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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이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였다면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고 있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눠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에 이어 이번에는 '현충원길'이다. - 기자 말

▶ 코스안내 : ①서울현충원 4·3길 – ②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길 – ③서울현충원 5월길 – ④서울현충원 친일파길 – ⑤서울현충원 전직대통령길 – ⑥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14일 오전 서울에 도착한 북측대표단 30명이 오후 3시경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분단이후 최초로 참배했다.
 2005년 8월 14일.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이날 서울에 도착한 북측대표단 30명이 오후 3시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분단이후 최초로 참배하고 있는 모습.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김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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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14일 광복 60주년에 즈음해 북한의 노동당 비서 김기남 일행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이 반공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한국전쟁 중에 전사한 군인들이 안장된 곳임을 감안할 때 김기남 일행의 현충원 참배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김기남 비서는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환담하는 자리에서 "대표단이 광복절 즈음에 방문하니 조국 광복을 위해 생을 바친 분들이 있어 방문하겠다는 의견을 제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공·군사주의의 상징으로만 여겨왔던 현충원이 거꾸로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현충원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일은 이제 결코 특별한 일일 수 없게 되었다. 이미 현충원에는 한반도 남단으로 우리의 시야를 묶어놓을 수 없는 상징시설이나 묘소가 많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아픈 현대사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35년을 지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미소양군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분단으로 이어졌다. 크고 작은 갈등과 충돌로 이어지다가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까지 발발하면서 70년 넘게 분단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아픈 현대사를 안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한민국은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도 38선을 둘러싼 크고 작은 충돌과 여순사건과 지리산 빨치산과의 전투 중에 이미 80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졌던 장충사 자리를 이들 군경을 안장하는 임시 묘지로 운영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동작동을 국군묘지 부지로 지정한 것도 전쟁과정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안장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현 서울현충원이 이렇듯 국군묘지로 시작한 사정 때문에 국립묘지로 전환한 1965년 이후에도 반공주의와 군사주의의 상징적인 장소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육탄10용사 현충비'에서 되새기는 분단의 비극, 친일의 잔재
 
육탄10용사 현충비와 육탄 10용사 묘비 육탄10용사 현충비는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북한의 인민군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을 안은 채 인민군 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전사한 10명의 국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비이다. 육탄10용사 현충비 뒤편의 6묘역 맨 앞줄에는 서부덕 소위(당시 2등 상사)를 비롯한 10명의 전사자가 안장되어 있다.
▲ 육탄10용사 현충비와 육탄 10용사 묘비 육탄10용사 현충비는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북한의 인민군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을 안은 채 인민군 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전사한 10명의 국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비이다. 육탄10용사 현충비 뒤편의 6묘역 맨 앞줄에는 서부덕 소위(당시 2등 상사)를 비롯한 10명의 전사자가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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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10용사 현충비는 원래 흑석동 한강변 언덕(현 효사정문학공원 자리)에 있었다. 사건 당시 1사단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의 주도로 1955년 5월 4일에 흑석동에 건립됐던 것이 흑석동 고갯길(동작로) 확장공사로 인해 1977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다.

육탄10용사 현충비는 남북이 38선을 경계로 북한의 인민군과 대치하던 상황에서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을 안은 채 인민군 진지에 뛰어들어 진지를 분쇄하고 전사한 10명의 국군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비다. 육탄10용사 현충비 뒤편의 6묘역 맨 앞줄에는 서부덕 소위(당시 2등 상사)를 비롯한 10명의 전사자가 안장돼 있다.

김석원의 회고 <노병의 한>에 따르면, 육탄10용사의 희생은 송악산 일대의 인민군 진지의 전면인 "475고지와 292고지에다 비록 마대 진지와 같이 허술한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방위진지를 구축"하던 중 이를 방해하기 위한 인민군의 공격이 벌어지면서 발생했다. "292고지의 진지를 점령해버린 데 대하여 국군이 반격전을 펼치는 와중에 제2대대가 천신만고 끝에 7부 능선까지 진출했지만 인민군에게 완전히 노출된 급경사지대에서 진퇴양난에 빠져 어이없게도 아군의 희생만 강요당하는 꼴이 됐을 때" 서부덕을 비롯한 10명의 군인이 특공대를 자처하면서 희생했다.

사건 직후 이범석 국무총리는 "10용사는 명령에 의한 결사대가 아니요, 전술상 필요를 통감하고 자진하여 살신성인을 한 것이니 그들의 충용한 행동이야말로 국군의 모범이요, 조국수호의 정화라 할 것"이라고 격찬했다. 또한 김석원 1사단장은 "나는 이러한 병사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38선 돌파쯤은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요, 이런 병사라면 전 세계라도 석권할 수 있는 기개라고 믿는 바이다"라고 칭송했다.

육탄10용사 현충비는 외세의 개입을 극복하지 못한 채 38선을 사이에 두고 대결을 벌이고 있던 남과 북이 무력으로 분단상황을 극복하겠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어떻게 한국전쟁으로 빨려들어 갔는지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비의 전면 중앙에는 '건립경위'를 설명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해방 이후 三八선으로 말미암아 국토가 분단되어 오던 중 단기 四二八二년에 이르러서는 개성 서북방 송악고지에 공산 괴뢰군이 불법 침입하여 방위가 불리하고 개성이 위태로우매 동년 五월 四일 제一사단 제十一련대 소속 서부덕 소위 이하 九명의 용사 화랑정신을 받아 조국애와 민족정기에 불타는 정열로 몸에 포탄을 지니고 적의 지하 참호 속에 뛰어들어 육탄 혈전, 적진을 분쇄하고 옥으로 부서지니 멸공전사상에 이룬 공과 그 용맹이 널리 세계에 펴지다.

광음이 흘러도 잊음없이 명복을 빌고 그 영령을 추모하고저, 이에 눈물과 정성으로 현충비가 서나니 이는 조국수호의 정신을 청사에 새기고 만대에 전함이라 十용사의 영혼 불멸하여 겨레와 함께 살며 길이 빛나리로다."


그런데 비문에 등장하는 '옥으로 부서지니'라는 문구는 일본이 과거 우리에 대한 식민지배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불거진 최근의 한일 갈등을 떠올릴 때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일제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가마카제 특공대의 몸체공격을 칭송하면서 사용되던 '옥쇄'라는 단어를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이 이렇게 풀어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육탄10용사 현충비는 그 비문을 통해 비 건립을 주도한 김석원을 비롯한 초기 대한민국 국군의 주도세력이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친일청산의 과제가 여전한 우리의 과제임을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서 부르는 반전·평화의 노래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이상현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 형태로 안장되어 있다.
▲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이상현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 형태로 안장되어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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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는 한국전쟁 당시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이상현 등 48위의 무명용사 유해가 반구형 석함분묘 형태로 안장돼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약 5만 명으로 추산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포항지역을 비롯한 각 지구 전투에 투입된다. 이들 중 7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곳에 모셔진 48위는 당시 포항전투에 참전한 71명의 중대급 학도의용군 중 인민군 전초부대에 맞서다 전사한 48명이다. 이들 48명의 무덤은 원래는 포항여중 부근에 가매장돼 있었다. 1963년 9월 24일 국무회의에서 국군묘지 안장을 의결하면서 1964년 4월 25일 대한학도의용군 동지회 주관으로 국군묘지 제5묘역으로 이장했따. 이어 1968년 4월 지금의 자리에 다시 이장하게 되었다.

이 탑은 1954년 10월 30일 건립 당시에는 이름이 '무명용사비'였다. 1956년 1월 16일에는 대표 무명용사 1위를 이 비에 안장하면서 '무명용사탑'으로 개칭됐다. 오늘날과 같이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바뀐 것은 1968년 4월의 일이다.

이때 대표 무명용사 1위를 납골당으로 이장한 후 무명용사탑을 현 위치로 옮긴 다음, 포항에 있던 학도의용군 전사자 48위를 제단과 함께 이 탑 뒤쪽 반구형 석함으로 이장하면서 묘는 '학도의용군의 묘'라 표기하고 탑의 명칭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으로 바꿨다.

이 탑은 3개의 아치형 문형으로 구성돼 중앙의 큰 문형 속에 무명용사탑이 세워져 있고 탑 뒤쪽 중앙에는 사각의 화강암 석함으로 된 반구형의 분묘가 설치돼 있다. 

영화 <포화 속으로>(2010)는 포항지구 전투에 참전한 학도의용병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이들은 과연 전쟁 영웅이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만 17세 이하의 소년·소녀병은 2만9603명(이중 소녀병은 467명)에 달했다. 이중 2573명은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도 이와 비슷한 규모의 소년·소녀병에 비슷한 규모의 전사자를 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참전한 경우도 있었지만,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허다했다. 무력으로 분단상황을 극복하겠다는 헛된 꿈은 이렇게 남과 북의 어린 소년·소녀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도 모자라 끝내 수많은 목숨마저 빼앗아 갔던 것이다.

당시 소년·소녀병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어머니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남긴 채 끝내 포항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당시 동성중 재학생)의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편지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 앞에 함께 전시된다면 전쟁의 참상을 보다 생생히 전하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배우는 명소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참고로 이우근의 편지글은 2009년 포항시 용흥동 전몰학도충혼탑 광장에 '이우근 편지비'로 새겨졌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이제 우리는 '육탄10용사 현충비'와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서 상투적으로 이들의 위용을 칭송하기 보다는 다시는 이런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고귀한 생명을 더이상 잃지 않도록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고민해야 한다.

현충문에 숨어 있는 분단의 역사  
 
헌충문 폭파기도 사건을 보도한 언론기사(<동아일보>, 1970. 6. 22) 1970년 정부 대간첩본부는 “6월 22일 새벽 3시 50분경 북괴 무장공비 2-3명이 서울 영등포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침투, 현충문의 폭파를 기도했으나 실패, 그중 1명이 폭사하고 나머지 잔당은 도망쳤다.”고 발표했다.
▲ 헌충문 폭파기도 사건을 보도한 언론기사(<동아일보>, 1970. 6. 22) 1970년 정부 대간첩본부는 “6월 22일 새벽 3시 50분경 북괴 무장공비 2-3명이 서울 영등포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침투, 현충문의 폭파를 기도했으나 실패, 그중 1명이 폭사하고 나머지 잔당은 도망쳤다.”고 발표했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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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정부 대간첩본부는 "6월 22일 새벽 3시 50분경 북괴 무장공비 2~3명이 서울 영등포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침투, 현충문의 폭파를 기도했으나 실패, 그중 1명이 폭사하고 나머지 잔당은 도망쳤다"라고 발표했다.

이 신문은 "이들은 현충문 오른쪽 지붕에 로프를 걸고 올라가 지붕 밑에 폭발물을 장치하려다 잘못 다루어 폭발, 무장공비 한명은 현충문 왼쪽 30m 지점에 날아가 폭사했다"라고 보도했다.

당시 현충문 앞에서는 6월 25일 '6.25 20주년 기념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자칫 1983년의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던 충격적인 사건이 13년 앞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먼저 발생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이들 아웅산 테러 사건의 희생자들은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돼 있다).

이 현충문 앞 폭파 미수사건이 있었던 1970년은 베트남전이 한창인 시점이었다. 2년 전인 1968년에는 북한 특수부대의 1.21 청와대습격 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도 했다. 반대로 한국군에 의해 북의 원산에서 인민군의 사단장 '목이 날아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1년 후인 1971년에는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던 실미도 부대가 실미도를 탈출해 대방동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이래 남과 북의 적대적 긴장관계가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절 발생한 사건들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곧 서울현충원 평화·통일길②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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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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