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강경한 광주 시위진압.
 1980년 5월, 공수부대의 강경한 광주 시위진압.
ⓒ 5.18 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이날 광주진압에 나선 부대는 제20사단과 제31사단, 11공수여단 등이었다.

2만여 명의 병력과 전차 18대, APC 9대, 지휘용 500MD(헬기) 1대, 무장 500MD 헬기 4대, 수송용 헬기인 UH-1H와 일명 코부라 무장헬기 AH-IJ 2대가 동원되었다. 광주시민들까지 포함된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고 운영되는 군부가 마치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듯한 만용을 부린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지도부이면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구 전남도청 별관(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지도부이면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구 전남도청 별관(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김이삭

관련사진보기

 
3공수여단 특공조가 시민군을 무차별 타격ㆍ살상한 직후인 새벽 5시 16분경 도청 상공에서는 500MD와 AH-IJ가 요란스럽게 선회하면서 신군부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휴전선 상공과 한국해역에는 미군의 조기경보기와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진압작전을 보호하기 위해 '망을 보아주고' 있기까지 했다.

27일 새벽 도청에서 항쟁의 마지막 불꽃이 무참히 짓밞힘으로써 열흘간의 민중항쟁은 종말을 고했다. 시민군과 도청 항쟁지도부는 고도로 훈련된 공수부대 특공조와 2만여 계엄군, 그들의 엄청난 장비와 무기를 당해낼 수 없었다. (주석 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지도부이면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구 전남도청 별관(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지도부이면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구 전남도청 별관(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김이삭

관련사진보기

 
계엄군이 가장 먼저 쳐들어간 곳은 도청 본관이다. 항쟁지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3공수부대가 잠입부대였다. 이들은 예상을 깨고 도청 뒷담을 넘어 들어왔다.

당시 도청에는 200~500여 명이 남아 있었는데 진압이 시작되면서 여성을 비롯한 일부가 빠져나가고, 윤상원ㆍ김영철 등 학생 지도부 사람들과 4, 50명의 청년ㆍ학생들이 도청 민원실 건물에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본관 건물에 배치돼 있었다.
 
도청 민원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문 쪽을 향해 총구를 거누어 접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뒤쪽으로 침투한 특공대가 창문을 타고 들어와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윤상원 등 30여 명이 죽고 10여 명이 생포됐다. 도청 본관은 역시 뒤쪽으로 잠입한 특공대가 정문 진압에 대응하기 위해 복도에 나와 있던 무장시위대를 향해 발사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무실로 피신한 생존자들은 진압군과 맞서 싸우다 모두 체포당했다. (주석 4)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역시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8일 촬영한 사진. 도망치다 쓰러진 시민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군화발로 짓밟고 있는 뒤쪽으로 한 공수부대원의 M16소총에 대검이 뚜렷이 보인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 신복진

관련사진보기

 
당시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박내퐁의 증언이다.

30명의 시민군과 함께 도청 2층 강당에 있었는데 총성이 울렸다. 도청 정문으로 탱크와 장갑차가 들어오고, 뒷문 쪽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 도청 앞에 공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강당에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2층 계단으로 공수들이 들어오자 2, 3명이 화장실로 숨었다. 화장실에 있다가는 흔적도 없이 죽을 것 같아 손을 들고 나갔다. 우리를 본 공수들은 폭도들은 계단으로 내려갈 자격이 없으니 2층에서 나무를 타고 도청 마당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주석 5)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 근남로에서 가만히 서있던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루는 공수부대
 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 근남로에서 가만히 서있던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루는 공수부대
ⓒ KBS

관련사진보기

 
이 증언에 따르면 도청 정문으로 탱크와 장갑차를 진격시키고, 특수부대 요원들을 뒷문 쪽으로 투입시키는 교란작전이었음이 드러난다. 도청 옆에 자리잡은 YWCA에는 도청보다 조금 늦게 진입했다.

"문화선전조ㆍ고교생ㆍ근로자 등 20여 명이 남아 방어하고 있었다. 이곳 책임자는 들불야학 강학이며 YWCA 신용협동조합 직원인 박용준이었다. 군의 진압작전은 도청보다 조금 늦게 시작됐고, 2층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대응과정에서 박용준 등 2~3명이 사망했고 나머지는 자수했거나 체포당했다." (주석 6)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전남도청 진압 작전이 끝난 직후의 사진. 외신기자가 찍은 것을 고 문재학의 모친이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 좌측 상단의 3명의 인물이 5.18 미성년 사망자인 문재학, 안종필, 박성용(위쪽부터)이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전남도청 진압 작전이 끝난 직후의 사진. 외신기자가 찍은 것을 고 문재학의 모친이 복사해 보관하고 있다. 좌측 상단의 3명의 인물이 5.18 미성년 사망자인 문재학, 안종필, 박성용(위쪽부터)이다.
ⓒ 문재학 모친 제공

관련사진보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있었던 무장시위대 조성환의 증언.

지역 경비를 맡은 7~8명과 함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건물에 있던 중 잠깐 잠이 들었다. 새벽녘의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 우리는 총소리가 가까이 들리자 공중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순간 바로 옆 건물 옥상에서 우리를 향해 집중 사격을 했다. 우리도 그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내 친구가 총을 맞고 죽었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주석 7)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계엄군은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 공수부대이고, 시민과 시민군은 의기 하나만으로 최후까지 남은 민간인들이었다.


주석
3> 정상용 외, 앞의 책, 310쪽.
4> 정재호, 「5ㆍ18항쟁의 전개과정」,『5ㆍ18 그리고 역사』, 131쪽, 길, 2008.
5> 앞과 같음.
6> 앞의 책, 132쪽.
7>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형조참의 버리고 낙향했으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