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0 13:57최종 업데이트 19.09.20 13:57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과 유족의 삶을 8주에 걸쳐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좌익으로 색출된 시민들을 찍은 사진. ⓒ 심명남

   
"얼릉 하나씩 고르게."

이장은 자기 집 마당에 모인 청년들을 재촉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제비뽑기에 응하지 않았다. "어허! 얼릉 뽑으소." 이장 역시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청년 십여 명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하나씩 제비를 뽑았다. "자, 이제 뽑은 것을 펼쳐 보소." 청년들은 자기가 뽑은 종이에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을까 조마조마해 하며 펼쳤다.


제일 먼저 종이를 펼친 개똥이(가명)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엑스(×)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속마음이야 뛸 듯이 기뻤지만, 누군가는 동그라미를 받아야 했기에, 내색할 수는 없었다. 옆에 있던 덕칠(가명)이도 펼쳤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면 먼저 맞는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덕칠이가 펼친 종이에도 엑스표가 있었다.

그렇게 차례대로 종이를 펼치는데, 일곱 번째 순서가 왔다. 모인 청년들 중에서 가장 어린 기동(당시 16세)이가 종이를 펼쳤다. 순간 기동이의 눈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종이에 동그라미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는 펴보나 마나였다. 전부 가기 싫어하는 군(軍)에 입대하는 제비뽑기라 당첨되었다고 축하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도 기동이에게 축하한다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하기에도 뭐했다.

이장이 어린 기동이에게 "으짤 것이냐. 니가 우리 마을을 대표해서 군에 가야 쓰겄다. 몸 건강히 잘 다녀오거라"라고 말했다. 열여섯 살 기동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발길을 뒤로했다. 1948년 여름, 전남 고흥군 도양면 득량리에서 있었던 제비뽑기였다.

열여섯 살에 입대... 가자마자 여순사건 발생
 

여순사건 당시 학살된 희생자를 찍은 자료 사진.

   
그렇게 득량리에서 유일하게 입대한 기동이 들어간 곳이 마침 국군 14연대였다. 그런데 그가 입대한 지 몇 개월 만에 여순사건이 터졌다.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장교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사병들도 장교를 따라 봉기군에 합류했다. 봉기군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것은 일주일여에 불과했다. 그후에는 다시 세상이 뒤집혀 진압군이 각 지역을 다니며 빨갱이 사냥을 시작했다. 봉기군 편에 섰던 기동도 체포돼 대전형무소로 옮겨졌다. 

전남 고흥군도 마찬가지였다. 도양면 득량리에서는 14연대에 입대한 정기동 집이 타깃이 되었다.

마을 한가운데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나오라"는 군인과 경찰의 엄명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기동 집에서는 그의 아버지 정찬오와 어머니 김신근, 형 정귀동이 나왔다. 권총을 쥐고 있던 군인은 "빨갱이 가족들은 모두 이리 와"라고 했다. 정찬오와 정귀동 부자는 죄인처럼 손을 앞으로 하고 조심스레 나왔다.

군인이 권총으로 손짓을 하자, 군인들의 매타작이 시작됐다. "아이구우." 비명도 소용이 없었다. 때리는 경찰에겐 판소리의 추임새에 불과했다. 매타작은 기동의 형 정귀동에게 집중됐다. 아버지 정찬오는 연로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가량 매타작을 당한 정귀동은 그야말로 반죽음의 송장 신세였다. 정귀동의 부모와 아내는 이내 곡을 해댔다. 아버지 정찬오 자신도 성한 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들을 등에 업었다. 어머니 김신근은 뒤에서 아들 엉덩이를 받치고, 귀동의 아내는 남편의 고무신을 들고 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귀동을 부축했다가는 어떤 화를 입을지 몰라 혀만 차며 바라만 보았다.

정찬오는 집에 와 아들을 마루에 눕히자마자 변소로 갔다. 똥 바가지를 똥통에 집어넣어 휘이 저었다. 그리고는 말간 똥물을 그릇에 담아 왔다. "애비야, 이것 좀 먹어봐라." 귀동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달려들어 귀동의 입을 벌리고, 똥물을 입속에 넣었다. '쿨럭쿨럭'하는 소리와 함께 똥물 반은 흘리고, 반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먹은 똥물 덕분인지 정귀동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시신매장 표찰을 준 대전형무소장

한숨을 돌린 정찬오는 마을 유지를 찾아가 일수 돈을 빌렸다. 높은 이자였지만 할 수 없었다. 논 다섯 마지기에 밭도 제법 있었지만 급하게 팔아 돈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전형무소에 있는 차남 기동의 면회에 필요한 돈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버지 정찬오가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당시 고흥에서 대전까지는 하루에도 벅찬 길이었다. 출발한 다음날 오전 면회를 했는데, 형무소 면회장에 나온 이는 아들이 아니라 해골 그 자체였다. 해골이 다가와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야 정찬오는 정신을 차렸다. "아이고..."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진 아들의 말은 아버지의 심장을 끊어지게 했다. "아버지, 왜 이제 오요."

면회를 마치고 고흥으로 내려오는 내내 정찬오는 눈물을 흘렸다. 아들의 생목숨이 날라갈 판이었다. 며칠간 서둘러 급전을 빌린 그는 다시 대전 면회길에 올랐다. 아뿔싸. 그렇게 형무소에 면회를 신청했는데 한 발자국 늦었다.

"아드님이 사망했습니다."

형무소 보안과장은 무미건조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되돌아섰다. 처형된 것인지, 병사(病死)했는지 설명조차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6.25 발발 전에도 여순사건 관련자에 대한 처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반란군 포로에 대한 언도는 기보한 바와 같이 대전임시고등군법회의에서 224명의 사형언도를 한 바 있었는데, 그 중 1차로 사병 55명에 대한 총살형이 27일 상오(上午;오전) 10시 45분부터 당지 모처에서 집행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11월 30일자>

그러면 모처(某處)란 어디인가. 대전향토사자료에 의하면, 둔산에 자리했던 대전비행장이었고, 총살집행자는 대전에 있던 제2연대였다고 한다(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대전의 옛 이야기 하권>, 2016). 정기동 또한 한국전쟁 전에 대전비행장에서 처형된 후 대전형무소 근방에 가매장 된 것으로 보인다.

잠시 후 형무소장이 나타나서 "이 표찰을 가져가시오, 다음에 이걸 갖고 와서 이장(移葬)을 해 가시오"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아버지 정찬오는 곡을 터뜨렸다.

12세에 똥장군 졌지만... "여한 없다" 

6.25 발발 직후 정덕제(75세. 전남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는 끔찍한 상황을 목격했다. 바닷가를 뛰노는데,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와 조무래기들은 시커먼 물체 가까이 갔다.

그런데 조무래기들이 동시에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검은 물체는 다름 아닌 시체였다. 4~5구의 시신을 서로 묶어 바다에 내던진 것 같았다. 시신은 이미 바닷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인근 장흥, 보성, 고흥 등지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거나 수장되어 파도에 밀려 온 것이다.

삼촌 정기동이 여순사건과 관련해 대전형무소에서 죽고, 아버지 정귀동은 '빨갱이 동생'을 두었다는 이유로 매타작을 당한 후 반송장이 되자, 정덕제는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금산중앙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정덕제는 초등학교 때인 12세부터 똥장군을 지기 시작했다. 식구들을 먹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정덕제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크고 체격이 좋아 농사일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를 가는 모습을 보면 하루 종일 우울했다.
 

증언자 정덕제 ⓒ 박만순

 
정덕제에게 고흥에서 살아내는 것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섬에서는 나쁜 소문 하나가 나면, 섬 전체에 금방 퍼지고 오랜 기간 소문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삼촌이 빨갱이로 찍힌 그에게 이장, 반장도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정덕제는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 때문에 억눌려 사는 것이 싫었다. 아니 삼촌 때문이라도 더욱 악착같이 살아 지역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꿈은 소위 지역의 유지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반장, 이장이 되는 꿈은 접었다. 그는 돈을 악착같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61년에 유자를 심었는데, 이게 대박을 쳤다. 10년 후인 1971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는데, 돈이 굴러들어왔다. 이후부터 운이 맞아 재산이 급속히 불어났다. 1985년도 한 해에 1억 원을 벌었다. 그해 면(面)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냈다. 그만큼 섬에서 1억이라는 돈은 큰돈이었다.

돈을 벌고 나니 어릴 때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중앙초등학교 육성회장을 시작으로 금산중·고등학교 육성회장을 내리 했다. 또 어민들의 계모임인 어촌계장을 18년간 했으며, 수협 대의원, 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다. 이른바 유지가 된 것이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잘 나가던 그에게 병마가 찾아왔다. 1985년 조선대학교에서 위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잘해왔는데, 2018년 작년 그에게 유방암이 찾아왔다. 성인 남성 1000명 중 한 명이 발병한다는 유방암에 걸린 것이다. 젊었을 때 기운 세서 일 잘하고, 돈 잘 쓰고, 술 잘 받아주던 그였다. 두 번의 암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에겐 여한이 없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자녀들이 모두 잘 컸다. 또 삼촌 정기동의 명예회복도 이뤘다.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을 해서 진실 규명을 받았고, 국가로부터 보상도 받았다. 할아버지가 1961년도에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너에게 큰 짐을 주고 간다"라는 말이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그 짐을 덜어놔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정덕제의 얼굴은 힘든 세월을 살아온 사람 같지 않은 해맑은 모습이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70여 년간 간직했을 한(限)이 병이 된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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