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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하마드였는지, 아니면 핫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만 가구 공장이 몰려있는 공단 방향으로 가는 버스나 전철에서 종종 그렇게 생긴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긴 몇몇의 사람들을 접하게 될 때마다 몸이 닿지 않게 다리를 오그리거나 특유의 향신료에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들에게 특별히 불만이 있거나, 아니면 그들이 나에게 해코지를 했다거나, 나의 일자리를 빼앗았다거나 하는 그런 피해의식도 있을 리 없었다. 그 사람들이 우리가 기피하는 3D 업종의 노동력을 대신해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고맙지도 대견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네들이 살아가기 위한 생존방안으로써의 선택이 이 땅의 필요와 맞아떨어진 것일 뿐, 거기엔 어떠한 연민도 사회적 배려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이방인- 나와는 상관없는 -이었을 뿐이다.

한때 노동자의 작업 환경이나 근로 조건 등 노동 환경에 관심 있던 사람이었는데도 가끔씩 보도되는 그들의 생존 환경에는 무관심했다. 알게 모르게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나의 세계관은 캐나다에 와서 살면서 꽤나 달라졌다. 일단 그렇게 생긴 사람들뿐만 아니라, 듣도보도 못했던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고, 그들과 뒤섞여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고, 그들에게 임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지위를 누리는 생활이었다. 태생적으로 한국인이라는, 그곳에 살면서는 알 수 없었던 그런 엄청난 사회적 지위가 나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태생적으로 주어진 지위와 신분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국 땅에서 살아보니 그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강력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난민보다도 못하다며 자조적인 농담이 오고가기도 하는, 이젠 내가 바로 그렇게 생긴 사람이 되었다.
 
2018년 9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맞은편에서 난민대책국민행동 회원들이 난민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부가 예멘 난민 23명에게 내어준 인도적 체류 허가를 규탄하고 같은 시간 열린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에 대응해 집회를 열었다.
 2018년 9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맞은편에서 난민대책국민행동 회원들이 난민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정부가 예멘 난민 23명에게 내어준 인도적 체류 허가를 규탄하고 같은 시간 열린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에 대응해 집회를 열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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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신부, 난민, 그리고 다문화 가족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도 제법 국제화 또는 글로벌리제이션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가구공장의 네팔인, 비닐하우스 농장의 방글라데시 인부, 이웃집 총각이 맞이한 베트남 신부, 아들 학교 친구의 필리핀 엄마를 위시한 다문화 가정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국내에는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10건의 결혼 중 1건은 국제결혼이다(2018년 기준).

그런데도 우리네 인식은 아직도 대원군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싶을 때가 있다. 얼마 전엔 제주도에 머무르는 난민이 화제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화두가 되고 있는 난민 문제에 한국도 자유롭지 않게 된 모양이다.

물론 다문화 가정과 난민의 경우를 동일선상에 놓고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선 이들의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단일 민족임을 강조하는 독보적인 사회 중 하나인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오해일까?

또 한 가지, 비록 나쁜 의미로 쓰이지는 않더라도 다문화 가정이란 용어 자체가 편견과 차별의 시작점이다. 문화란 원래 다양한 것이거늘. 난 다문화 가정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이 진정한 다문화 정책이라고 여기는 사람 중에 하나다. (사실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더 지저분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베트남 엄마가 있는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 불리지만, 영국인 아빠가 있는 가족은 다문화 가정이라 취급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 그럴까?)

아들에게 경고 받는 아빠

그렇다면 오지랖 넓은 캐나다 사람들은 어떨까?

이곳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이다 보니 난민이나 이민자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캐나다인들은 인구 문제에서 파생되는 부족한 노동력 문제 등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이민 정책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이민자를 줄여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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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수많은 이민자를 상대해야 하는 캐나다는 이민자 포용 정책을 표방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이런 나라답게 캐나다 교육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차별에 대한 경계이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이 하나로 융합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캐나다는 그 기초를 학교에서부터 심화해 나가고 있다.

여기서 잠깐 고백하자면 나는 그다지 평등주의나 비차별주의자로서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축에 드는 인물이다. 그래서 캐나다에서 철저하게 차별 방지 교육을 받는 초등학생 아들에게 종종 옐로 카드를 받는다. 특히 운전 중에 짜증이 나면 인종이나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거칠게 말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아들에게 혼구멍이 난다.

캐나다에서는 아이들이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다양한 인종을 만나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날 때부터 다름을 인지하고 살아간다고 봐야 할 듯하다. 교육은 그저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하모니를 이루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래 이미지는 가정통신문에 동봉된 안내장이다. 진정한 다문화의 실재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일부 캐나다 초등학교에서 가정으로 전달되는 가정통신문
 일부 캐나다 초등학교에서 가정으로 전달되는 가정통신문
ⓒ 이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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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사회 문제를 바라볼 때 지녀야 할 태도는 역지사지다. 역지사지는 바로 나와 다른 다양성에 대한 공감 능력에서 발현된다. 이 능력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사람들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트리거나 갈등을 일으킨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전대미문의 사고를 접하고도 남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그런 유사한 일을 겪게 되지 말란 법이 없을 텐데, 완전히 남 얘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니 문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처지가 바뀌어보면 된다. 난민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출발은 신분의 문제로 인한 불편함 혹은 두려움, 불안감을 가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에서 신분이나 지위로 인한 차별이나 불편부당함, 불이익을 경험하고 나아가 그 사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아 지속적인 거주가 거부되거나 추방되는 공포와 불안은 마치 나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인생을 건 판돈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천적 지위로 인한 공감의 부재를 어찌할 수 없다면, 재일교포에게 가하는 일본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그와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했나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우리가 받는 차별은 억울하고, 우리가 남에게 행하는 차별은 정당하다는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인생이란 언제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하는 세계에서 개인의 미래는 언제나 유동적이다. 그 변화의 물결속에 개인의 정치적·사회적 신분의 변화 또한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에 대한 대비는 나와 다름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양성의 사회 -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지금도 종종 이곳의 현지인들이 내가 한국에서 그렇게 생긴 사람들에게 대했듯이 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때가 있다. 하지만 만약에 캐나다에 나와 같은 사람들만 산다면 우리 가족은 벌써 캐나다를 떠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는 본연의 인간다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나 정치적 이데올로기, 경제적 혹은 사회적 편견 없이 모두가 본래의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 어쩌면 그런 사회가 유토피아가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 사회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선진 사회이며 이에 대한 여러 경험과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반면에 몇 가지 단점 또한 지니고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다양성의 부재, 아니 다양성의 몰인정이다. 캐나다란 나라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도 아니고,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도 아니며, 한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도 아니다. 하지만 캐나다가 선진국임을 부인할 수 없는 근거는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의식의 선진성에 있다.

난 지금도 반성하고 있다. 
'그때 무함마드에게 잘해 줄 걸 그랬어.'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브런치에 함께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다문화, #다원화사회,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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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마을의 가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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