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2019 부산국제영화제

2019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01.

한국. 남편과 이혼한 윤희(김희애 분)는 고등학생 딸 새봄(김소혜 분)과 함께 살고 있다. 새봄은 어느 날 우연히 엄마 윤희에게 온 편지를 읽고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엄마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이 나서 그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어한다.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일본 오타루.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 온 준(키노 하나 분)은 타지의 생활을 하는 동안 잊지 못한 기억 하나가 있다. 오래된 하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마음 속으로만 품고 살아온 그 기억을 꺼내 다시 한번 마주하고자 하는 그녀. 영화 속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 <윤희에게>는 전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서 부자간의 감동적인 모습을 그려낸 임대형 감독의 두번째 장편 작품이다. 전작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잔잔한 분위기로 부자간의 감동적인 정서를 전했던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소박하고 애틋한 시선으로 모녀의 관계와 사랑의 상실, 그리고 복원에 대해 표현해낸다. 이번 작품으로 임대형 감독은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 부산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다시 한번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02.

영화 <윤희에게>는 엄마 윤희와 준의 이야기가 서로 교차하며 진행되는 Two-way 구조를 기본으로 딸 새봄과 경수(성유빈 분)의 이야기가 서브 내러티브에 위치해 지지하는 방식을 가진 작품이다. 한국과 일본으로 구분되는 윤희와 준의 이야기가 서로 겹쳐질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새봄과 경수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셈이다. 이는 감독의 전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에서 표현되었던 구조, 모금산(기주봉 분)의 실제와 극 이야기가 마주할 수 있도록 스데반(오정환 분)과 예원(고원희 분)의 이야기가 존재했던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전작의 모금산과 이번 작품의 윤희가 공통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비밀 혹은 특정 대상에게 숨겨야만 하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깊게 관여한다. 그 사실이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예원에게도, <윤희에게>의 딸 새봄에게도 유효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만 국한해 따로 보자면, 새봄은 그간 엄마인 윤희가 꺼내지 못한 비밀에 다가감으로써 윤희라는 인물이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시작점이 되며,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단순하게만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하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작품이 주목하는 관계를 윤희와 준의 사이에만 국한시킨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난 작품에서도 봤듯이 임대형 감독의 작품 속에서는 하나의 관계만이 독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 서로 얽히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관계가 이끌어내는 감정들이 함께 시너지를 발휘한다. 이번 작품 <윤희에게>도 마찬가지. 윤희와 준 사이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윤희와 새봄, 새봄과 경수, 심지어는 윤희와 남편의 관계 사이에서도 이 작품을 붙들어내는 요소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하나의 버디 무비이자, 하나의 성장 영화이자, 또 하나의 로맨스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의외로 눈에 띄는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의 메인 스토리에서 벗어나 있는 윤희와 윤희의 오빠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윤희의 오빠는 극중 인물들 가운데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윤희의 과거를 정확히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반대로 이야기하면, 윤희에게는 자신의 삶을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와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부분이 딸 새봄에게까지 전이되어 '쓸데없이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형식으로 전달된다. 극의 마지막에서 윤희가 오빠의 그늘을 떠나고자 선언하는 장면이 그녀의 성장 서사에 마침표가 되는 까닭이다.

04.

"엄마가 더 외로워 보여서 잘 못살 것 같았어. 근데 다 내 착각이었네. 나는 엄마한테 짐이었네."(새봄)
"엄마는 나한테만 집중하는 사람이었어. 때때로 나 때문에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이었어."(준)


윤희를 통하지 않으면 연결 고리가 전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준과 새봄 사이에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공통적인 경험이 있다. 다만, 아빠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준의 선택과 엄마의 곁에 남아 지내기로 결정한 새봄의 결정에는 차이가 있다. 새봄이 엄마 윤희를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를 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준이 자신의 엄마를 떠났던 이유는 그녀의 곁에서 자신이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를 하게 된다.

오롯이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 결정을 하게 만든 배경이나 외부적 요인들, 혹은 그런 자신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막아서지 않은 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었더라도 (준의 경우에는 새봄의 경우가, 새봄의 경우에는 준의 경우가 그렇다) 마음에 남는 감정은 동일 했을지도 모를 터. 이것은 윤희와 준의 관계에서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지금도 서로의 꿈을 꾸고 있다는 말만큼 그 마음을 잘 대변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한편,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지점은 감독이 인물을 그려내는 지점에서 보여주는 깊은 사려다. 일반적으로 극중 하나의 캐릭터는 설정된 방향을 향해 당위성과 형체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각각의 내러티브를 이용해 나간다. 서로 다른 장면을 동일한 방향으로 쌓아 관객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인물은 관객의 이해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반적 사고를 외면적으로 차용하면서도 해당 인물의 또다른 장면을 통해 그 사고가 당연시하게 여겨지는 부분을 유연하게 빗겨낸다. 영화 속 주인공에 해당하는 윤희를 직조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다음과 같다. 왜 엄마와 헤어졌는지 묻는 딸 새봄의 말에 아빠는 '너네 엄마는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었어'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하지만, 새봄도 그런 아빠의 말에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관객들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은 영화의 메인 스토리인 '완성되지 못한 사랑'과 맞닿으며 이해되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그 이유에 대한 부분까지 쌓이게 되면 그 이해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의 위약을 감독은 명확히 짚어낸다. 영화의 시작에서 편지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말하던 준의 말, '나와 이모처럼 너도 겨울의 오타루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생각해.' 를 통해서 말이다. 준이라는 인물은 이미 윤희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낀 바 있고, 그 시점이 '완성되지 못한 사랑' 이전의 것이라는 의미는 '윤희'라는 인물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과도 동일한 것이니까.

06.

자신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의 감정에 대해 세밀하게 표현할 줄 아는 감독의 작품들은 언제나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한 모녀의 이야기와 여성의 사랑을 이토록 세심하게 이끌어낸 남성 감독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것은, 부자 관계의 이야기를 그렸던 전작에서 아무래도 극의 변두리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 여성 캐릭터를 전형화하거나 대상화 하지 않고자 했음에도 주변에 머물고 말았던 것 같다는 감독의 자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바라보는 인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방식이나 그 모습을 표현해내는 섬세한 감정들은 전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그가 앞으로도 가족이나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이처럼 표현해간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특별한 감독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그의 드라마가 쉬지않고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윤희에게 임대형 김희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