주변은 김옥균 집터로 알려진 곳이다. 김옥균 저택은 홍현에 자리해 ‘홍현댁’이라 불렸다. 정독도서관 안에 김옥균 집터 표석이 서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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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 터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 김옥균과 서재필 집터였다. 1851년 2월 23일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난 김옥균은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김옥균은 양반뿐 아니라 시정잡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람을 사귀었다. 그는 음주와 가무, 주색잡기에도 능했다. 망명지인 일본에서 글씨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서예에 능했다. 바둑은 일본 바둑사에 기록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투전, 골패 같은 노름 실력마저 출중했다.

임오군란 후 개화파 관료는 청의 간섭을 받아들이는 '온건 개화파'와 이에 반대하는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1884년 8월 청나라와 프랑스는 베트남 문제로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이 터지자 청은 조선에 있던 군대 3천여 명 중 절반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급진 개화파는 청불전쟁으로 청나라 군대가 줄어든 이때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는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에서 민씨 정권의 고위 인사를 처단했다. 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33세, 홍영식은 29세, 서광범은 25세, 박영효는 23세, 서재필은 20세였다. '피끓는 청춘'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곧바로 정변을 주도한 세력은 '혁신정령'(革新政令) 14개 조를 발표하며 새 정부를 세웠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급진 개화파가 발표한 14개 조항의 '혁신정령'을 살펴보면, 그들이 정권을 잡은 후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알 수 있다. '혁명'이 아닌 '친위 쿠데타'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급진' 개화파의 '혁신정령'은 '급진적'이지 않았다.

14개 조의 '혁신정령' 중 "규장각을 혁파할 것"(奎章閣革罷事)이라는 조항은 '도서관'과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급진 개화파는 왜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없애자고 주장한 걸까?

일부에서는 규장각 각신을 독차지한 여흥 민씨, 안동 김씨, 광산 김씨 같은 외척과 문벌(門閥)을 타파하기 위한 조항이라고 해석한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을 지낸 박은숙은 <갑신정변 연구>에서 외척과 문벌 타파보다는 왕실의 정치적 개입을 막기 위한 조항으로 보았다. 왕실과 정부 업무를 분리하기 위해 그 연결고리였던 규장각 폐지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 해석이 무엇이건 우리 역사에서 '도서관'을 개혁 대상으로 언급한, 흔치 않은 사례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죽음'을 당한 김옥균
 
1851년생인 김옥균은 21살 때인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인간 관계가 폭 넓었고 다재다능했다. 뛰어난 재능과 함께 인간적인 약점도 많았던 그는, 신복룡 교수의 평가처럼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 김옥균의 모습 1851년생인 김옥균은 21살 때인 1872년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인간 관계가 폭 넓었고 다재다능했다. 뛰어난 재능과 함께 인간적인 약점도 많았던 그는, 신복룡 교수의 평가처럼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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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은 청나라 군대의 신속한 개입과 일본의 철수로 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3일 천하'라고 불리지만 갑신정변은 46시간 만에 끝났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을 비롯한 9명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에 참여한 사람 중 23명은 사형(능지처사 또는 참형)에 처해졌다. 20명은 분노한 군중에게 피살당했다. 부모, 형제, 처자는 연좌법으로 교수형(4명)에 처해지거나 수감(6명) 또는 유배(4명) 당하고, 노비(9명)가 되었다. 7명은 자살했고 2명은 피살당했다. 3명은 도피했다. 홍현에 있어서 '홍현댁'(紅峴宅)이라 불린 김옥균의 집도 분노한 민중에 의해 불탔다.

일본에서 10년 동안 망명했던 김옥균은 1894년 3월 28일 상하이에서 네 번째 자객 홍종우가 쏜 육혈포 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는 일본에 맞서,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고 싶어한 혁명가 김옥균은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갑신정변 세력과 친분 있던 유길준이 쓴 김옥균의 '묘비명'은 이렇다.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을 당했구나."(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

국내에서 엇갈린 평가와 달리 북한에서는 '한국 근대사 4대 인걸'로 김옥균, 박은식, 신채호, 주시경을 꼽는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와 김일성 모두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 세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체제 대결을 벌인 두 사람의 평가가 '일치'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개화파를 가까이 지켜보았고,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던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개화파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살았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곧 그들 조국의 무궁한 번영이었다. 조선이 그것을 원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찬사가 줄어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충의는 어느 누구보다도 순수한 것이었다."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에도 시대 무사인 료마는 사쓰마와 조슈의 ‘삿조동맹’(薩長同盟)을 이끌어냈다. 삿조동맹은 1867년 11월 9일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넘기는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으로 이어졌다. 료마는 일본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일본인이 가장 추앙하는 인물 중 하나다.
▲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에도 시대 무사인 료마는 사쓰마와 조슈의 ‘삿조동맹’(薩長同盟)을 이끌어냈다. 삿조동맹은 1867년 11월 9일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넘기는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으로 이어졌다. 료마는 일본 근대화의 발판을 마련한 인물로, 일본인이 가장 추앙하는 인물 중 하나다.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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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함께 박규수 집을 드나들며 개화사상을 접한 김윤식도 개화파에 대해 이런 언급을 남겼다.

"갑신정변이 끝내 실패하자 세상이 그들을 가리켜 역적이라 하기에 정부에 몸담은 나도 그들을 성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양쪽 사람의 마음을 비교해보건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의 의도는 나라를 걱정하는 데서 나온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사 새로보기> 등을 쓴 신복룡 교수는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를 이렇게 평했다.

"개화파는 비록 당시에는 슬픈 애국자요, 급진적 선각자요, 고립된 자유주의자였으나, 그들의 사상은 분명 한국 근대화의 기폭제였다."

<조선의 못난 개항>을 쓴 문소영 기자는 김옥균을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나란히 비교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전환기에 '풍운아' 같은 삶을 살다가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김옥균은 사카모토 료마와 비견할 만한 사람일지 모른다. 폭넓은 교유 관계를 가졌다는 점을 비롯하여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한일 두 나라의 근대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은 '역적'으로 한 사람은 '영웅'으로 상반되게 기억되고 있다.

김옥균, 그의 실패가 안타까운 것은 풍운아로 살다 간 그의 시대가 풍전등화 같은 '비상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의 정변이 성공했더라도 조선이 식민지 전락을 피하고 근대화의 길을 걸어갔을지는 알 수 없다. 박은숙의 표현처럼 '애국적 혁명가'와 '매국적 반역자' 사이에서 평가는 이어지겠지만, 영웅이 되지 못한 실패한 혁명가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지속되지 않을까.

갑신정변은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이라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갑신정변은 '외세 의존'과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도 지녔다. 

혁명은 혁명의 이름으로 혁명을 배신한다고 했던가. 정변의 실패는 급진 개화파의 '전멸'로 이어져, 개화와 근대화의 동력을 잃고 식민지 전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갑신정변은 왜 '실패'했을까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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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려는 시도, '개혁'(reform)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레온 바라다트(Leon P. Baradat)가 주장한 것처럼 개혁은 방향(direction)과 깊이(depth), 속도(speed), 방법(method) 4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갑신정변 주역이 내걸었던 '혁신정령'은 10년 후 갑오경장을 통해 대부분 수용되었다. 그들이 추구한 '방향'이 시대정신(zeitgeist)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근왕과 종친부 강화를 시도한 정변 주역의 생각이 '깊이' 면에서 충분한 것이었을까.

정적을 제거하고 왕을 볼모로 정권을 잡았지만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자주'를 주장하면서 '외세'를 끌어들인 탓에 친일 매국세력으로 몰리면서 정변이 실패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깊이'뿐 아니라 '속도'와 '방법' 면에서 이미 실패를 잉태한 건 아닐까.

신복룡 교수는 갑신정변 실패 원인으로 네 가지를 지적했다.

"정변 주도 세력의 조급성과 과격함, 개혁의 동력인 민중과 괴리, 경륜보다 앞선 이상, 일본을 끌어들여 친일 매국 세력으로 전락."

급진 개화파라는 개혁의 주체는 있었지만 개혁의 동력인 지지 세력을 민중으로부터 확보하지 못했고, 개혁을 원하는 시대의 성숙을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감했으나 과격했고 조심할 부분에서 조급했다. 혈기가 넘쳤으나 지혜롭지 못했다. 시대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시대를 앞서가려다가 결국 시대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개화의 선각자였으나 시대의 선도자는 되지 못한 것이다."

갑신정변은 사건 당시 '만고에 없던 변란'과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한 사건'(賣國背宗)으로 평가받았다. 갑신정변 과정에서 조선과 일본이 맺은 한성조약과 청과 일본이 맺은 텐진조약은 이후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청이라는 늑대를 몰아내기 위해 일본이라는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행위였다'는 비판은 이로부터 나왔다. 

갑신정변에 대한 방대한 연구서를 낸 박은숙은 김옥균이 주도한 정변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갑신정변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부분적으로 근대적 요소를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혁명과 거리가 멀지만,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혁명적 사건이다."

갑신년의 '거사'가 '혁명'이 아닌 '정변'에 그친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평가는 이어지겠지만 위.아래로부터의 근대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갑신정변의 실패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갑신정변'은 135년 전의 '과거사'에 불과한 걸까. '개혁'이 절실한 우리 시대에 갑신정변의 실패는 어떤 교훈을 던질까? 우리 시대의 개혁은 방향과 깊이, 속도, 방법 면에서 성공의 조건을 갖춘 걸까.

'필립 제이슨'을 아시나요?
 
송재 서재필은 1864년 태어나 1951년 세상을 떠났다.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 콜롬비안의대를 졸업했다. 서재필은 서구 의술을 익힌 한국인 최초 의사이기도 하다. 서재필의 집터는 지금의 정독도서관 건물 앞, 즉 옛 경기고등학교 운동장 일대였다.
▲ 서재필이 근무한 미 육군 의학 도서관 송재 서재필은 1864년 태어나 1951년 세상을 떠났다.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 콜롬비안의대를 졸업했다. 서재필은 서구 의술을 익힌 한국인 최초 의사이기도 하다. 서재필의 집터는 지금의 정독도서관 건물 앞, 즉 옛 경기고등학교 운동장 일대였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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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도서관은 서재필의 집터이기도 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남 동복군 문덕면 가천리(지금의 보성)에서 태어났다. 1882년 문과에 합격한 그는 1883년 일본 도야마(戶山) 육군학교에서 공부했다. 서재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김옥균의 권유로, 그는 '문인'으로 과거에 급제해 '무인'의 길을 걸었다. 일본 유학을 마친 후 1884년 귀국해서 조련국 사관장에 임명되었다.

스무 살 때인 1884년 12월 4일 서재필은 갑신정변에 가담했다. 그는 갑신정변 주역 중 '막내'였지만 '행동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갑신정변 때 서재필은 고종이 머문 경운궁 경계를 맡았다. 경계가 느슨했던 탓인지 고종에게 밀서가 전달되며 창덕궁 환궁의 빌미를 제공했다. 정변 실패 후 그는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서재필의 부모, 형과 아내는 음독자살했다. 동생은 참형을 당하고 아들은 굶어 죽었다. 부모, 형제, 자손까지 삼족이 죽음에 이르는 '멸문'을 당한 것이다. 망명 후 일본 정부가 냉대하자 그는 1885년 4월 26일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서재필은 1886년 9월 필라델피아 힐만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1888년 졸업했다. 1888년 6월 19일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이름을 바꿨다. 같은 해 가을 서재필은 워싱턴에 있는 미 육군 의학도서관(the Library of the Surgeon General's Office)에 동양서적 '사서'로 합격했다.

조선인 최초로 미국 정부의 관리가 된 사례인 동시에, 조선인 최초로 미국에서 '사서'가 된 사례다. 미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서재필은 동양에서 입수한 수천 권의 의학서적을 번역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담당했다. 의학도서관에서 일한 경험은 그가 의사의 길을 걷는 데 영향을 미쳤다.

서재필은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을 이어갔다. 1889년에는 콜럼비안의과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했다. 1892년 3월 졸업하면서 그는 한국인 최초로 서양 의사가 되었다. 1894년 6월 20일에는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재혼했다. 그로부터 한 해 뒤인1895년 12월 20일경 미국인 국적으로 조선으로 돌아왔다. 역적으로 등진 고국에 미국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해서 발행했다. '신문의 날'이 4월 7일인 것은 <독립신문> 창간호가 나온 날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순한글로 발행된 <독립신문> 한글판 편집과 교정을 맡은 사람은 주시경이다. <독립신문> 창간에 이어 서재필은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1897년 11월 20일에는 명과 청나라 사신을 맞던 '영은문' 근처에 '독립문'을 완공했다. 명과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바꿔 독립협회 공간으로 활용했다.

고국에서 활동이 여의치 않자 그는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다시 떠났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 베어와 필라델피아에서 월 디머 제이슨 상회(Deemer and Jaisohn Company)를 운영했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한 후에는 해외 독립운동을 하면서 의사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1947년 1월 서재필은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초청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방송 연설과 강연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자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럴 마음이 없었던 그는 대통령 입후보할 뜻이 없음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1년 1월 5일 송재 서재필은 필라델피아 근처 노리스타운에서 숨졌다. 그의 유해는 1994년 4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묻혔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갑신정변에 가담한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세웠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해외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신동준의 평가처럼 서재필은 '독립'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한편 미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 서재필은 근대 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 최초의 사서'다. 동농 김가진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 흔치 않은 '도서관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비추어 그의 집터였던 정독도서관에 표석 하나 없는 것은 아쉽다. 

(* 정독도서관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정독도서관’을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정독도서관, #박정희, #경기중고등학교, #김옥균,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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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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