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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친부모로부터 양육이 포기되어 의탁할 곳 없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위탁모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없는 아이들이 새로운 가정을 만나기 전까지 시설이 아닌 가정에서 따뜻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가정위탁입니다. 

이 연재는 원가정에서 끊어진 양육의 끈을 새로운 입양가정으로 단절없이 이어지도록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는 입양기관 위탁모들의 이야기입니다. 입양기관 위탁모는 전체 500여 명 수준이지만 갈수록 고령화되면서 숫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2018년 봄에 인터뷰하고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 기자 말   


1958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경북 예천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 소개로 서울에서 만난 남편은 30년 경력의 현직 개인택시 기사다. 일찍 결혼해서 딸 하나 낳고 그 밑으로 아들 둘을 더 낳았다.

아이들은 모두 착하게 자라 결혼했다. 둘은 독립했고 막내자식과 한집에 같이 산다. 큰딸이 서른아홉인데, 22년째 위탁모로 일하고 있는 김근화씨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나이였다.
 
 위탁모 김근화씨. 20여년 동안 그녀의 품을 거쳐 새로운 가정을 만난 아이들이 서른명이 넘었다.
 위탁모 김근화씨. 20여년 동안 그녀의 품을 거쳐 새로운 가정을 만난 아이들이 서른명이 넘었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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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셋인데 위탁모까지? 사람들은 이해 못 했지만...

당시 개인택시 벌이가 좋을 때였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따뜻했고 지금도 여전히 성실한 가장이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돈이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아이를 유난히 좋아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이가 그냥 좋았다. 그걸 초등학생 때 알았다. 함께 살던 사촌 언니가 아이를 낳았다. 가게를 하는 언니를 도와 아이를 함께 키웠다. 학교 갔다 와서 조카 기저귀를 빨고, 양지바른 마당에 널어놓을 때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아이가 좋았다.

셋이나 되는 그녀 아이들이 초·중·고등학생이었다. 아직 한창 손이 필요할 때인데도 젖먹이를 키우고 싶었다. 혼자 입양기관을 찾아가 위탁모 신청을 했다. 있는 아이들도 키우기 벅찰 텐데 굳이 젖먹이까지 위탁해 키우려 한다고 만류하던 사람들은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육체적으로 더 어려워진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와서 집안에 불어 넣는 생기가 모든 걸 압도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지금부터 20년 전이니 90년대 후반이었다. 너무 오래전이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집으로 데려온 아이 이름은 성진이였다. 동글동글하고 예쁜 남자아이였다. 그땐 나이도 젊었고 건강도 좋아 아기 옷은 다 손빨래를 해서 입혔다. 오랜만에 보는 젖먹이여서인지 그녀의 남편도 아이들도 성진이를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성진이는 5개월인가 6개월을 있다가 미국으로 입양되어 떠났다. 보내고 한 달을 울었다. 뭐든 처음은 강렬한 법이다. 위탁모 인생에 첫 아이였던 성진이는 그녀 품에서 짧게 있다 갔지만 잊을 수 없고 잊히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이어서 위탁받은 아이가 원희다. 원희는 노르웨이로 입양을 갔다. 신생아로 와서 5개월을 키워 보냈는데, 나중에 훌쩍 자라 13살이었을 때 한국 방문 길에 그녀를 찾아와 반갑게 만난 기억이 새롭다. 원희를 보낼 때도 많이 울었다. 그다음 아이를 보낼 때도, 또 그다음 아이를 보낼 때도, 울었다. 위탁모 생활 이십여 년 동안 서른 명이 넘는 아이를 보냈고, 환갑이 넘은 지금도 아이를 위탁받아 키우고 있지만, 아이를 보낼 때는 어김없이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육십 평생을 살면서 면역이 안 되는 유일한 순간이 아이와 헤어질 때다.

당시에 위탁비로 받던 돈이 10만 원 조금 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돈을 보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가 예뻐서 먹이고 입히는 가욋돈이 수월찮게 들어간다. 정 떼이는 게 지겨워 어느 순간에는 인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정말 그만둘 생각을 하다 보면 또 어느새 아기 울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보낸 아이 옷 빨다 뒤돌아보고,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아이 없는 적막감이 밀려든다. 그러면 또 '아이 어서 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게 깊은 기억을 남긴 아이는 동수다. 몇 번째 아이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 나이 40대 중반이었다. 당시 아이가 오면 5개월 아니면 6개월 주기로 새로운 부모를 만나 입양을 가던 시절이었다. 동수는 18개월을 함께 있었다. 갈 만하면 아프고, 또 갈 만하면 아픈 일이 몇 번 반복되어 빚어진 일이었다. 만으로 18개월이었다. 말귀도 알아듣고 엄마 소리도 곧잘 하던 때였다. 살붙이고 산 시간만큼 살을 파고드는 게 정이다. 동수가 미국으로 떠나고 닥친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별의 고통은 살을 비비며 살았던 시간과 비례했다.
 
 몸은 힘들어도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들은 더 행복했다.
 몸은 힘들어도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들은 더 행복했다.
ⓒ 김소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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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을 기다린 아이 떠나보내니 실어증까지

2012년부터 입양특례법이 시행됐다. 해외입양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는 국내입양 숫자에 비례하는 해외입양쿼터제를 시행했다. 국외입양 대상 아동을 줄이기 위한 전형적인 억지 정책이었다. 게다가 해외입양 대상 아동 조건에 국내입양을 위한 시도를 다섯 번을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까지 생겼다.

의료상의 경미한 소견에도 주저하는 한국의 입양문화를 도외시한 정책이었다. 하물며 작은 장애를 가진 아이는 국내입양은 꿈도 꿀 수 없는 실정이 지금 한국의 입양문화다. 장애아이를 키우며 사는 일이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온 가족이 달라붙어도 도무지 힘에 겨운 현실이어서 누구를 탓할 처지도 아니다. 해외입양을 가지 못하는 아이가 가야 할 곳은 시설밖에 없다.

법률과 행정이 아이들 인권과 복리에 부응하지 않았다. 부모가 필요한 아이들은 현실을 무시한 법과 제도 아래서 새로운 부모로부터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는 권리가 지연되거나 박탈당했다. 법 이전 5~6개월 걸리던 입양 대기 기간이 법 시행 이후 국내입양은 평균 7개월, 해외입양은 20개월이 넘게 걸리는 장기지체가 일상이 되었다.

이는 아이들에게는 곧 위탁 기간이었고 임시부모와의 이별을 확정해둔 한시적 동거 기간이었다. 이미 생부모와의 이별을 경험했던 아이들이기에 위탁 기간은 무조건 짧을수록 좋다. 새로운 부모와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 그 아이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김근화씨 품에서 동수보다 더 오래 머물다 간 아이가 있었다. 은하였다. 불과 3년 정도 지난 이야기다. 젖먹이 때 와서 만으로 38개월을 살았다. 한국 나이로 치면 다섯 살이었다. 근화씨 집에 아들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이 함께 살 때였다. 은하는 며느리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손자 손녀들이 근화씨를 할머니라 부르니까 자연스럽게 은하도 그녀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은하가 4년 가까이 국내로 입양되지 못한 이유는 단지 다른 여자아이들보다 월등하게 몸이 크다는 이유였다. 태어난 한국에서 생부모로부터 보살핌이 포기된 은하는 다른 가정에서도 외면당했다. 이례적으로 4년 만에 은하를 입양하겠다고 나선 입양 부모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 있었다.

은하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은하는 근화씨의 큰아들을 큰아빠라 불렀다. 미국에서 양부모가 와서 데려가는 그 날, 말하자면 제 삶의 처음 4년을 함께 했던 가족들과 영영 이별하는 날에 그녀의 큰아들이 동행했다. 헤어지기 전까지 은하는 큰아빠와 소풍이라도 나온 줄 아는 표정이었다.

양부모가 탄 차에 올라탄 은하가 이별을 예감하고 큰아빠를 부르며 울고불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그럴까 봐 거기까지 가지 않으려 했는데, 은하가 가는 뒷모습까지 가슴에 새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녀를 이끌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고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한때 그녀의 자식들이 깊이 정든 은하를 입양하자 했었다. 잘 키울 자신이 없어 그녀가 오히려 딸 아들을 설득했지만, 차라리 그때 자식들 말을 들었으면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은하 떠나보내고 모든 가족이 한동안 슬픔에 빠져 살았다. 그녀의 상실감은 더 심각했고 기어이 실어증까지 오고 말았다. 은하의 발길이 닿았던 어떤 곳에도 눈길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부모 없는 아이를 대신 키워 보내야 할 위탁모였다. 그렇게 키워 보내는 게 위탁모의 숙명이었다. 곧 그녀는 다른 아이를 품에 안았고, 다시 키워 보냈으며, 또 한바탕 눈물을 쏟고, 또 다른 아이를 품에 안았다.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을 돌본 그녀

지난해 그녀를 인터뷰했을 때 그녀 품에 안겨 있던 남자아이는 4개월 때 지방에서 와서 10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머리가 심하게 비뚤어진 사두증 때문에 고가의 맞춤형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인터뷰 당시에는 이미 헬멧도 벗고 물리치료까지 다 끝난 후였다. 사두증이 있는 아이의 국내입양은 굉장히 어렵지만, 해외입양은 어렵지 않다. 해외에선 병이 아니라 증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국의 낮은 입양문화 수준이 아이를 아직도 해외로 입양 보내는 가장 큰 원인이다.

이 아기 이름은 경수인데 근화씨가 키우면서 보니 아이가 똑똑하다. 비뚤어진 머리도 교정이 돼서 멀쩡해졌지만, 국내입양은 이미 어려워졌다. 남은 의료기록 때문이다. 대체로 국내입양은 건강한 여자아이 중심이다. 사두증에 각종 투약 기록이 남아 있는 남자아이라면 국내입양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입양을 어렵게 하는 입양법과 관련 정책으로, 입양대기 기간까지 길어지면서 한국의 입양문화는 점점 더 어려운 처지로 전락하고 있다.

이 때문에 희생되는 대상은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이다. 위탁모인 김근화씨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아이를 키워 보내면서 몸으로 겪어내는 중이다. 가장 큰 원망의 마음은 현행 입양특례법이 시행된 직후인 2012년부터다. 해외입양대상 아동의 경우 2년 가까이 위탁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긴 후유증이 말로 할 수 없이 슬프고 아프기 때문이다. 가야 하는 아이도, 보내야 하는 위탁모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위탁모에게 그 고통의 대상이 아이들이라면 치유의 대상도 아이들이다. 아이를 떠나보낸 상실감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다시 아이를 키우는 일이다. 마치 마약처럼 벗어날 수 없는, 하지만 마약과 달리 한 생명을 살리고 보살피는 선순환의 굴레에 스스로 빠져든 이들이 위탁모다. 20여 년을 넘게 이 굴레 안에서 서른 명의 아이를 키워내며 웃고 울었다.
 
 아이를 보살피고 떠나 보내며 삼십년을 살았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계획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그녀의 품에 살았던 아이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 외롭지 않은 노년을 함께 해 줄 것이다.
 아이를 보살피고 떠나 보내며 삼십년을 살았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계획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그녀의 품에 살았던 아이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 외롭지 않은 노년을 함께 해 줄 것이다.
ⓒ 김소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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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이나 되는 손자·손녀들도 그녀 손에 키워 본 적 없다. 그녀가 돌봐야 할 소중한 아이들은 따로 있었다. 기간의 길고 짧음과 관계없이 그녀 품에 있을 때는 오직 그녀의 아이였다. 앞으로 몇 년을 더 할지 그녀 자신도 알 수 없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성실했던 남편도 4~5년 후에는 지금 타고 있는 택시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퇴직할 계획을 하고 있다. 그때 맞춰서 그녀는 시골로 내려가기를 원한다. 그녀 역시 자연스럽게 아이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보냈던 삼십년 가까운 위탁모 생활을 정리하게 된다.

서른 후반부터 모든 삶의 중심을 부모 없는 아이를 키워내면서 보낸 인생이다. 아이는 곧 그녀에게 삶이었다. 서른 명이 훨씬 넘는 아이들 삶의 처음이 그녀로부터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안타까움이 부모로부터 보살핌이 포기된 아이들이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또 다른 존재는 그런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줄 위탁모들이다. 각박하고 비정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세상에 사람다움이 가능한 이유를 만들어 준 이들이다. 위탁모 김근화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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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안녕하세요.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입니다. stargazer@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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