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020 V리그 여자부 2라운드 최고의 빅매치로 꼽혔던 17일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와 GS칼텍스 KIXX의 맞대결은 경기가 열리기 전에 흥이 깨지고 말았다. '핑크폭격기' 이재영과 함께 쌍포를 형성하고 있는 흥국생명의 외국인 선수 루시아 프레스코가 맹장수술로 인해 GS칼텍스전을 포함해 약 2주간 자리를 비우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2라운드 경기 역시 1라운드처럼 GS칼텍스의 일방적인 승리가 전망됐다.

하지만 경기는 풀세트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이며 배구팬들을 열광시켰다. 수술로 빠진 루시아 대신 46.71%의 공격 점유율을 책임지며 프로 데뷔 후 가장 많은 40득점을 폭발시킨 이재영의 원맨쇼 덕분이었다. 1세트를 내준 흥국생명은 이재영의 맹활약 속에 2,3세트를 차례로 따내며 GS칼텍스를 궁지로 몰아 넣었다. GS칼텍스는 1세트 팀의 리더 이소영이 부상으로 코트를 떠나면서 흥국생명에게 크게 고전했다.

자칫 흥국생명에게 덜미를 잡힐 뻔 했던 GS칼텍스가 4,5세트를 연속으로 따내며 승점 2점을 챙길 수 있었던 비결은 4세트 초반에 투입된 이 선수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단 10번의 공격 시도에 그친 이 선수는 무려 70%의 성공률을 기록하며 승부처에서 알토란 같은 7득점을 올리며 GS칼텍스의 승리를 이끌었다. GS칼텍스뿐 아니라 6개 구단 공격수들 중에서 가장 신장이 작은 편에 속하는 '미친개' 한송희가 그 주인공이다.

리베로 제도 생기면서 서서히 사라진 단신 공격수들
 
 172cm의 단신 윙스파이커 한송희는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3라운드 3순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72cm의 단신 윙스파이커 한송희는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3라운드 3순위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 한국배구연맹

 
배구 경기에서 신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신장이 중요한 스포츠이기 때문에 가끔씩 등장하는 뛰어난 기량의 단신 스타들이 더욱 돋보이곤 한다. 한국 여자배구 역사상 최고의 단신 공격수를 꼽자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이자 호남정유(LG정유)의 겨울리그 9연패를 이끌었던 '악바리' 장윤희를 들 수 있다.

흔히 신장이 작은 윙스파이커가 주전으로 있으면 공격보다는 서브 리시브와 수비를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시 장윤희는 170cm의 작은 신장에도 최강팀 호남정유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책임지던 '거포'였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호쾌한 점프와 날카로운 스파이크는 물론이고, 당시 시도하는 선수 자체가 거의 없었던 후위 공격까지 구사했다. 물론 '질식수비' 호남정유를 대표하는 선수답게 수비 역시 국내 최정상급이었다.

하지만 1997년 리베로 제도가 도입되면서 국내 단신 공격수들은 점점 리그에서 자취를 감췄다. 단신 공격수로서 높이의 약점을 가지고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것보다는 수비전문선수로 활약하는 것이 선수생활을 오래 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해란(흥국생명)과 임명옥(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오지영(KGC인삼공사) 등 30대의 베테랑 리베로들은 대부분 성인배구 입단 후 공격수에서 리베로로 전향한 선수들이다.

단신 공격수들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다 보니 한수진(GS칼텍스) 같은 피해사례(?)도 등장했다. 201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GS칼텍스에 지명된 한수진은 수원전산여고 시절 센터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던 '만능 선수'였다. 하지만 한수진의 신장은 불과 165cm. 한수진이 아무리 다재다능한 선수라고 해도 프로에서 공격수로 활약하기엔 지나치게 작은 키였다.

결국 한수진은 프로 입단 후 레프트와 세터, 리베로를 떠돌며 자신의 포지션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시즌 리베로로 등록된 한수진은 원포인트 서버와 후위 수비수로 간간이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한수진의 드래프트 동기인 이원정(도로공사),김주향(IBK기업은행 알토스) 등이 프로 무대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반면에 전체 1순위였던 한수진의 프로 적응 속도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172cm의 단신 공격수 한송희, GS칼텍스의 '비밀병기'로 성장 중
 
 4세트에 투입된 한송희는 10번의 공격을 시도해 무려 7득점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다.

4세트에 투입된 한송희는 10번의 공격을 시도해 무려 7득점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다. ⓒ 한국배구연맹

 
전주 근영여고 출신의 왼쪽 공격수 한송희는 뛰어난 중앙 공격수 자원이 유난히 많았던 작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3순위(전체13순위)로 GS칼텍스에 지명됐다. 1라운드에서 선명여고의 윙스파이커 박혜민을 지명한 GS칼텍스는 2라운드에서 지명을 포기했다가 3라운드에서 다시 한송희를 선택했다. 그만큼 한송희는 드래프트 현장에서 썩 많은 기대를 받는 유망주가 아니었다. 

프로 데뷔 첫 시즌 정규리그와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한 경기씩 출전한 한송희는 지난 9월 컵대회를 앞두고 리베로가 아닌 윙스파이커로 이름을 올렸다. 물론 당시만 해도 안혜진 세터가 작년 컵대회에서 잠시 라이트로 출전했던 것처럼 대표팀에 차출된 이소영과 강소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임시 방편이라 여기는 배구팬들이 많았다. 프로 무대에서 윙스파이커로 활약하기엔 한송희의 신장(172cm)이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한송희는 컵대회 4경기에서 34.6%의 공격 성공률을 기록하며 18득점을 올렸다. 차상현 감독은 신장이 작은 한송희에게 "너에겐 작전 같은 거 없고 코트 들어가면 미친개처럼 물어 뜯으라"고 주문했고 한송희는 대담한 플레이로 배구팬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V리그 개막 후 주전들의 맹활약 속에 좀처럼 출전 기회가 없었던 한송희는 주전 윙스파이커 이소영의 부상으로 출전 기회를 잡았고 70%의 성공률로 7득점을 기록하며 승리의 주역이 됐다.

4세트 초반 181cm의 박혜민이 빠지고 172cm의 한송희가 투입될 때만 해도 흥국생명에서는 GS칼텍스의 공격이 메레타 러츠와 강소휘에게 집중될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고은 세터는 역으로 한송희에게 많은 토스를 올려주며 한송희가 상대 블로킹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에서 편하게 공격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컵대회부터 차근차근 준비시킨 GS칼텍스의 '비밀병기'가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지난 시즌 후위 수비수로만 2경기에 출전했던 한송희는 이번 시즌에도 17일 경기가 공격수로서 실질적인 리그 데뷔전이었다. 한송희는 리그 데뷔전에서 70%의 공격성공률을 기록하며 배구팬들에게 매우 강렬한 신고식을 치렀다. 이소영이 한 동안 결장이 불가피한 가운데 한송희는 박혜민과 함께 강소휘의 파트너 자리를 두고 다툴 전망이다. 과연 한송희는 V리그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신 공격수의 계보를 이을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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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GS칼텍스 KIXX 한송희 미친개 단신 공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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