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7 16:47최종 업데이트 19.09.27 17:12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박물관 정문을 지나, '통곡의 벽'이라는 건물 외벽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이 우리를 맞이했다. 70분의 얼굴들 중 30명이 한국 분이라고 한다. 이분들의 용기에 다시 한번 숙연해졌다.

'위안부' 동원은 중일전쟁(1937년) 초기부터 있었고, 1941년에만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조선인 여성 2000~3000명이 동원한 것이 확인됐다. 일본의 패전기에 일본군에 학살되거나 집단자살을 강요 받은 지역도 있고, 전쟁 막바지에는 그대로 내버려지기도 했다. 외벽에 이 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귀한 증언을 해주신 것이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박물관의 '통곡의 벽' ⓒ 오마이뉴스

 
전시관 안에는 흑백임에도 충격적인 생생한 사진들과 당시에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리병들이 많았던 것이 인상적이었고, '위안부'들을 성병 등으로부터 관리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었다. 왜 사진 촬영이 금지 되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위안소'에서도 느껴지는 일본 정부의 치밀함에 소름

전시물에는 중국어와 영어가 병기 되어 있고, 간혹 한국말도 보이지만 대부분 한글이 없어, 짧은 영어 실력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전시실에서 인가 표를 볼 수 있었는데 '위안부' 숫자와 군인 숫자가 부대별로 나와 있는 표였다. 소름 돋는 것은 정확하게 비율이 맞았다는 것이다.


군인 500명에 '위안부' 10명 꼴로 배치되어 있었다. 시간은 15분에서 20분,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30명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하셨으니, 단순한 계산만으로도 하루에 8~10시간을 그렇게 보내신 것이다. 일본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를 했는지 드러나는 부분이라 이런 자료가 있는데도 부정하고 있는 일본이 우습고 옹졸하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 난징대학교를 갔다가 빠르게 오전에 전시관에 와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중국에 여행을 해보면 중국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관광지에서도 외국인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날은 반갑게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어느 단체에서 오신 모양이었다. 임정로드 탐방단의 김종훈 기자가 전시실 곳곳에서 한국어로 설명을 해주자 옆의 다른 한국 사람들이 같이 듣다가 왜 우리 가이드는 이런 설명이 없냐며 볼멘소리도 나왔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박물관의 '통곡의 벽'의 모습.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작품을 전시해 놓고, 관람객이 직접 눈물을 닦을 수 있게 하얀 면수건을 비치해놓았다. ⓒ 오마이뉴스

 
그렇게 각자의 걸음으로 전시를 보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조각상 앞에 다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 조각상은 주름이 선명한 할머니가 마치 온몸으로 울고 계신 듯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눈에서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을 닦아달라는 문구와 함께 하얀 면수건이 정갈하게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같은 일행이 아니기도 하고 처음에는 어색해서 조금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서로서로 배려하며 차례 차례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비록 실제 할머님을 찾아뵐 순 없지만, 그 조각상이 어떤 의미로 그곳에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조차 눈물을 닦아 드릴 수가 없었다. 내가 눈물을 닦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통곡을 할 것 같아서였다. 짧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눈물을 닦아 드릴 수가 없었다.

너무 슬프고 힘들어서, 오히려 핑계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대한 태도였다. 너무 슬프고 힘들어서, 그래서 그것을 오히려 핑계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관련 영화도 당연히 '너무 슬플 거니까' 보지 않았다. 어차피 대충 아는 내용일 테니 생각하고 굳이 찾아 보지 않았다. 이미 뉴스에서 다 들은 내용일 거니까 굳이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와 돌아보면 내가 아는 내용은 '위안부'에 '위안'이 무슨 뜻이었는지 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비록 그날, 그 자리에서도 내가 눈물을 닦아 드리지 못했지만, 누군가 잘 알지 못해서 '위안부'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면 흘려 듣지 않게 되었다.
 

작은 소녀상 프로젝트. 현재 집안 거실에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놓여져 있다. 비록 작지만 이것을 본 가족과 지인들이 다들 관심있게 한마디씩 한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 이근주

   
과거의 나는, 외교적 문제도 있고 아프고 치욕스러운 역사를 들춰낼 필요가 있나, 어차피 알아도 심적으로 힘들기만 하고 변할 게 없는데 왜 알아야 하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지금은 달라졌다. '또 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최근의 역사를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금전적 보상이나 처벌을 위해서가 아니라, 또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약속, '사과'를 받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요즘 더 느낀다. 과거의 일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또 똑같은 일을 저지를 가능성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12.28 위안부 합의' 할 때, 중국은 그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곳 난징에 그것도 부동산 개발의 명당 자리에 10년의 진통을 겪으면서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박물관'을 세운 것일 것이다.

지금도 '토착왜구'의 역사 왜곡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려니 매일 분노를 느끼고 지칠 때가 많다. 차라리 관심도 없고, 몰랐다면 당장은 마음이 평온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짓고, 과거를 잊게 하고 싶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지치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끝까지 버텨 살아 남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지치지 말고 지금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버티려 한다. 무거운 마음을 추스리고 일행들과 천녕사로 향했다.

- 4일차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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