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03 08:00최종 업데이트 19.09.03 08:00
날카로운 통찰과 통통 튀는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는 2030 칼럼 '해시태그 #청년'이 매주 화요일 <오마이뉴스> 독자를 찾아갑니다.[편집자말]
87년 시청광장에서 수많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시위를 하고 있을 때, 15세의 소년이었던 박재덕씨는 MX오토바이에 탄 동네 형의 모습에 열광하고 있었다. 쟁취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오토바이였고, 영웅이 있다면 오토바이 탄 형이었다.

몇 년 후 오토바이 면허를 따고,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부터 중국집 배달 알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장밋빛 미래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박재덕씨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고를 당했다. 사장은 임금을 용돈조로 주고 있었는데, 사고가 나자 수리비가 임금보다 더 많이 나갔다며 그 '용돈'마저 주지 않았다.


20대 때는 가스통 알바를 했다. 수입이 꽤나 짭짤했는데 그만큼 위험했다. 중앙선을 넘어온 차에 치여서 몸이 공중에 떴고, 그 길로 일을 그만뒀다. 가스통 사장도 중국집 사장님처럼 임금을 용돈처럼 줬고, 각종 벌금을 매겨 도로 가져갔다.

동료들을 이끌고 노동 문제 해결한 박재덕씨
 

박재덕씨 ⓒ 박재덕

 
오토바이에 다시 타는 게 무서웠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다시 불안한 두 바퀴 위에 올랐다. 90년대에도 플랫폼이 있었는데 바로 삐삐와 공중전화였다. 예전에는 물건 배달을 하고 사무실에 꼬박꼬박 들어가서 다음 주문을 처리했는데, 삐삐가 생기면서 공중전화를 통해 바로 다음 거래처 배달을 갈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혁신적인 무전기가 나왔다. 사무실에선 무전기로 수유-강남, 마포-강서 등으로 쭈욱 콜을 불렀고, 무전기를 잡고 먼저 대답한 라이더가 콜을 잡아갔다. 기사들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전기를 구입했다. 최초의 전투 콜이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듯했지만, 주변 동료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90년대에도 라이더들은 목숨을 잃었고, 개인사업자라는 말을 들었다.

30대 중반엔 안경렌즈를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전에 떼지 않던 3.3%를 떼고 월급을 주기 시작했다. 3.3%는 개인사업자에게 매기는 세금이었다. 월급은 주는데 개인사업자라고 하는 게 이상했다. 이 고민은 6년 동안 계속됐고, 퇴사즈음에 퇴직금 이야기를 꺼냈다. 업체 사장은 20년 전 중국집 사장님처럼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만, 박재덕씨는 20년 전과 달랐다. 노동법을 뒤졌고, 노동청 진정을 했다.

박재덕씨가 나서니 동료들이 뒤따랐다. 체당금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사장이 돈 없다고 버티자 무료법률구조공단이 있다는 걸 알았고, 변호사의 도움으로 사장의 재산을 압류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40대 때는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을 배달하다가 부당해고를 당했다. 자기가 해고당했을 때는 참고 넘어갔다. 한 달 뒤 같이 일하던 동료도 해고당했다.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노동청과 다른 노동위원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무사의 존재를 알고 동료들과 함께 돈을 모아 노무사를 고용했고, 부당해고구제신청에서 승리했다. 자기 권리를 찾았지만 뭔가 허전했다. 사장들은 문제를 제기한 노동자에게만 퇴직금을 주거나 부당해고를 철회했다.

노조위원장이 되다

그 이후엔 배달의민족과 요기요 등 새로운 기술과 좋은 이미지를 앞세운 플랫폼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시급 1만 1500원을 보장해준다는 말에 올해 4월부터 요기요 플러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8개월 계약이었다. 그런데 두 달도 안 되서 카톡방에 공지가 틱 올라왔다. 시급을 1000원 깎는다는 내용이었다. 한달 후에도 공지가 올라왔다. 시급을 5000원으로 하고, 배달 1건당 1500원을 준다고 했다.

계약서를 쓸 때는 사장님이라며 위탁계약서를 썼지만, 출퇴근시간도 정해져있었고, 휴식도 조를 이루어 가게 했다. 심지어 다른 지역에 사람이 부족하다며 성북에서 용산으로 파견을 보내기도 했다. 그가 가진 계약서엔 고정급, 8개월 계약, 위탁계약, 협의 후 변경 등의 단어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회사는 새로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요기요 본사 앞에서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을 연 라이더유니온. 요기요 박스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박재덕씨다. ⓒ 라이더유니온

 
20년 전, 계약을 할 땐 개인사업자라고 모든 책임을 라이더가 지게 하더니 일을 시킬 땐 회사 소속 근로자처럼 온갖 지시를 다했던 업체들이 떠올랐다. 혁신과 새로운 기술이라고 했지만, 그가 겪어야 했던 일은 다를 게 없었다.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이런 일들을 홀로 해결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TV에도 출연했다. 어젯밤(2일)엔 퇴근 후 모인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 요기요 강북분회를 설립하고 노조위원장이 됐다.

인맥과 학벌은 물론 서로 의지할만한 친척 하나 없었던 그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변호사 살 돈과 큰 병이 났을 때 필요한 돈 1000만원을 언제나 모아놓고 사는 것이었다. 그가 걸어온 인생의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돈이 없어 병원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갑자기 경찰에 잡혀가 두드려 맞고 자백을 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 자신이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등 부당한 일들을 수없이 겪었다.

그에게 법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힘 있는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았고, 힘없는 자들이 인생을 걸고 법을 지키라고 해야 겨우 지키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고, 결국 노동조합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정치다

최근 80년대에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과 80년대에 군사정권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 '저랑은 다른 세상에 사는 놈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거죠.' 그의 일갈이다. 정치혐오일까?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은 문제를 노동청 신고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제로 만들었고 기업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이게 정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좋은 학벌도, 좋은 직장도, 힘 있는 교수나 변호사 친구도 없다. 하지만 그저 그가 겪었던 임금체불과 부당해고, 불안한 삶의 문제를 홀로 해결하기 위해 노동법을 뒤지고 노동청을 쫓아다닐 또 다른 박재덕을 만나러 가면 될 뿐이다.

그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이는 87년의 또 다른 역사인 노동자대투쟁의 역사를 잇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주인공은 80년대에 명문 대학을 다녔던, 태초부터 권력을 가졌던 소수의 사람들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배달노동자 박재덕의 30년은 우리가 정치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요즘 TV와 신문을 보면 정치가 혐오스러운가? 우리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있는가?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두 기득권 정당이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등을 돌리는 게 아니라 관심을 돌리는 것으로, 거대정당에 부탁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해보자. 노동조합은 이런 변화를 위한 첫걸음일 수 있다. 그렇게 제2 제3의 박재덕이 나오길 기다린다. 오래됐지만 녹슬지 않은 송곳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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