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31 12:00최종 업데이트 19.10.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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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진섭 ‘자화상’ 1932년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기념 '광장' 전(10월 17일~2020년 2월 9일까지)은 1900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이다. 조선시대의 문인화적 정신을 계승한 서화를 비롯하여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 한국 근대 서양화 발전기를 장식한 뛰어난 작가들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이 중에 뛰어난 많은 양화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는데, 월북한 서양화가 길진섭(吉鎭燮, 1907-?)의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제작한 것으로 현재 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한동안 볼 수 없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소개되는 매우 반가운 작품이다.


당시 도쿄미술학교는 졸업 작품으로 '자화상'을 제출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니 '자화상'의 존재는 학교 졸업 여부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 초기 유학생과 김용준, 황술조, 길진섭 등의 자화상은 개인의 초상화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미술사의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들이다.

도쿄미술학교,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공부하다

길진섭은 1907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평양은 한국 근대 기독교의 발상지와 같은 곳이었다. 길진섭의 아버지는 초기 기독교 개척자 중의 한 명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였다.

길진섭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민족정신을 가슴 속에 새긴다. 1921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후 미술에 뜻을 두기 시작한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 함을 느끼고 서울로 이주하여 한동안 미술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1925년부터는 김관호와 김찬영이 평양에 설립한 '삭성회(朔星會) 회화연구소'에 다니며 서양화를 배운다.

이 시기 길진섭의 화가로서의 활동은 1921년에 시작된 서화협회전과 1922년에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서양화가로서 입신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이 두 단체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서화협회에 출품하였으며, 1925, 1927, 1928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길진섭은 공부의 미진함을 느끼고 일본의 도쿄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1932년 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서울에 정착한다. 그는 종로구 익선동 166번지에 살았는데, 현재 젊은이들이 환호하며 많이 모이는 탑골공원 근처 익선동 한옥 마을 한복판이 그의 집이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길진섭은 얼마 후 다시 도쿄로 건너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들어간다. 당시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는 일본인 화가로 세계적 명성이 있던 후지타 쓰쿠하루(藤田嗣治)가 선생으로 있으며,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미술 사조를 가르치던 단체였다. 이곳에서 후배들인 김환기와 김병기를 만나 함께 공부하며 훗날까지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낸다.

또한 길진섭은 이곳에서 만난 일본인 여학생 간노 유이코(管能由爲)와 사랑하기 시작하여 연인으로 발전한다. 이들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가 문을 닫자 도쿄에서 '백만회(白蠻會)'라는 단체를 조직해 전위적인 미술을 연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체는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고, 길진섭의 갑작스런 귀국으로 간노 유이코와의 만남도 끝을 맺는다.

목일회 활동과 문장지 창간 참여
 

‘목시회 양화전람회’ 안내지 1937년 ⓒ 황정수

 
길진섭이 한국으로 돌아와 열정적으로 활동한 미술모임은 '목일회(牧日會)'이다. 목일회는 1934년 이종우, 장발, 구본웅, 김용준 등과 함께 만든 양화 단체이다. 그는 목일회를 조직하고 전람회를 열면서 1930년대 미술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목일회'는 '목일(牧日)'의 '일(日)'이 일본을 나타낸다는 일본 당국의 의심에 따라 1937년부터는 '목시회(牧時會)'로 이름을 바꾼다.

이때부터 길진섭은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것을 꺼려하고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받은 민족정신과 목일회 사건을 겪으며 일본인들에게 느낀 반감이 어울려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반일의식은 훗날 남북 분단 과정 중 사회주의를 택하는 단초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1936년에는 도쿄에서 열리는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 '모자(母子)'라는 제목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어 1940년에는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다. 그때 평론가 윤희순은 '매일신보'에 "현대적 표현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라고 평하며 길진섭 작품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또한 길진섭은 일본 유학을 하며 친분을 쌓은 시인 정지용, 도쿄미술학교 동문인 화가 김용준 등과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 1939년에는 이들과 문예지 '문장(文章)'을 창간하였는데, 길진섭은 디자인 편집위원을 담당하였다. 이 당시 그의 작업은 여인, 꽃, 풍경 등 일상적인 소재를 주로 그렸는데, 간결한 필치와 풍부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 길진섭의 활동
 

길진섭 ‘정물’. 1930년대 해금작가 유화전(신세계 미술관, 1990) 도록 재촬영. ⓒ 신세계 미술관

 
해방이 되자 1946년에 서울대학교가 개교되고 미술학부가 생긴다. 이때 길진섭은 김용준 등과 함께 미술학부 교수로 취임한다. 미술계의 새로운 변화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조형예술동맹 부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서울지부 위원장 및 중앙위원장을 지내면서 좌익 성향의 미술계를 이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남한 미술계 대표로 몰래 입북하게 한다. 이후 다시 남쪽으로 오지 않고 북한에 정착하여 평양미술학교 교원을 지내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다. 그가 북쪽으로 간 것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된 것도 있지만, 본래 고향인 평양을 찾아간 인간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북쪽의 자료에 따르면 당의 주체적 문화사상과 문예방침에 맞추어 사상적, 예술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조선미술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평소 성격이나 작품의 성향을 보면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한 북한의 체제에 순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길진섭에 관한 두 가지 에피소드

길진섭과 관련된 이야기로 가장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이 숨을 거두었을 때 데스마스크를 떴다는 이야기이다. 화가 김병기의 술회를 기록한 책 <백년을 그리다>(윤범모 저, 한겨레 출판, 2018)에 따르면 이상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찍혀 일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겨우 풀려난다. 이 후유증으로 폐병이 도져 도교제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아쉽게도 스물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때 특이하게도 이상의 데스마스크를 뜨자는 의견이 나와 길진섭이 석고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석고가 굳은 뒤 벗겨냈더니 얼굴에 바른 기름이 모자랐던지 수염이 몇 가닥 같이 뽑혀 나와 그때서야 친구들이 "정녕 이상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 데스마스크는 이후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

한편 1949년 12월 신문에는 사상의 대립으로 남쪽으로 전향한 예술가가 북쪽으로 간 예술가에게 '자유를 찾아오라'고 충고하는 내용이 실린다. 그때 화가로서는 김만형이 나서서 북쪽으로 간 길진섭에게 소식을 전하는 내용을 실었다.

"미술계를 위해 군과 손잡을 대가는 무엇이던가? 오직 기만당했다는 분개뿐이다. 대한민국엔 철의 장막도 없고 속박도 없으며 모든 문화인들은 자유롭게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자유가 그립지 않은가. 북한 괴뢰집단의 모략과 기만을 군도 넉넉히 짐작했을 터인즉 군 자신의 진실로 돌아가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오라."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지고, 결국 김만형도 월북하였으니 세상의 일은 어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도쿄에 있는 제국미술학교를 수석 졸업한 김만형이나 명문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수재 길진섭이 북쪽으로 넘어간 것은 한국 미술계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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