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8 13:25최종 업데이트 19.11.1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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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폭격으로 폐허 된 충칭 시가지(충칭 진열관에서 찍음) ⓒ 조종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치장(기강)에서 충칭(중경)으로 이전한다. 충칭의 첫 번째 청사는 '양류가', 두 번째 청사는 '석판가'에 있었으나 일본군 폭격으로 모두 파괴된다. 이후 '오사야항'에 세 번째 청사를 마련했다가 1945년 1월 중국 정부 지원으로 투중구 칠성강 지금의 '연화지 청사'로 옮긴다. 이 청사는 임정 요인들이 환국하는 1945년 11월까지 사용하였다.

고난의 대장정을 끝내고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치, 군사, 문화, 외교 등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긴다. 치장 시절(1940년 3월) 임시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에 선임된 김구는 그해 5월 민족주의 진영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통합,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 9월에는 중국 정부 지원을 받아 한국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창설한다.
 

충칭에서 개최된 독립운동 좌·우 진영 통합 실현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 기념사진(1942년 10월) ⓒ 조종안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위원장 김구)(출처: 충칭 진열관 찍음) ⓒ 조종안

 
1940년 10월 주석제를 도입한 임시정부는 흐트러진 당·정·군 전열을 재정비하고 대일항전 태세를 강화한다. 좌우합작을 통해 흩어져 있던 독립군을 결합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전쟁 수행을 위한 체제 정비에 착수한다. 정비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김구는 주석 자격으로 대일 선전 성명을 발표한다. 이후 한국광복군은 연합군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잡고 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충칭. 상하이 시절 이후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독립운동 세력들도 임시정부 깃발 아래로 재집결한다. 1937년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광복군에 합류한다. 이때를 전후해 다른 세력들도 충칭에 집결한다. 상하이, 난징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와 애국 청년들도 김구와 임시정부를 찾아간다.


충칭 시절 임시정부는 대내외적으로 활기를 띠었으며 현판만 안 달았지 거의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김구 주석은 쉴 틈 없이 바빴다. 아홉 살 때(1932) 김구를 처음 봤다는 진국침(陳國琛·자싱 매만가 76호 건물주 천둥성 아들) 선생은 회고록에서 '임시정부 기숙사에서 숙식할 때 방학이 되어 그분(김구) 집무실에 찾아가 문안 인사드리고 다시 방학이 끝나 학교로 되돌아갈 때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뵙기가 힘들었다'고 회고하였다.

영욕의 역사 간직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일곱째 날(7일)은 충칭에서 시작했다. 오전 11시쯤 충칭역에 도착,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뒤 오후 1시경 탐방을 시작했다. 일행은 첫 방문지 토교촌에 갔다가 표지석(한인거주 옛터)도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으로 이동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지 진열관(아래 '연화지 청사 진열관')은 국내외 동포를 대표하여 독립운동의 중추를 담당했던 임시정부가 광복을 맞았던 역사적인 공간이다. 또한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으로 광복군을 국내로 투입할 준비까지 마쳤으나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자력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던 통한이 서린 건물이기도 하다.
 

미국 OSS와 국내 진공작전 대기 중인 광복군(1945년 5월)(출처: 충칭진열관 찍음) ⓒ 조종안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부대를 탈출한 동료들과 걸어서 중국 대륙을 횡단, 김구 주석을 만나 광복군이 되고, 이후 결사대에 자원, 서안(西安)에서 'OSS 유격훈련'을 마치고 국내 진입 작전을 기다리다가 광복을 맞이한 장준하(1918~1975) 선생은 신문 기고에서 '정문에 서서 보면 4층으로 보이는 임정 청사는 암석으로 된 언덕을 깎아 위로 연결시켜 지은 집이어서 꽤 웅장하게 보였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장강(양자강)과 가릉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있는 충칭은 수륙 교통이 발달한 물자 집산지로 볼거리도 많고 인구도 3000만을 상회한다. 도심지에 있었던 연화지 청사는 충칭 도시개혁 때(1991) 아파트 건설 단지로 묶여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중국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후손(이소심 여사, 당시 충칭 인민대표) 노력으로 임시정부 흔적들이 명맥을 잇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토교촌에서 출발한 버스는 30분쯤 지나 연화지 청사 진열관 부근 주차장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려 10분쯤 걸었을까. 웅혼한 기운이 감도는 연화지 청사 진열관이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복원한 충칭 임시정부 청사(연화지 청사) ⓒ 조종안

 
"이곳은 다섯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습니다. 1호 건물은 김구 선생 흉상을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소개하는 전시실이 들어서 있고, 2호부터 5호까지 건물은 임시정부 요원 및 정부기구 사무실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이 연화지 청사를 지키는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 정부의 이소심 여사가 애를 많이 쓰셨어요. 독립운동가 이달 선생 후손인데 재개발 계획을 반대하면서 우리 정부에 연락을 취하고 협상안을 내놓는 등 청사 복원에 크게 일조하신 분이죠.

(국무위원 회의실 가리키며) 저기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현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국무회의를 주관한 공간입니다. 문 대통령이 김구 선생 침상을 만지는 사진이 크게 회자됐어요. 그날 김정숙 여사와 김구 선생 흉상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방명록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정신입니다'라고 적었죠. 아까 얘기했죠. 애국지사 후손들, 그리고 우리 내각 요인들과 함께 저 계단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고."
 

김종훈 기자는 "연화지 청사는 장준하 선생과 김준엽 선생이 학도병 50명을 이끌고 오천 킬로 대장정을 해서 도착한 곳, 또 애국가를 부르며 도착한 곳이다. 그들이 도착하니까 정치 인사들 사이에 엄청난 계파 갈등이 일어났다. 말 그대로 젊은 학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난리가 난 거다. 그렇게 굉장했던 것도 당시 임시정부 현실이 그 정도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터'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구지(충칭 위중구)(출처: 충칭 진열관 찍음) ⓒ 조종안

 
다음 방문지는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터. 연화지 청사 진열관에서 걸음으로 약 15분 거리다. 기록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의 감시, 방해 공작, 폭격 등으로 자주 이전했듯 광복군 총사령부도 폭격과 복구로 여러 번 옮겨 다녔다. 제대로 된 사령부조차 없었으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는 1942년 이후 국군으로서 위용을 갖추게 된다.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터는 중국 상공은행 맞은편 추용로 37호(구 미원식당)에 있었다. 예전 건물은 진즉 철거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2017년 12월 충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요청으로 원형대로 복원될 거라고 보도됐다. 광복군 사령부가 국민당 군사위원회 건물 일부를 사용했다는 기록에 따라 역사전시관 형태로 복원될 예정이란다.

김종훈 기자는 "원래는 여기에 미원식당이 있었다. 작년에 왔을 때는 높은 가림막을 쳐놓고 있어 실망했다. 상공은행 직원들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모른다고 해서 복원이 안 될 것으로 알았는데, 1년 사이에 이렇게 건물이 완공되어 굉장히 뿌듯하고 감동적"이라며 감격해 했다.
 

복원중인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터(오른쪽 건물) ⓒ 조종안

 
"2014년 당시 대통령이던 박근혜가 시진핑에게 요청했어요. 그런데 사드 문제로 난리가 나서 씨알도 안 먹혔죠. 그러다가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왔을 때 베이징에서 충칭으로 넘어왔어요. 그때 결정돼서 2년 만에 아니 2년도 채 안 돼요. 1년 6개월 만에 이렇게 외관이 완성되고... 놀라운 건 해방기념탑 바로 밑에 있다는 게 너무 감동적입니다.

한 말씀만 더 드리면 어제(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 대통령이 좌·우 세력 합작으로 우리나라 군대 초석이 완성됐다는 뜻으로 말했잖아요. 아까 연화지 청사 갔을 때 독립군-조선의용군-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사진들이 쫘~악 일렬로 있었죠. 저는 그 사진 그대로 벌어지고 있고, 또 그 결과물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친일파 출신들이 어떻게 우리나라 육군을 만들었다고 그런 소리를 해요. 여기가 출발점인데. 아무튼 오늘 너무 좋습니다."
 

일행은 애국 청년들의 호국정신이 깃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본부 건물 계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함께 해요!"를 외치고 내려와 '임정로드 탐방' 마지막 코스인 약산 김원봉 집터로 이동했다.

헛헛함 느꼈던 약산 김원봉 집터
 

약산 김원봉 집터(오른쪽 붉은 간판 건물) ⓒ 조종안

 
약산 김원봉 집터는 남안구 탄자석 대불단정가에 있었다. 이곳은 의열단 의백, 조선혁명간부학교 교장, 조선의용대 총대장,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광복군 1지대 지대장 겸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지낸 약산이 1940년부터 광복이 되는 1945년까지 거주했던 건물이다. 이날은 신발가게로 사용되고 있었다.

김종훈 기자에 따르면 본래 자그만 집을 2층 시멘트 건물로 개조 복원해서 약산이 살았던 당시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구부러진 길로 한참 들어가니 시장 골목이 시작된다. 과일, 떡 등 먹을거리 노점상이 즐비하다. 상인들의 호객행위가 귀를 따갑게 한다. 확성기에 대고 열심히 말을 하는데 알아듣지 못해서 그런지 더욱 시끄럽게 느껴진다.

"이 건물이 약산 김원봉 장군이 5년 동안 살았던 집입니다. 오랫동안 약방으로 쓰이다가 2016년경 과일 집이었고, 작년에 왔을 때는 폐업 중인 옷가게였어요. 그런데 또 신발가게로 바뀌었네요. 작년 옷가게 주인은 이곳에 누가 살았는지 알고 있었어요. 한국에서 약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묻고 하니까 알았던 거죠. 과일가게 주인도 알았다고 그래요. 김원봉 이름은 몰랐지만 독립 영웅이 살았다는 것은 알았다는 거죠.

약산은 이곳에서 좌우합작도 이뤘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는 결과도 만들어냈고 아내 박차정 여사가 돌아가신 곳도 이곳이고, 재혼한 곳도 이곳입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은 곳도 이곳입니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만들어놓은 광복군 1지대 사령부 본부 자리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어요. 여기에서 그곳으로 출퇴근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도로로 바뀌어 확인할 수 없네요."
 

약산이 출퇴근했다는 광복군 1지대 사령부 본부 자리. 그곳 '손가화원'에는 1935년 난징에서 약산 김원봉의 주도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이 있었다. 건너편에는 화상산(한국인 공동묘지)이 자리하였다. 또한 약산의 집터와 광복군 1지대 사령부 본부 주소가 '남안구 탄자석'으로 검색되는 것으로 미뤄 두 곳이 한동네, 즉 지척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약산이 거주했던 집터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섯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엘리트 청년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인물로 백범보다 많은 현상금이 내걸렸던 김원봉, 그의 흔적은 상하이에도 항주에도 난징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신발가게가 유일한 흔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곳에서조차 그 흔한 표지석 하나 구경할 수 없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김종훈 기자는 "여러분 많이 헛헛하셨죠. 마지막 코스에서 헛헛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일행은 우렁찬 박수와 격려로 화답했고, '임정로드 4000km 완주!'를 외치며 자축하였다. 이어 충칭 상징요리 '훠궈'를 맛본 뒤 화려한 야경과 전통 야시장을 돌아보고 숙소로 방향을 잡았다.
 

김원봉 집터를 배경으로 포즈 취한 탐방단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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