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정권탈취의 야심을 품은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2월 18일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강력히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군병력을 동원해서 정권을 탈취하려는 지침이었다.

소위 충정훈련은 공수부대라는 특전부대를 중심으로 대도시 부근에 주둔한 일반부대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실시되었는데, 이 훈련을 실시한 부대를 가리켜 '충정부대'라 했다.

충정훈련의 내용을 보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저지른 양민학살 만행이 결코 우발적인 사태가 아니라 사전에 잘 계획되고 조직된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다.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는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해당 부대는 강력한 충정훈련을 실시했다. 공수부대의 경우 원래 교육과정에서 1주일에 4시간 정도의 충정훈련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거의 모든 교육훈련을 포기하고 충정훈련만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이때 공수부대 병사들은 진압봉을 사용했는데 1980년 5월 18일부터 20일 사이에 대검과 함께 시민을 살상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된 흉기가 바로 그것이다. (주석 1)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전두환 측은 5ㆍ17 쿠데타에 앞서 치밀하게 정권탈취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그 실행은 노태우가 사령관인 수도경비사령부였다.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은 3월 6일 특전사령관, 4개 공수여단, 3개 사단의 부대장과 작전참모, 수도기계화사단장, 치안본부장, 시경국장 등을 소집했다. 2박 3일 동안 열린 회의는 수도권 소요사태 대비태세를 점검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들은 학생운동 주도세력을 맹목적 저항세력으로 규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하며,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4월 12일 이후에는 충정훈련을 위한 차량배치를 비롯해 항공기와 다양한 진입도구들이 지원, 보급되었고, 5월 6일부터 9일까지 '소요진압 준비태세' 점검이 이루어졌다.

경찰과 달리 공수부대가 5ㆍ18민중항쟁의 시위대를 잔인하게 진압했던 배경에는 이와 같이 오랜 기간의 준비와 훈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화려한 휴가'는 광주지역 일원에서 전개된 충정훈련의 별명으로 알려졌으나, 군의 공식문서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석 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당시 광주를 학살의 근거지로 삼아 시민을 적으로 둔갑, 무참히 살육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당시 광주를 학살의 근거지로 삼아 시민을 적으로 둔갑, 무참히 살육했다.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육군의 특전부대는 전두환 등과 인연이 깊다. 그가 창설의 주역 중의 하나이고, 광주학살 에 동원한 소속부대이기 때문이다.

특전부대는 또 매우 오랜 연혁을 가진 부대이다. 이 부대의 창설주역은 전두환, 최세창, 장기오, 차지철 등이다. 이들은 1960년 6월부터 6개월간 미국 포트배닝의 특수전 교육기관에서 늪지, 산악, 생존훈련 등 이른바 '레인저 트레이닝 코스'를 거치고 낙하훈련을 받은 뒤 귀국하여 최초의 특전부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후 부대가 커지면서 1969년에 특전사령부가 구성되었고 1공수여단을 모체로 3, 5, 7, 9, 11, 13여단이 계속 생겨나 1980년 당시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런데 실제로 특전부대는 대간첩작전에도 활약했지만 그보다는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민중의 저항을 분쇄하는 '중앙정부의 기동타격대'로서 더 탁월한 효용을 발휘하곤 했다. (주석 3)


전두환의 정권탈취 시나리오는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12ㆍ12 군부반란을 통해 군권을 장악한 후 자신은 계속해서 보안사령관을 맡고 육사 동기이면서 하나회의 멤버인 9사단장 노태우를 수도경비사령관에, 역시 동기이며 하나회 중축인 50사단장 정호용을 대구에서 불러다 특전부대사령관에 앉혔다. 최측근들을 시민들의 시위진압 부대 책임자로 채운 것이다.
  
1980년대 초 한국 주둔 미8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 대장
▲ 위컴  1980년대 초 한국 주둔 미8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 대장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박정희가 그랬듯이 전두환에게도 마지막 걸림돌은 역시 미국이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미국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승패가 걸렸다. 전두환은 5월 13일 위컴 한미연합사령관과 만났다.

위컴 장군은 5월 13일 전두환 장군과 만났다. 전 장군은 … 북한이 학생 시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남침의 결정적인 시기가 가까워졌을는지도 모른다고 위컴 장군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위컴 장군은, 미국은 언제나 그러하듯 한국을 방위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나 북한으로부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는 없다고 대답했다.…

위컴 장군은 국내 정세에 대한 전씨의 비관적인 평가와, 그가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주석 4)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15일 "(80년 광주의)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9일 촬영한 사진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쫓고 있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15일 "(80년 광주의)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9일 촬영한 사진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쫓고 있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15일 "(80년 광주의)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9일 촬영한 사진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쫓고 있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붉은 색 원)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1979.2.25-2004.5.18)>에서 발췌.
ⓒ 신복진

관련사진보기

 
위컴은 사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정반대의 길이었다.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14일 아침 일찍 '미국정부 당국자들과 한반도 주변정세와 한국사태를 협의'하기 위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운명의 나흘'이 지나간 18일 밤에 귀국했는데 그동안 미군은 신군부의 병력사용 요청을 승인했다.

이는 미국 행정부가 "전두환 장군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을 찾고 있음"을 잘 알면서도, 그리고 겉으로는 한국의 민주화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도 신군부의 쿠데타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논하겠지만 이와 같은 미국 행정부의 태도는 광주항쟁의 전기간과 그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와 자원정책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주석 5)


미국은 평소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듯 하지만 군부쿠데타 등 결정적인 시기에는 발을 빼거나 쿠데타 주동자를 지지하는 등 이율배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미문화원 점거농성 등 반미운동이 거칠게 나온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였다.


주석
1> 정상용 외, 『광주민중항쟁』, 98쪽, 돌베게, 1990.
2> 김진경, 『5ㆍ18 민중항쟁』, 49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15.
3> 정상용 외, 앞의 책, 100쪽.
4> 「미국 정부의 성명서」, 제26항, 앞의 책, 138~140쪽, 재인용.
5> 정상용 외, 앞의 책, 14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5ㆍ18광주혈사,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충정훈련, #5.17쿠데타, #위컴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