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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24일 오전 홍콩 노스포인트 한 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시간이 시작된 직후 부터 시민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구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지난 24일 오전 홍콩 노스포인트 한 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투표시간이 시작된 직후 부터 시민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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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의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친중국파는 452석 중 60석을 얻는 데 그쳤다. 범민주파는 388석을 차지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투표율은 71.2%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1997년 중국 반환 이래 구의회를 장악해 왔던 친중국파는 이번 참패로 소수 세력이 되고 말았다.

지난 6월 3일 103만 명이 반대 시위를 벌여 세계적 주목을 끌며 반 년 가까이 진행된 범죄인 송환법 사태가 범민주파의 구의회 장악으로 귀결됐다. 홍콩 당국이 반중국 시위를 진정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반중국 열기를 막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17년 7월 1일 제5대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으로 취임한 캐리 람은 2008년부터 중국 정부의 주목과 기대를 받았다. 그랬던 그는 금년 사태와 더불어 이번 선거로 인해 자신에 대한 중국 정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홍콩 문제를 사상 최악으로 악화시켰다는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캐리 람의 과거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24일 오전 홍콩 레이몬디 대학에서 구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24일 오전 홍콩 레이몬디 대학에서 구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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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캐리 람은 발전국 국장이었다. 발전국은 1997년 당시의 환경계획발전사무국(規劃環境發展事務局)이 세 차례 조정을 거쳐 2007년에 출범한 부서로, 국토교통부에다가 문화재청 기능을 더한 곳이다. 캐리 람은 발전국이 출범한 그해 7월 1일부터 2012년 6월 30일까지 국장을 역임했다.

그가 발전국장으로 취임할 당시, 홍콩 사회는 시설물 철거 문제로 대규모 갈등을 빚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 시위 장소로 유명했던 천성부두와 종탑 그리고 영국 군주와 총독이 상륙했던 장소인 황후부두를 철거하고 재개발하는 문제로 혼란스러운 양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황후부두의 원래 명칭은 '동상 부두(Statue Pier)'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영국의 전성기를 구가했을 뿐 아니라 영국·프랑스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나라를 굴복시킬 때의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년)의 동상이 근처에 있었다. 동상 부두란 명칭은 1924년 7월 31일 '여왕 부두(Queen's Pier)'로 개칭됐다.

중국 역사는 한국사나 일본사와 달리 여성 군주에 익숙하지 않다. 여성 군주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690년에 주나라(무주)를 세운 무측천도 황제가 아니라 황후로만 기억되고 있다. 황제 이전에 황후였다는 점을 근거로 측천무후로 불리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영국인들이 '여왕 부두'로 명명한 곳을 홍콩인들이 '황후 부두'로 부르게 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어떤 논문에서는 홍콩인들이 영어를 잘못 번역한 결과일 거라고 추측하지만, 그보다는 '여왕'을 중국식으로 재해석한 결과라고 봐야 옳을 듯하다.
  
중국 정부가 황후부두 등을 철거하려 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도시 개발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영국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2018년에 <중소 연구> 제42권 제3호에 실린 이종화 목원대 교수의 논문 '홍콩의 집단 기억과 시위 그리고 정체성 정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홍콩은 이민과 피난의 다문화 사회이자 영국의 식민지배를 통해 역사에 비로소 등장하면서 전통과 토착의 의미가 결여된 국제화된 도시 사회였기에, 운명공동체로서의 견고한 집단의식을 공유하기 어려운 구조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중국과 차별화되는 홍콩에 대한 상상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장소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장소의 상징성을 제거함으로써 집단 기억을 통한 홍콩 정체성이 구성되지 못하도록 하는 시도를 지속한다."
 
홍콩인들은 공통의 역사적 경험이 짧은 탓에 특정 장소를 매개로 심리적 통합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 중국 정부가 주목했다는 것이다. 논문은 중국이 그 같은 시도를 한 것을 "공유된 장소에 대한 기억이 제거되면 홍콩인의 운명공동체적 동질성도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면서 "천성부두, 황후부두 그리고 종탑 철거는 바로 장소성과 관련된 정체성 정치의 현장이었다"라고 분석한다.

'황후부두' 철거를 단행한 캐리 람
 
 2006년 '황후부두'(여왕부두) 철거를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단식투쟁 모습.
 2006년 "황후부두"(여왕부두) 철거를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단식투쟁 모습.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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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국의 의도가 알려지자 2006년에 홍콩인들은 철거 반대운동을 개시했다. 그런 장소들에 대단한 애착이 있어서 혹은 영국 식민지에 향수를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중국이 홍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한다는 공포심 때문에 홍콩 민중이 뭉치게 됐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구호들이 인상적이다. 시위대는 "황후를 살려주세요!" 혹은 "황후 SOS!" 등을 외쳤다. 시위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얼마 안 있어 널리 확산됐다. 2009년에 <동북아 문화연구> 제17집에 실린 장정아 인천대 교수의 논문 '우리의 기억, 우리의 도시: 집단기억과 홍콩 정체성'은 여론 확산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높아지는 반대 여론 속에서 입법회 의원들도 철거를 일단 중지하자는 의견을 냈고, 부두와 종탑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안, 또는 불가피하게 철거하더라도 근처에 다시 그대로 재건하는 방안 등이 제안되었다."
 
반대 여론의 고조 속에 철거가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이런 도중에 캐리 람이 발전국장에 취임했다. 이때 그가 보여준 행보가 중국 정부에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취임 1개월 뒤 그는 철거작업 마지막 단계인 황후부두 철거를 단행하면서 올해 보여준 것과 비슷한 모습을 나타냈다. "단식농성 중이던 이들을 모두 쫓아내고 철거를 강행"했다고 위 논문은 전한다. 민중의 저항을 과감히 제압하고 중국의 뜻을 관철시키는 이 모습이, 9년 뒤 그가 행정장관이 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홍콩인들의 저항이 심해질수록 중국 정부로서는 자신들이 믿을 만한 행정장관을 더욱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좀 과도하기는 하지만, 도널드 창 행정장관(재임 2005~2012)의 사례로 잘 드러난다. 홍콩 언론인이자 시진핑 전문가인 우밍이 쓴 <시진핑 평전>에는 후진타오 주석 시절에 시진핑이 목격한 도널드 창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진핑에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후진타오가 말을 할 때 도널드 창이 즉시 필기장을 꺼내어 황공무지한 모양으로 초등학생처럼 진지하게 기록을 하던 것이었다. 시진핑은 도널드 창의 이러한 노예 근성을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생각했겠지만, 모든 상전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캐리 람은 도널드 창만큼은 아닐지라도 중국의 뜻을 잘 따랐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런 류의 대리인이 홍콩 민중의 반발을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홍콩을 중국에 붙들어두는 데는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캐리 람은 홍콩 문제에 관한 한 중국의 경쟁자인 영국과 인연이 깊다. 영국 식민지배 하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캠브리지대학에서 유학한 경험도 있다. 남편을 만난 곳도 영국이다. 또 2007년까지도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름도 영국식이다. 남편 성을 따서 람(林)씨 성을 쓰고 있다. 원래 성은 광동어(광둥어)로 쩽(鄭)이었다.

물건 없애는 건 성공했지만... 사람 마음은 못 산 지도자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24일 오전 홍콩 레이몬디 대학에서 구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지난 24일 오전 홍콩 레이몬디 대학에서 구의원 선거 투표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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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친영국파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런 캐리 람이 2008년의 철거작업을 통해 중국 정부의 신임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행정장관까지 올랐지만, 임기 중반에 맞이한 송환법 사태와 선거 참패로 그는 역대 최악의 리더십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997년 이래 홍콩 민중과 홍콩 당국(중국 정부)의 대결에서 대체적으로 나타난 특징이 있다. 상대 진영이 동의하도록 만들려 하는 쪽은 대체로 패배하고, 상대 진영의 요구를 거부하는 쪽은 대체로 승리했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가 시도한 국가안전법 제정과 국민교육 강화가 홍콩인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실패한 것, 홍콩 민중이 시도한 행정장관 선거제도 개혁이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좌절된 것 등이 그런 경향을 보여준다.

민중 내부의 투쟁력도 워낙에 강하고 중국 정부의 영향력도 워낙에 강한 데다가 양쪽이 접점을 찾지 못하다 보니, 상대 진영이 동의하도록 만들려는 쪽은 패배하고 상대 진영을 거부하는 쪽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 정부를 감동시킨 캐리 람의 2008년 리더십은 그보다도 낮은 수준의 것이었다. 철거 작업은 홍콩 민중이 뭔가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물질적인 것(부두)을 없애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캐리 람의 시도가 비교적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송환법 사태는 홍콩 민중의 동의를 얻어내는 문제와 관련돼 있다. 캐리 람이 2008년에 보여준 리더십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정부가 2008년에 받은 강한 인상에 너무 집착해서 그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긴 결과가 지금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중국 정부가 모색해야 할 홍콩 리더십은 중국의 뜻을 홍콩에 관철시키려 하는 기존 수준에서 벗어나 홍콩 민중의 동의를 받아내는 수준의 향상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리더십을 구축하려면 지금의 리더십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앞에서 황공무지한 태도를 취하는 도널드 창과 비슷한 인물들로 홍콩 민중의 분노를 달래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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